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명기 30:19-20, 고린도전서 1:27-29, 마가복음 1:40-45 -
우리의 인생은 매 순간이 선택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무의식적으로, 습관적으로 세수하러 일어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오늘 하루를 시작하겠다'고 선택한 행위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무엇을 먹을까, 어떤 옷을 입을까, 어떤 집에 살까, 어떤 학문을 공부할까, 무슨 직업을 가질까, 어떤 사람을 배우자로 삼을까, 결혼은 할까 말까, 자식을 낳을까 말까, 낳으면 언제 낳을까, 그리고 종교는 어떤 것을, 기독교를 택한다면 어떤 교회를 다닐까 등, 무엇 하나 우리의 선택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이렇게 앉아 계신 것도 사실 여러분의 여러 가지 선택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지금 어떤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까? 무슨 문제를 아직 결정하지 못해 고민하고 계십니까? 나의 삶에서 중요한 문제들에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무엇이 선택의 기준입니까?
올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도 '선택'의 문제를 연구한 학자에게 돌아갔습니다. 이른바 '행동경제학'의 선구자인 시카고대학의 리처드 탈러(Richard H. Thaler) 교수는 기존 경제학이 사람들을 매우 합리적인 존재인 것처럼 가정하지만 그렇게 『똑똑한 사람들[이 왜 그렇게] 멍청한 선택』을 하는지 잘 밝혀주었습니다. 심리학과 경제학을 결합한 이 행동경제학자는 우리들 인간이 합리적 의사결정자가 아니라, 비합리적 선택을 이어가는 존재임을 보여주고 그에 기초하여 이른바 "똑똑한 선택을 유도하는 선택설계의 기술"을 제안했던 것입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넛지'(nudge), 즉, 팔꿈치로 슬쩍 찌르는 것, 혹은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 그러니까 '타인의 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개입' 아니었습니까.
언젠가 뉴욕타임스에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실린 적이 있습니다. "이상한 선택의 산수, 6개의 선택권이 600개의 선택권을 이긴다"(In weird math of choices: 6 choices can beat 600)입니다. 이 기사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전통적인 경제 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로서 어떤 선택에 직면했을 때 각각의 경우의 비용과 이득을 계산하고, 그들에게 유리한 쪽을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많은 선택권이 주어지면 사람들은 더욱 만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회심리학자 중에서 이 전통적인 경제 이론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Dr. Sheena S. Iyengar, Dr. Mark R. Lepper). 이들에 따르면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선택권'이 주어지면 어느 순간에 가서 경제적으로 오히려 생산적이지 못한 결과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주장은 한 마디로 '너무 많은 선택권'이 주어졌을 때 - 그리고 특별히 그것들의 차이가 작을 때 - 사람들은 압도당하고 부담스러워하며 그 결과 상품을 덜 구매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구매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해보니, 소비자들은 다종다양한 선택권이 주어졌을 때 그들이 결정해 구입한 것에 덜 만족하고, 몇 가지 안 되는 선택권 속에 구매한 사람들보다 더 실망하고 후회한다고 합니다. 한 예로 초콜릿 구매에 관한 실험을 해보았습니다. 한 그룹의 소비자들에게는 6개의 초콜릿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게 하고, 다른 그룹의 사람들에게는 30개 중에서 선택하게 해서 자신들이 선택한 초콜릿 맛에 대해 품평하게 해보았습니다. 당연히 더 많은 초콜릿 중에서 어렵게 한 가지를 고른 두 번째 그룹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선택한 초콜릿의 맛에 더 만족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그 반대였습니다. 두 번째 그룹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어렵게 골라 맛보는 초콜릿이 덜 맛있고 덜 만족스럽다고 답한 것입니다.
