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사야 45:15-17, 고린도전서 1:18-25, 마태복음 4:12-17 -
종교개혁주일을 맞아 오늘은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겠습니다. 특히 그가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 10월 31일에 독일의 비텐베르크 성당에 내건 '95개조 반박문'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사람들은 "500년 전 루터의 망치질이 '근대'를 깨웠다"고 말합니다. 멋진 말이긴 하지만, 실제의 망치질은 없었습니다. 분노에 찬 루터가 망치를 들고 비텐베르크 교회 문 앞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이는 그림은 후대의 상상에 불과합니다. 그 날 루터는 '근대의 헤라클레스'라 불리기에는 아직 준비가 덜 된, 한 사람의 학자에 불과했습니다.
95개조 반박문의 파급력은 미약했습니다. 아니, 거의 없었습니다. 루터가 이 반박문을 대부분의 독일인들이 알지 못하는 라틴어로 썼기 때문입니다. 그는 단지 학자들을 초청해 토론을 벌이고 싶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듬해 봄에 누군가가 이 반박문을 독일어로 번역해 배포하자 루터는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역사의 격랑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이런 루터를 캄캄한 밤중에 오래된 성당의 꼬불꼬불한 나선형 종탑 계단을 기어오르는 사람과 같다고 비유했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이 사람은 의지할 것을 찾느라 손을 뻗었는데 손에 밧줄이 하나 잡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뎅그렁 뎅그렁 종소리가 울려 자신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에는 '개신교회의 출생신고서'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이 땅에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즉, '저항하는 사람들'의 종교가 시작됨을 알리는 상징성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문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의 '고해성사'(告解聖事)라는 제도를 이해해야 합니다. 고해성사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총을 중재하기 위해 마련됐었습니다. 이 제도는 사람들이 모든 잘못을 털어놓고 용서를 구하도록 하는 데 그 의의가 있었고 성도들뿐 아니라 죄인들에게도 큰 위로를 제공했습니다. 루터도 이 제도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고해할 일이 생기면 바로 고해사제에게 달려가 모든 것을 털어놓곤 했습니다. 심지어 한 번은 여섯 시간이나 걸려서 자신이 최근에 지은 죄까지 낱낱이 고해한 적도 있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루터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수도사들은 그들의 기억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고해하지 않은 죄를 찾아내야 했습니다. 물론 고해가 끝나면, 고해자는 고해사제에게 용서를 받곤 했습니다. 하지만 용서란 고해사제의 손이 아니라 고해자가 얼마나 진정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온 참회를 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진심으로 참회했는가, 아니면 그저 하나님께 벌 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잠시 속보이는 참회만 했는가. 이는 오직 고해자 자신만 알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루터의 고민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참회와 고해 사이의 간극에서 고민하던 루터에게 평생 둘도 없는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1510년, 수도원 일 때문에 그가 로마에 가게 된 것입니다. 당시 기독교 세계의 심장부인 로마에 가게 된 것은 루터에게 로또 당첨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마는 사도들과 성인들의 유물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그 유물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공덕을 쌓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당시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무한 공덕, 성모 마리아와 순교자들이 쌓은 유한 공덕으로 이루어진 교회의 영적 보고(보물창고)라는 개념이 발전하면서, 이 공덕의 일부를 영적으로 궁핍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는 관행이 생겨났습니다. 죄는 각자 책임져야 하는 것이지만, 선(덕)은 무언가 공동으로 투자할 수 있는 것이 된 것입니다. 성인들은 자신들의 구원에 필요한 정도 이상의 선을 공덕으로 쌓았기 때문에, 이들의 남아돌아가는 공로, 즉, '잉여 공로'는 남에게 양도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양도는 교회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교황을 통해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이 성인들이 쌓은 공로를 양도하고 분배하고 융통시키는 것을 당시 교회는 '면죄'(免罪, indulgence)라 불렀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처음부터 '면죄'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대사'(大赦)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대사란 원래 고해성사를 통해 죄가 사면된 후에 남아 있는 벌을 교황이나 주교가 면제하여 주는 행위를 일컫습니다. 그런데 16세기 독일에서 유행한 대사는 어떤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모두 용서받을 수 있는 '전대사'(全大赦)였고 이것이 루터의 비판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사실 '잉여 공로'라는 개념은 성서 번역의 오류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교회가 사용하던 라틴어 성경인 불가타(Vulgata) 번역본에서는 누가복음 1장 28절에서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잉태를 고지하며 마리아에게 "은혜가 가득한(라틴어로 gratia plena) 자여 평안할지어다"라고 인사합니다. 이 번역은 마치 마리아가 은혜가 가득한 창고와 같아서, 필요할 때마다 거기서 은혜를 가져다 쓸 수 있을 것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이 부분을 어원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은혜를 받은 자여"가 됩니다. 더 이상 다른 이들에게 은혜를 나누어 줄 잉여 은혜라는 개념은 떠오르지 않게 됩니다.
