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편 6:1-4, 로마서 3:23-28, 마가복음 12:28-31 -
Jesu Juva. 유명한 서양 동화 중에 "벨벳 토끼"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벨벳이란 '비로드'라고도 불리는, 표면이 치밀하고 보풀이 있는 직물을 의미입니다. "벨벳 토끼"는 어떤 아이가 갖고 있는 두 개의 동물인형, 즉 말 인형과 토끼 인형이 나누는 대화로 이루어진 동화입니다.
잠자는 아이의 머리맡에 새로 들어온 토끼 인형이 이 아이의 오랜 친구인 말 인형에게 묻습니다. "나는 '진짜' 토끼가 되고 싶어. 진짜는 무엇으로 만들어졌어?" 말 인형이 대답합니다. "진짜는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 하고는 상관이 없어." 다시 토끼 인형이 묻습니다. "진짜가 되기 위해서는 많이 아파야 하는 거야?" "때로는 그래. 하지만 진짜는 아픈 걸 두려워하지 않아." "진짜가 되는 일은 갑자기 일어나는 거야?" "아니지, 그건 아주 오래 걸리는 일이지." "그럼 진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데?" 토끼 인형의 질문은 끝이 없습니다. "아이가 진정으로 너를 사랑하고, 너와 함께 놀고, 너를 오래 간직하면 돼. 즉, 아이에게 진정한 사랑을 받으면 너는 진짜가 되지."
성 프란체스코의 기도문 중에는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고,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어릴 때부터 무수히 많이 들었습니다. '사랑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주는 사람이 되어라.' '그리고 이왕 주는 사랑이면 아낌없이 제대로 주어라.' 말만큼 실천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가끔 이 말을 떠올리면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자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남을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랑을 제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인형 장난감은 아이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닳고 닳아 비록 생김새는 초라해져도 진정한 아름다움을 지닌 진짜가 됩니다. 이건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진짜가 될 수 있는 기회라는 뜻입니다. 사랑 받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진짜입니다. 사랑을 받아보지 않은 사람은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보질 못합니다. 진짜 사랑은 사랑을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사랑은 사랑에서만 나옵니다. 진짜가 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사랑을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21살에 수도사가 되어 평생 기도하고 금식하며 극단적인 금욕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이르려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고 수도사로서의 엄격한 고행의 길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자신의 불안과 두려움을 달래주지 못했습니다. 그는 노력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완벽하지 않은 자기 자신에 대해 하나님이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완전하신 것 같이 자신도 완전해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렇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해 하나님이 실망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루터는 오랫동안 '하나님의 의'(dikaiosyne theou)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의로움 앞에서 자신은 아무리 애써도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 때문에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성경을 읽다가 로마서 1:17에 이르러 숨이 멈추는 것을 느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 때 그는 자신이 천국에 이르는 문을 이미 통과했음을 느꼈다고 술회합니다. 그 때 거기서 그는 하나님의 의가 불의한 자를 벌주시는 의가 아니라 순전한 자비와 은혜로 우리를 의롭다 해주시는 의라는 것을 파악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죄를 심판하는 징벌적 의가 아니라 여전히 죄인인 인간을 향해 '죄 없다' 선언하시는 은총의 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믿음이란 "인간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선언하는 용기," 혹은, "[죄인인 인간이] 용납될 수 없는데도 [하나님에 은혜에 의해] 용납되었음을 용납하는 용기"(폴 틸리히)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신앙생활을 시작해도 여전히 구원 받을 자격이 없는 자이며 비천한 자이고 죄 많은 자이며 죽을 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며 그 사랑 안에서 우리가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게 믿음임을 루터는 깨달았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의의 본질이 진노가 아니라 사랑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죄인을 벌하는 사법적 정의가 아니라 의롭지 않은 자를 의롭다 선언하는 은혜의 정의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순간 루터에게 그토록 공포스러웠던 '하나님의 의'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깨달음의 순간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이 