편의점에 가도 다양한 물건들에 압도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커피숍도 마찬가지입니다. 웬만한 지식이 없으면 무슨 커피를 먹어야 할지 모를 정도입니다. 전화 회사는 왜 또 그리 많을까요. 한 전화 회사를 선택해도 그걸로 끝이 아닙니다. 수많은 프로그램이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동차 종류는 얼마나 많습니까. 보험의 종류는 왜 그리 많고, 레스토랑에 가면 왜 그리 선택할 게 많은지... 자녀를 키우다보면 장난감 가게도 가게 되는데, 무슨 장남감이 그렇게 종류가 많습니까.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한국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왜 그렇게 선택할 교회들이 많습니까. 한국은 종교의 '자유 시장'이라고 말해도 결코 과장은 아닌 것 같습니다. 너무 많은 선택, 너무 많은 옵션... 때로는 부담스럽습니다.
물론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만은 아닙니다.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선택할 수 없다는 것보다 백번 낫습니다. 교육학자들이 밝혀낸 사실이지만, 아이들에게 선택권이 주어졌을 때 내적 동기가 발동하고 그래야 더 큰 교육효과를 누린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부 사회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선택권이 더 많아진다고 해서 반드시 더 바람직하며 내부적인 동기유발을 더 일으킨다고 볼 순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어떤 심리학자들은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주어진 너무 많은 선택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짐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그런 현상을 "tyranny of freedom," 즉, '자유의 횡포'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현대인들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선택의 자유와 자율을 누려야 한다는 생각을 종교처럼 숭상하지만, 오늘날 이것의 결과는 "nothing but autonomy," 즉, 자율 이외에는 남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선택하는 존재입니다. 끊임없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 운명입니다.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존재이다. 그가 어느 길을 가거나 자유이다. 그러나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 T.S. 엘리엇도 선택과 책임의 관계에 대해 비슷한 말을 합니다. "모든 사람은 이것이든 저것이든 하나를 선택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만 된다." 하지만 선택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닌 듯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내가 선택한 것에 불만이 생기고 그 때마다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선택하지 못한 걸 그리워하기 때문입니다. 앙드레 지드의 말처럼, "선택한다는 것은 영원히 언제까지나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는 것이며 그 '다른 것들'은 어떤 하나의 것보다 좋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자코 반 도마엘 감독의 영화 <미스터 노바디 - 선택에 대한 작은 농담>은 미래를 볼 수 있는 9살 소년 니모의 이야기입니다. 그 아이는 미래를 볼 수 있기 때문에 무엇이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니모는 태어나기 전에 어떤 부모를 만날지를 선택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 자신의 미래를 봅니다. 어린 니모는 이 모든 미래를 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본 후 니모의 결정은 '선택을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미래를 미리 보았기에, 그래서 자신이 미래에 할 후회를 미리 경험해보았기에 결국 니모는 아무 선택도 하지 않습니다. 아니 못 합니다. 이 영화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사실 선택의 중요성이 아니라 어떤 선택이라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선택은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선택은 하나의 정답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교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서에는 매우 놀라운 선택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1장 40-45절의 이야기입니다. 한 나병 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낫기를 간청하고 그렇게 되었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우리는 이 기사를 그냥 예수께서 병 고치는 기적을 베푸신 사건 정도로 기억하고 넘어갑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성서 원문의 번역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오늘날 독자들은 예수께서 당시 어떤 '선택의 기로'에 서 계셨는지를 전혀 눈치 채지 모하고 있습니다. 그냥 믿음이 좋은 나병 환자가 고침을 받았겠거니 하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이 본문을 정확히 읽어보아야 합니다.