어쨌든 교회는 이러한 '면죄'를 성인들의 유골 방문과 연관시켰습니다. 당시 교회는 신자들이 성인들의 '거룩한 뼈'를 볼 때마다 얼마만큼의 덕을 보는가를 정확히 계산해서 제시할 정도였습니다. 가령 독일의 할레에 있는 성인들의 유골 하나하나에는 연옥에서의 형기를 각각 4,000년씩 감해주는 면죄의 효과가 있었습니다. 물론 성인들의 유골이라는 그런 '보물'이 가장 많이 보관되어 있는 곳은 로마였습니다. 이곳에 있는 한 납골당에는 무려 40명의 교황과 76,000명의 순교자가 묻혀 있었습니다. 모세가 보았다는 불타는 떨기나무의 가지 하나도 거기 있었습니다. 심지어 유다가 예수님을 팔고서 받은 동전 한 닢도 거기 있었습니다. 그 동전의 면죄 값어치는 매우 높아서, 자그마치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연옥에서 1,400년을 감해주는 면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로마에는 베드로와 바울의 시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머리는 라테라노 대성당에 있었고, 몸의 반쪽씩은 각각 그들의 이름이 붙여진 교회에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 교회가 성인들의 혜택을 골고루 나눠 갖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로마에서 루터는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사도들과 성인들의 유물들을 통해 공덕을 쌓으며 기쁜 마음으로 로마를 훑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고민은 오히려 더 깊어졌습니다. 로마는 구원을 사고파는 영혼의 시장바닥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돈을 내고 죽은 사람들을 위해 미사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미사 요청이 폭주해 미사 때 사제가 말하는 속도가 너무나 빨라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한 교회의 제단 앞에선 두 명의 사제가 별개의 미사를 집전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마음이 참담해진 루터는 라테라노 대성당 앞에 있는 '거룩한 계단'(Scala Sancta)을 오르기로 했습니다.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실 때 오르셨다는 28개의 계단입니다. 이 계단을 무릎을 꿇은 채 기어서 하나씩 오를 때마다 주기도문을 외우면 연옥에 있는 사람 하나를 구출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루터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택한 영혼이 연옥에서 구출되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계단 맨 꼭대기에 다다르자 루터의 마음속에는 이런 질문이 퍼뜩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인지 누가 어떻게 알지?"