사실로 즉시 나는 다시 태어난 듯 열린 문을 통해 천국에 들어간 듯 느끼게 되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루터는 하나님이 먼저 루터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아주 기본적인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사랑 받을 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자신을 괴로워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요엘 2:13)다는 성서의 가르침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루터에게 일어난 이 깨달음은 그의 불안한 영혼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그의 영혼은 이제 평안해졌고, 확신에 찼으며, 담대해졌습니다. 그 결과 수도원 안을 유령처럼 배회하며 내면의 고통에 시달리던 루터는 그의 사상의 건전성을 묻는 보름스 회의장에서 목숨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신앙의 투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가톨릭교회의 성례전 신학에 따르면, 인간은 반복되는 성사(聖事)를 통해 죄라는 영혼의 질병을 조금씩 고쳐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영세, 성체, 견진, 고해, 종부(병자), 신품, 혼배 등 일곱 가지 성사를 정성스럽게 받아야 했고, 또 때에 맞게 다양한 기도문을 암송해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리아와 성인 숭배, 성상 공경, 자학적 참회, 여러 가지 금식과 기도, 그리고 십자군 전쟁 참가 등 교회가 만들어낸 갖가지 신앙의 관습들과 전통을 지켜야 했습니다. 거기에 면죄부까지 돈을 내고 사야 했습니다. 하지만 루터의 깨달음은 형식적이고 관습적인 신앙에 젖어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독일종교개혁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루터를 공부하다보면 이상하게도 사도세자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사도세자의 사례에서 루터가 발견한 것이 무엇인지 매우 극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생각할 '사'(思)자에 슬퍼할 '도'(悼), 아버지 영조는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죽인 후 이렇게 '사도'라 호를 붙여주었습니다. '슬픔을 생각하다.' 그게 사도세자의 뜻입니다. 조선의 21대 왕 영조는 이복형 경종이 갑자기 사망하자 왕이 되었고, 40세가 넘은 늦은 나이에 아들 사도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선왕을 독살하고 왕이 되었다는 혐의 속에서, 그리고 천한 무수리의 몸에 태어났다는 신하들의 경멸의 눈초리 속에서 영조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걸었습니다. 사도가 태어나자마자 세자로 책봉했습니다. 그리고 두 살부터 왕세자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배우 송강호 씨와 유아인 씨가 주연한 영화 <사도>를 보면, 영조 임금은 밤을 새워 자식을 위해 책을 만듭니다. 내관이 '밤이 깊었으니 그만 주무시라' 권해도 "아비가 자식을 위해 책을 만드는데 자네 같으면 잠이 오겠는가"라고 반문하며 밤새도록 자식을 위해 책을 만듭니다. 고맙게도 어린 아들은 총명했습니다.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며 공부에 전념했습니다.
그런데 열 살 무렵부터 갈등이 시작됩니다. 세자가 칼놀이와 그림 그리길 좋아하는 것입니다. 공부가 아니라 자기 부인과 함께 선물 받은 개를 그리며 놀았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을 거라는 기대로 아들의 처소를 찾았다가 충격을 받은 영조가 말합니다. "네가 나라를 망치려 작정하지 않았다면 내가 밤새워 만든 책을 어찌 이리 홀대하느냐?" 이후 끊임없이 아버지의 질타가 이어졌습니다. "내가 너 나이 때는 단 한 순간도 공부를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너는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왜 공부를 하지 않는 거냐?" "너를 제대로 된 임금 만들려고 내가 얼마나 노력하는 줄 아느냐?" 속이 터지는 영조가 결국 입을 꾹 다문 사도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너는 일 년에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몇 번이나 드느냐?" 거짓말이라도 매일이라고 답해야 할 아들은 아버지의 강압에 지쳐 이제 솔직하게 대답합니다. "한 두 번이요!" "내 탓이다. 너 같은 인간을 세자로 세운 내 잘못이야!" "어찌 이런 애비에게서 이런 자식이 나왔단 말이냐!" 이제 아버지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화살이 되어 아들의 심장을 찌릅니다. 결국 아버지의 입에서 나오지 말았어야 할 말이 나옵니다. "너는 존재 자체가 역모다!" 사도는 미쳐버렸습니다. "저도 그런 제가 싫사옵니다!" 사도세자는 활을 쏘며 마음을 달래봅니다. 활시위를 당기고 나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허공으로 날아간 저 화살이 얼마나 떳떳하냐!" 그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떳떳하지 못함에 괴로워했습니다. 존재 자체를 부인 당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뒤주에 갇히기 전 사도가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절규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강요한 방식은 숨 막혔소. 공부, 그게 중요한 것이요?" 영조가 대답합니다. "하나만 삐딱해도 신하들이 멸시한다. 이 나라는 공부와 예법이 국시다." "어떻게 공부와 예법이 사람을 옥죄는 국시입니까? 나는 임금 되기 싫소!" 뒤주 속에서 죽어가며 사도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이것입니다. 이 말이 저로 하여금 사도세자와 루터를 연결 짓게 했습니다. "내가 바란 것은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번, 다정한 말 한마디였소!"
