"그 일 때문에 제 인생은 완전 송두리째 망가졌어요. 그 스님은 사람이 아니에요. 악마에요. 악마."
지난 14일 오후 방송된 SBS 시사 고발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싶다> '주지 스님의 이중생활'(아래 <그알>)에 출연해 S 사찰 H주지 스님의 성폭행을 고발한 박영희(가명)씨의 고백이다.
박씨의 고백은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의심스럽게 할 만큼 경악스럽다. 문제의 주지 스님은 경북 칠곡에 있는 S 사찰의 주지를 지냈고, 조계종단에서는 사회법으로 말하면 1심 법원 재판관에 해당하는 초심 호계위원을 맡은 바 있는 거물급이었다. 그는 신병 치유차 자신을 찾은 박씨를 성폭행했고, 이 결과 박씨는 주지승의 아이를 뱄다. 박씨가 스물다섯 살 때인 2012년 벌어진 일이었다. 여기까지는 박씨 측의 주장이다. 이 같은 주장에 대해 주지승 측은 박씨 측이 돈을 노리고 자신을 음해한다는 주장으로 맞섰다.
방송을 보는 내내 사건의 궤적이 삼일교회 시무 당시 복수의 여성도를 성추행하고도 아무런 반성 없이 홍대새교회를 개척한 전병욱씨 사건과 판박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전씨와 마찬가지로 H주지 스님은 전혀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다. H주지 스님은 박씨 측이 19억이란 돈을 청구한 점을 부각해, 자신을 공갈·협박의 피해자라고 강변했다. 양측의 대립에 대해 <그알> 취재진이 전문가에게 도움을 의뢰한 결과 박씨의 의견에 더 무게중심을 뒀다.
개신교나 불교나, '제 식구 감싸기' 한 몸
여기서 주목해야 할 지점은 종단 측이 이 사건을 다뤄나간 방식이다. 전씨의 경우, 그는 자신이 속한 예장합동 교단으로부터 그 어떤 징계도 받지 않았다. 징계권을 가진 이 교단 산하 평양노회는 2016년 1월 전씨에 대해 공직 정지 2년, 설교 2개월 정지의 처분으로 마무리했다.
이 결정을 두고 교계 안팎에서는 교단과 노회가 제 식구 감싸기로 전씨에게 솜방망이 징계를 내렸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오히려 사회 법정이 전씨가 다섯 차례에 걸쳐 여성도를 성추행했음을 인정하고 그에게 1억의 배상판결을 내렸다. 결국, 법원 판결은 교단과 노회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옳았음을 입증해 준 셈이다.
<그알>이 파헤친 H주지 스님의 사례도 이와 비슷하다. 박씨의 어머니 진경숙씨(가명)는 지난 7월 H주지 스님의 성폭행 행각을 고발한 문건을 조계종 본원과 경북지역 여러 사찰에 발송했다. 의혹이 일자 H주지 스님은 9월 환속제적원을 내고 물러났다.
이때 조계종 종단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조처를 했다. 법원에 해당하는 호계원은 그에 대해 징계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지 않았다. 종단이 공문을 통해 <그알>에 입장을 전해왔는데, 역시나 무책임하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려워 보였다. 이들의 입장은 이랬다.
"명확한 조사를 통해 종단 차원의 조처를 하고 일벌백계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자유의사를 통해 탈퇴한 개인에게 강제적인 구속력을 행할 수 없는 자율적 종교단체의 한계로 우리 종단은 부득이 종단 내부 법규인 '승려법'에 의거 적정한 절차를 거쳐 9월 14일 환속제적원을 처리했습니다."
일반사회 조직의 경우 구성원 누구라도 물의를 일으키면 일단 자리에서 책임을 지운다. 하물며 중생들의 아픔을 보듬어야 할 스님이, 그것도 거물급 승려가 성폭력 의혹에 휘말렸음에도 종단이 '자유의사' 운운하며 징계를 가하지 않았음은 비판을 사기에 충분하다.