로마에서 크게 실망하고 돌아온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옮겨갔습니다. '하얀 언덕'이라는 뜻을 가진 이 작은 고을에는, 하지만 찬란한 기독교 유물을 수집해 놓은 '비텐베르크 성(城) 교회'가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무려 1만 9천 개가 넘는 성인들의 유물이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아기 예수가 누우신 구유 앞에 있었다는 지푸라기, 예수님의 수염 한 가닥, 예수님을 못 박을 때 사용했다는 못 중에서 하나, 최후의 만찬 때 먹다 남은 빵조각, 성모 마리아의 머리카락 몇 가닥, 이 외에도 성인들의 몸에서 나왔다는 수많은 치아와 뼈가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이들 유물 중 하나에 경배하는 것만으로도 100일분의 면죄 값어치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교회의 모든 유물을 다 돌아볼 경우 1만 9천 개의 유물 x 100일 = 총 190만 일, 즉 5200년만큼 연옥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는 면죄를 받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런 커다란 특권이 베풀어지는 날이 바로 11월 1일이었습니다. 이날은 만성절(萬聖節, All Saints Day)로 성인들이 쌓은 잉여의 공로를 분배받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날이었습니다. 독일 전역에서 사람들이 몰려오는 날이었습니다. 이 날 공개되는 성인들의 유물을 보고 약정헌금을 하는 사람에게는 무려 190만 년의 연옥생활을 감해주는 면죄를 받을 수 있다고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루터에게 이런 면죄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면죄는 어느 누구도 진정으로 자신이 지은 죄를 참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만성절 하루 전날인 10월 31일에 비텐베르크 성당의 정문에 면죄부 문제를 논박한 95개조 테제를 붙였던 것입니다. 이 반박문의 정식명칭은 "면죄부의 권한과 유효성에 대한 마르틴 루터의 논쟁"입니다. 날이 밝으면 모든 사람들이 이를 볼 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반박문은 종교개혁의 선언문으로 삼기에는 사실 준비가 모자란 것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종교개혁의 핵심사상인 이신칭의도, 성경의 권위에 대한 강조도 전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아직 루터가 종교개혁자로서의 깊은 통찰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루터 자신도 95개조 테제를 붙인 뒤 거의 2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종교개혁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에는 크게 세 개의 포인트가 있습니다. 첫째는 '고해'가 아니라 '회개'라는 것입니다. 제1조를 읽어보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4:17에서] '회개하라'고 하셨을 때, 이는 믿는 자의 삶 전체가 회개하는 삶이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제2조입니다. "이 말씀이 고해성사, 즉, 사제에 의해 집도되는 고백과 속죄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당시 교회가 사용하던 라틴어 성경은 마태복음 4:17의 예수님의 말씀을 "고해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로 번역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천국의 도래가 고해성사와 연결됩니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인문주의 종교개혁자 에라스무스는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내걸기 1년 전에 이 구절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주장은 '고해성사'의 근거를 뒤흔드는 주장이었습니다. 이를 근거로 루터는 '고해'가 아니라 '회개'가 중요함을 명확히 했습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회개하는 그리스도인은 면죄부 없이도 죄와 벌로부터 완전한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반박문 제36조에서 밝힙니다.
'회개'의 어원은 신약성서에 헬라어로 '메타노이아'(metanoia, μετάνοια)입니다. 이것은 '고해'(告解), 즉, '죄를 알리고 용서하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참회'(懺悔), 즉, '뉘우치고 뉘우치다,' 곧, '깊이 뉘우치다'로 번역되어서도 안 됩니다. 메타노이아는 '회개'(悔改)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회개의 뜻은 '뉘우치고 고치다'입니다. 회개는 단순한 죄의 고백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회개의 시작일 수는 있지만, 회개는 죄의 뉘우침에서 머무르지 않습니다. 아무리 죄를 뉘우치기만 하면 뭐합니까? 다음에 똑같은 죄를 지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메타노이아는 '참회' + '전향'(轉向)입니다. 전향이란 방향전환을 가리킵니다. 삶의 방향이 바뀌어야 회개입니다. 내가 가던 길과 다른 길을 택해서 가는 것이 메타노이아입니다. 동쪽으로 가던 사람이 서쪽으로, 남쪽으로 가던 사람이 북쪽으로 가는 게 메타노이아입니다. 그래서 메타노이아는 '돌아섬'으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로의 방향전환, 돌아섬입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눈앞에 다가왔기에 지금 가고 있던 삶의 방향을 바꾸어 즉시 이 통치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입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많은 부흥회와 통성기도회를 엽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 유의미한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참회는 할지 몰라도 회개, 즉, 메타노이아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참회의 기도를 통해 카타르시스는 경험하는지 몰라도 삶의 방향전환은 없기 때문입니다. 가치관과 삶의 방식은 여전히 하나님 나라로 돌아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서에서 '회개'는 히브리어로 '슈브'(shub)인데 이 역시 '뉘우치다' 외에도 '방향을 돌리다,' '돌아서다'는 개념이 포함돼 있습니다. 회개란 전향입니다. 돌아섬입니다. 루터는 바로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시작이고 핵심임을 95개조 반박문 맨 앞에서 소리 높여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95개조 반박문의 두 번째 핵심은, 교황에게는 연옥을 지배하는 권세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제5조입니다. "교황은 자기의 권위나 교회법의 권위에 부여된 것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벌도 가감할 수 없다." 그리고 제76조입니다. "교황의 면죄부는 아무리 하찮은 죄라도 사할 수 없다."