오늘 읽은 개역개정 번역을 보면 40절,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41절,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셨고 그러자 42절,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중 40절에서 이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한 말,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를 공동번역과 새번역은 "하고자만 하시면" 또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고쳐주실 수 있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원하시면" 혹은 "하고자 하시면" 깨끗하게 고쳐주실 수 있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하지만 이렇게 번역해 놓고 나면 그 다음에 전개되는 이야기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43절에 예수께서 그를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44절에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하셨는데, 45절 전반부에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였다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됩니다. '그래, 예수께서는 겸손하시니까,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신 말씀처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사제에게만 보이라고 하셨는데, 병이 나은 그 사람이 감동하여 사방에 광고를 했잖아. 그러니까 우리도 예수님처럼 살아야 해. 좋은 일을 하고 스스로 자랑하면 안 돼. 다른 사람들이 나를 알려야 그게 진짜 빛나는 것이지.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겠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습니다. 성서를 읽으면서 이 정도의 '윤리적' 교훈이라도 끌어낸다면 참 다행이니까요. 하지만 복음서의 저자는 이제 잘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로 이 치유의 사건을 마무리합니다. 45절 전체를 다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해석의 어려움이 발생합니다. 왜 예수님은 이 일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동네 바깥 한적한 외딴 곳에 머물러 계셨어야 했을까요? 분명 나병 환자를 고치신 '좋은 일'을 하셨는데, 단지 자기자랑을 안하신 것뿐인데, 왜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게 되었을까요? 병자를 고친 일이 얼마나 좋은 일인데 왜 그것 때문에 피해 다녀야 하시게 되었단 말입니까? 이제 우리는 이 이야기를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보아야 합니다.
마가복음 1장 40절과 41절의 나병 환자의 말과 예수님의 대답을 다시 옮겨봅니다. 나병 환자가 예수께 와서 무릎은 꿇고 한 말은 정확히 이것입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선택'하신다면(If you choose), 나를 깨끗하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자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의 정확한 번역은 이것입니다. "그래 선택하고말고!(I do choose!) 깨끗하게 되어라."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간청한 것은 '선택'해 달라는 것이었고, 그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은 '선택'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그 '선택'이 세상에 알려지자 예수님은 사람들을 피해 동네 바깥 한적하고 외딴 곳으로 피신해 계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선택'은 사람들에게 돌을 맞을 짓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나병'은 흔한 병이었습니다. 하지만 성서가 말하는 '나병'이 꼭 '한센 병'(Hansen's disease)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 웬만한 피부병은 다 '나병'이라 불렀습니다. 영화 '벤허'에서 주인공의 어머니는 한센 병에 걸리지만, 당시 소위 '나병 환자'가 흔했던 이유는 굶주린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못 먹으면 피부부터 헐게 됩니다. 문제는 모세법의 무자비한 적용이었습니다. 이른바 '나병 환자'를 격리하라는 모세의 명령은 그 취지가 좋은 것이었습니다. 자칫 전염병의 확산으로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척박한 광야에서 전멸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예수님 시대에 이르면 당시 유대교는 '병자 = 죄인'이라는 등식을 적용했습니다. 어느 누가 병에 걸리면 그것이 부모의 죄든, 자신의 죄든, 죄가 있으니까 그 벌로 병자가 되었고, 따라서 그들은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모세의 가르침이 종교 이데올로기가 되어 사람들을 '죄인'으로 낙인찍어 사회적으로 매장시키기에 이른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나병이 있다, 없다 혹은 나병에 걸렸다, 치료됐다는 판정을 할 수 있는 권한은 오직 제사장에게만 있었습니다. 의원이 아니라 제사장에게 판정 권한이 있었습니다. 제사장 맘 대로였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의학적으로 병이 나아도, 만약 제사장의 눈 밖에 난 사람이면 그 사람은 결코 자기 가족과 사회로 복귀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얼마나 고통스런 일이었겠습니까! 요즘 같은 사회보장 시스템도 없는 시대에 사회로부터의 격리란 곧 들짐승의 밥이 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추방과 격리는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런 병자들에게 가족이 얼마나 그리웠겠습니까. 자신을 따뜻하게 환대해주고 동등하게 대해주는 공동체가 얼마나 그리웠겠습니까? 하지만 이 여부는 오로지 한 사람, 즉, 제사장의 판단에 달려 있었습니다.