조계종에 드리운 농단의 그림자
종단 내 정치는 심각성을 더한다. H주지 스님은 S 사찰의 17, 18대 주지로 시무했다. 그런데 17대와 18대 사이 1년 1개월간 공백 기간이 있었다. 1년여의 공백에도 H주지 스님은 주지로 복귀할 수 있었다. 피해자 박씨는 상주 성불사 큰스님과 각별한 관계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고, <그알> 취재진은 이 말을 근거로 큰 스님의 존재를 찾아 나섰다.
결과는 뜻밖이었다. 1994년 조계종 사태 당시 총무원장이었던 서의현 스님이 큰 스님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만약 큰 스님이 정말로 서의현 스님이고, 그와 H주지 스님의 유착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문제는 실로 심각하다.
서 스님은 장기집권을 노리다 조계종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이다. 사태가 수습되면서 서 스님은 승적 영구 박탈을 의미하는 멸빈 처분을 받았다. 서 스님은 이에 맞서 재심을 청구했고, 이에 지난 2015년 조계종 재심호계원은 공권정지 3년으로 감형했다. 이에 따라 서 스님은 21년 만에 승적을 회복하는 듯 했다. 그러나 불교계시민사회와 종단내 일부 단체 등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제동이 걸렸다.
저간의 상황을 보면 서 스님은 엄연히 종단에 큰 누를 끼친 장본인이다. 그런 그가 H주지 스님의 뒤를 봐줬다면 그야말로 종단 질서를 어지럽힌 농단이다. 시민들은 최순실 국정농단을 통해 권력자를 등에 업은 비리 의혹엔 반드시 협력자가 있다는 사실을 목격했다. 서 스님과 H주지 스님의 농단에도 어김없이 협력자가 등장했다. 바로 동화사 주지를 지낸 S 스님이었다. <그알> 취재가 사실이라는 전제로 말하면, S 스님은 서 스님의 측근 노릇을 하면서 H주지 스님을 두둔하는 데 앞장선 행동대장이었다.
이 모든 정황은 H 주지 스님의 성폭행 의혹이 단지 개인의 일탈이 아님을 강력히 시사한다. 그러나 관련 당사자들은 발뺌하기 급급하다. 서 스님은 H 주지 스님과의 유착 의혹에 대해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라"며 강하게 부인했다. S 스님도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종단 측 역시 <그알>의 취재에 부담을 느끼는 기색이 역력했다. 다른 스님들의 반응은 더욱 기가 찬다.
"SBS가 불교 탄압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왜 세상의 관심사가 되어야 하냐."
"당신들에게나 중요하지 나한테는 안 중요하다."
'종교'란 한자어를 그대로 풀이하면 '으뜸(宗) 가르침(敎)'이다. 즉, 이해타산이 횡행하는 세속의 논리를 초월해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는 보편적인 가르침을 주는 게 종교가 수행해야 할 본연의 사명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H주지 스님의 성폭행 의혹을 통해 드러난 조계종의 민낯은 세속보다 더 타락했으면 타락했지, 세속의 귀감이 되지 못했다. 조계종에서 제적 처분을 받은 명진 스님은 조계종의 현실을 이렇게 개탄했다.
"H 스님이라는 사람이 깨끗한 종단 풍토 속에서 튀어나온 게 아니고 한국 불교의 타락상 쪽에서 나온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가슴 아프고 슬프다."
그런데 어찌 불교뿐이랴, 개신교 역시 타락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올 줄 모른다. 특히 7년 동안 전씨의 성추행 행각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박씨의 사연은 자꾸만 전씨 사건을 떠올리게 했고, 그래서 더더욱 마음이 아팠다.
개신교 교회든, 불교 사찰이든 종단을 막론하고 각 종교의 처소는 다난한 세상사에 지치고 다친 중생들이 마지막으로 기대는 곳이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 종교의 현실은 이 같은 역할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당장 격려 한 마디가 아쉬운 중생들을 야비하게 등치는 마물 소굴에 불과하다.
도대체 약하고, 다치고, 목마르고, 억눌린 중생들은 어디로 가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