95개조 반박문의 세 번째 포인트는 가난한 교인들의 복지에 대한 따뜻한 관심입니다. 루터는 반박문 제43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꾸고자 하는 자에게 꾸어주는 것이 면죄부를 사는 것보다 선한 행위임을 알아야 한다." 제45조입니다. "궁핍한 사람을 보고도 이를 지나치며 면죄부를 사는 사람은 교황의 면죄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사실 루터가 면죄부를 비판한 것은 단순히 신학적인 이유에서만은 아니었습니다. 루터는 목회자였습니다. 학자일 뿐만 아니라 목자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비텐베르크 교회에서 목회하던 루터는 면죄부를 사기 위해 목숨을 거는 교인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한겨울에 면죄부를 구입하기 위해 살얼음이 언 강을 건너다 빠져 죽은 교인을 보기도 했습니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에는 이처럼 가난하고 무지한 교인들의 고통을 슬퍼하는 목회자 루터의 마음이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사실 앞서 언급한 '회개하다'는 영어로 "repent"인데 그 뜻을 살펴보니 "re"(다시) + "pent"(슬프게 하다)입니다. 다시 슬픈 마음을 갖는 곳이 곧 회개입니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슬픈 마음에서 회개가 시작됩니다.
'회개'로 시작한 루터의 반박문은 '고난'으로 마무리됩니다. 맨 마지막 95조를 읽어봅니다. "하늘나라는 평화에 대한 잘못된 확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많은 고난을 통해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왜 루터는 반박문을 고난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했을까요? 여기에서 루터의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드러납니다. 바로 '숨어계신 하나님'(Deus absconditus)이라는 개념입니다. 루터는 이 개념을 오늘 봉독한 이사야서 45:15에서 직접 인용합니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숨어계신 하나님은 과연 어떤 하나님일까요? 루터는 중세의 신학을 '영광의 신학'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십자가의 신학'을 이야기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영광의 신학자들은 고통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고통보다는 업적을, 십자가보다는 영광을, 약함보다는 강함을, 어리석음보다는 지혜를 더 좋아한다. 이들이 바로 사도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라 부른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통과 십자가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루터의 '숨어계신 하나님'과 '십자가의 신학'은 하나로 연결돼 있습니다,
루터가 말하는 '숨어계신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입니다. 루터는 한 번도 이 '숨어계신 하나님'을 철학적 존재론으로 설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우리의 시선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길 바랐습니다. 왜냐하면 루터는 우리가 그 초라하고, 연약하고, 십자가에 달려 스스로 낮아지신 그리스도를 통해 '숨어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과 철학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붙잡을 수 있는 신비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이것을 '이 세상의 현명한 사람들에게는 감춰진 십자가의 어리석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숨어계신 분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영광의 신학은 신적인 능력과 지혜와 영광으로 하나님을 직접 인식하려 들지만, 십자가의 신학은 하나님이 스스로를 숨기셨던 그곳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이웃의 고통스런 삶 속에서, 그리고 약함과 어리석음 안에서 하나님을 찾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우리가 고난을 통해서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루터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루터는 95개조 반박문 전체를 통해 시종일관 인간이 자기 확신과 지식과 오만에서 발길을 돌려, 자신에 대한 깊은 절망과 겸손 속에 전적으로 하나님에게로만 향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즉 '회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회개를 통해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해와 선행과 공덕과 면죄를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 삶과 존재 전체의 근원적인 변화를 통해서만 참 구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역사적인 날입니다. 이 날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신 복음의 첫 메시지를 마음을 열고 다시 들어야 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태 4:17) 그리고 바로 이 주님의 복음을 가지고 종교개혁을 이끈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제1조를 마음을 열고 다시 들어보아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마태 4:17)고 하셨을 때, 이는 믿는 자의 삶 전체가 회개하는 삶이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복음의 핵심은 회개입니다. 종교개혁의 핵심도 '회개'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박했습니다. 이 나라의 삶 안으로 발길을 옮기십시오. 이 생명의 나라로 방향을 전환하십시오. 거기 참 생명이 있습니다. 거기 진실된 구원이 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아멘. (2017. 10.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