여기 예수님의 '선택'이 있었습니다. 병자를 의학적으로 낫게 해줄 것인가 말 것인가의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고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의 결말은 우리로 하여금 나병 환자의 요청이 단지 병을 낫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병이 나았다고 판정해줄 수 있는지, 예수께서 그렇게 판정해주실 수 있는지, 만약 그런 선택을 하면 예수님께 큰 어려움이 닥치겠지만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해주실 수 있는지, 그래서 자신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를 물어본 것이었습니다. 육신의 병이 곧 사회적 소외와 죽음을 의미하던 상황이었으니까요. 예수님의 선택은 그가 깨끗하다고 판정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당시 사회적, 종교적 월권행위이자 제사장의 권위에 대한 모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현대식으로 비유하자면 일종의 법정모독일 수 있습니다. 판사가 유죄로 판결한 사람을 무죄라고 선언하고 그를 풀어준 것과 비슷한 행동이지요. 바로 그랬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이후 드러나게 동네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한적한 곳에 피신해 계셨던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선택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선택을 미루거나 애매한 말로 돌리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If you choose"라는 물음에 "I do choose"라고 흔쾌히 대답하신 분이었습니다. 주님은 매 순간 결단하는 분이었습니다. 해도 좋고 안 해도 그만인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이번에 잘못 결정해도 나중에 잘 하면 회복되는 그런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존재를 건 선택이었습니다. 자신에게는 불리해도 남을 위해 선택했습니다. 당시의 종교와 사회가 무어라 가르치더라도, 하나님의 눈으로 한 선택이었습니다. 강자의 입장에 선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약자의 편에 선 선택이었습니다. 법리적인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고통 받고 아파하고 멸시 당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하는 결정이었습니다. 이런 일로 결국 십자가에 이를 것을 알면서도 내린 선택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이러한 주님의 선택에 대한 로마의 징벌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앞으로도 수많은 선택 앞에 놓일 것입니다. 물건 하나 사는 것에서부터 다양한 일에 이르기까지, 앞으로도 많은 선택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너무 많은 선택 앞에서 오히려 아무 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방황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때마다 우리 주님을 생각하십시오. 주님이 내리신 선택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의 선택의 기준을 돌아보십시오. 무엇이 나를 위해 좋은가가 아니라, 무엇이 나보다 약한 사람, 고통 받는 사람, 어려운 사람, 소외된 사람, 사회적으로 배제당한 사람들에게 좋은 일인가가 주님의 선택의 기준이었습니다. 주님의 선택은 첫째로 '사랑의 선택'이었습니다. 사실 "사랑한다는 것은 선택하는 것입니다." 사랑 그 자체가 이미 선택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랑의 삶을 사셨습니다. 둘째로 이 '사랑의 선택'은 곧 '약자에 대한 선택'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 1장 27-29절의 말씀처럼, "27.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이 땅의 약하고 천하고 멸시 받고 없는 것들을 택하신 주님의 선택은 셋째로 '생명의 선택'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신명기 30장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사십년간의 광야생활 후 요단강을 건너기 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과 다시 언약을 세우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먼저 "내가 오늘 생명과 번영, 죽음과 파멸을 너희 앞에 내놓았다"(신 30:15)고 말씀하십니다.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신 30:19)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너희와 너희의 자손이 살려거든, 이제 생명을 택하여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제"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이제"는 종말론적 시간입니다. 그것은 카이로스의 시간, 즉, 회심과 선택과 은총의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앞에 생명의 길을 펼쳐 놓으시고 이제 그만 죽음과 파멸의 길에서 떠나, 생명과 번영과 축복의 길로 나아가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누가 말했나요. "당신이 어떻게 죽을 것인지, 언제 죽을 것인지는 선택할 수 없다. 그러나 어떻게 살 것인가는 선택할 수 있다." 예수님에서 내리신 선택처럼 사랑의 선택, 약자에 대한 선택, 그리고 생명에 대한 선택으로 크리스천의 복된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2017.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