비극으로 끝난 사도세자와 영조의 관계와 달리 세계의 역사를 바꾼 루터와 하나님의 관계에 대해 우리는 다시금 성찰하게 됩니다. "너는 존재 자체가 역모다!" 영조가 아들에게 한 말입니다. 그런데 성서에 보면,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를 향해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마가 1:11)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를 기뻐한다고 하셨습니다. '너가 가진 것' '너가 이룬 것' '너가 나를 위해 해준 것'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너'를 기뻐한다고 하셨습니다. 영조의 화법으로 이 말을 바꾸면 '너는 존재 자체가 기쁨이다!'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도세자는 말했습니다. "내가 바란 것은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번, 다정한 말 한마디였소!" 마르틴 루터도 같은 것을 찾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이라는 그의 존재 자체가 고귀하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높은 의 앞에서 결코 떳떳하지 못함을 깊이 깨닫고 온 몸으로 고뇌하던 루터는 그 긴 내면의 투쟁 이후에 마침내 '하나님의 의'가 정죄나 심판이나 징벌이 아니라 용서하고 용납하고 무조건적으로 품으시는 의라는 것을 깨닫고 그 앞에 무너집니다. 하나님의 의의 본체가 사랑임을 깨닫고 무너집니다. 그것이 은혜임을 깨닫고 감동합니다. 그 감동으로 그는 자신을 바꾸고 교회를 바꾸고 또 세상을 바꿨습니다.
한국인들은 '카리스마'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보통 카리스마란 '많은 사람들을 휘어잡는 능력이나 자질'을 말합니다. 학문적으로도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그의 저서 『경제와 사회』(Wirtschaft und Gesellschaft, 1921)에서 전통적이고 법률적인 권위와 구별되는 새로운 형태의 권위로 카리스마를 정식화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의 어원은 신약성서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때 그 은혜라는 말의 원어가 바로 카리스마입니다. 성서에서 카리스마는 하나님이 사랑으로 베푸시는 은총을 말합니다. 대가나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 은혜, 그리고 다시 거두어가지 않는 하나님의 선물을 카리스마라고 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의 선물을 뜻하기도 합니다. 특히 성령의 현존과 그에 의한 은혜를 설명하기 위해 이 말이 많이 사용됩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데는 세 가지의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협박하는 것이고, 둘째는 매수하는 것이며, 셋째는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영조 임금에게는 첫 번째의 카리스마가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종류의 카리스마를 한국인들은 '칼 있으마'로 부르기도 합니다. 즉, 칼자루를 쥐고 상대를 위협하는 카리스마입니다. 하지만 루터를 변화시킨 것은 세 번째의 카리스마였습니다. 여전히 죄인인 자신을 의롭다 여겨주시고 인정해주시고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카리스마, 즉, 은혜에 감동했고 변화했습니다. 그 카리스마에 모든 불안과 고뇌에서 해방되어 그는 천국을 거니는 기쁨을 얻었습니다. 사실 돌아보면,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을 변화시킨 것도 그 무서운 사법집행관 자베르 경감의 체포나 구금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뼛속까지 변화시킨 힘은 장발장이 훔쳐간 은그릇들을 자신이 준 것이라고 감싸준 미리엘 신부의 용서의 은혜였습니다. 루터는 바로 이런 종류의 카리스마에 전율했고, 그 은혜의 힘으로 교회를 개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의 교육학자 로젠탈(Rosenthal)과 제이콥슨(Jacobson)은 교육계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한 연구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교사가 어떤 학생에게 '저 아이의 성적이 장차 크게 오를 것'이라고 기대하면, 그 기대를 받은 학생의 성적이 실제로 올라간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한 초등학교에서 실험을 했습니다. 이 학교의 학생들은 대부분 빈민층에 속했는데, 특히, 열등반에 속한 학생들은 거의 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멕시코 계였습니다. 두 사람은 먼저 전교생을 상대로 지능검사를 실시하면서, 이 검사의 목적이 '앞으로 성적이 크게 오를 가능성이 있는 학생을 찾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계획된 거짓말이었습니다. 지능검사 후 두 사람은 각 반에서 무작위로 20%의 학생을 선발해 그 명단을 교사들에게 돌리면서 이 학생들이 바로 그 학생들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이것도 꾸며낸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교사들은 이것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1년 뒤 학생들은 다시 한 번 지능검사를 받았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실험집단이 된 무작위 20% 학생들의 점수가 일반학생들의 점수보다 거의 50%나 더 올랐던 것입니다. 특히 가난한 멕시코 계 학생들의 점수가 눈에 띄게 향상됐습니다. 왜 그런 결과가 나왔을까요?
연구자의 의도를 모른 채 학생들의 잠재능력을 신뢰하게 된 교사는 그 학생들에게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관심을 쏟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사의 높은 기대감과 신뢰는 그의 눈빛과 말씨와 작은 행동들 속에서 그대로 학생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설사 그 학생이 당장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하더라도 교사는 그 학생의 잠재력을 정말로 믿기에 실망하지 않고 계속 격려하고 애정을 기울였습니다. 이전이라면 '그래 넌 역시 어쩔 수 없는 아이야' 하고 포기할 일도 그 학생의 잠재성을 진심으로 믿기에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선생님의 따뜻한 격려와 사랑을 받은 학생들은 선생님의 신뢰와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선생님의 신뢰와 기대는 사실로 판명나고야 말았습니다. 로젠탈과 제이콥슨은 이 연구를 바탕으로 '어떤 사람이 어떻게 행동할 것이라는 주위의 기대는 그 사람에게 영향을 주어 결국 그가 그렇게 행동하게 만든다'는 이론을 만들었습니다. 이 이론을 "Theory of Self-Fulfilling Prophecy," 즉, '자기실현적 예언이론'이라고 부릅니다.
사랑과 믿음의 힘은 강합니다. 그것은 총이나 칼, 증오나 불신의 힘보다 더 강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그런 위협이나 증오의 감정이 아니라 사랑과 믿음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사랑과 믿음은 사람들 속에 잠들어 있는 것들을 흔들어 깨워 마침내 활짝 꽃피우게 합니다. 그 결과 사랑과 믿음의 힘으로 악한 사람이 범죄의 수렁에서 벗어나 새 사람이 되기도 하고, 불치병 환자가 병을 이겨내기도 하며, 열악한 환경의 사람이 온갖 시련을 헤치고 인간승리를 이룩하기도 합니다. 식물인간이 된 연인의 귀에 2년간이나 사랑한다는 말을 들려준 노력으로 그 사람의 의식이 실제로 깨어나기도 했습니다. 최악의 순간에 처해서도 우리는 우리를 믿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의 삶에는 수많은 기적이 일어납니다. 사랑과 믿음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귀로 들을 수도 없고, 코로 냄새를 맡을 수도 없으며, 손으로 더듬어 볼 수도 없지만, 반드시 타인에게 전달되어 그 사람을 감동시키고 반드시 그의 존재를 변화시키고야 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사랑으로 지어진 존재이고 따라서 사랑 안에서만 비로소 자신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요한 3:16)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처럼'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가르'는 '진실되게'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유명한 구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진실로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다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으로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진실한 사랑으로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오늘 읽은 교독문(요한일서 4장)처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사랑의 본질은 이것이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500년 전 이 땅에 개신교회를 탄생시켰습니다. 이 사랑을 받아들이십시오. 사랑받기보다 사랑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벗어나보십시오. 종교개혁의 요체는 사랑받는 법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를 기뻐하시는 신비한 하늘의 사랑, 여전히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믿어주고 받아주시는 그 하늘의 카리스마, 그것을 받아들이십시오. 당연시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것이 진짜 크리스천이 되는 길입니다. 오늘 하루, 이번 한주, 그리고 앞으로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그런 풍요로운 신앙의 생활을 이어가시길 기도합니다. Soli Deo Gloria. (2017.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