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 24장 10-15절, 누가 16장 19-31절, 야고 1장 27절- 2장 9절
[믿음의 식구들과 함께 하는 가을나들이]
형형색색 아름다운 단풍들이 온 산을 물들이고 있습니다. 가을의 정취가 한껏 무르익어 우리들의 마음도 가을향기로 가득합니다. 어제 1여신도 백향목회는 소요산으로, 2여신도 엣셀나무회는 일산 호수공원과 파주 삼릉으로 가을 나들이를 다녀왔습니다. 우리 교회 전체 카톡방에 올라 온 사진만 봐도 눈이 호강하고, 마음이 흐뭇합니다. 백향목회와 엣셀나무회 회원들! 어제 모두 좋으셨나요?
제가 신학교에 다니던 시절, 기독교윤리학을 가르치셨던 김중기 교수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늘 우리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나중에 목회하게 되면, 교인들만 심방하지 말고, 자연심방도 많이 다니세요!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피조물을 맡기셨으니, 사람만 돌아보지 말고, 자연도 돌보아야 합니다." 교수님은 우리더러 자연을 돌보라고 하셨지만, 실상은 자연이 우리들을 돌보는 것 아닌가 합니다. 더군다나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하는 시간들은 우리들의 반복되는 일상의 삶과 지친 몸과 마음에 다시 생기를 줍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자매 어울려서 함께 사는 모습! 머리 위에 부은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을 타고 흘러서 그 옷깃까지 흘러내림 같고, 헤르몬의 이슬이 시온 산에 내림과 같구나!"
우리 생명사랑교회 구성원들 전체가 한 가족, 형제자매가 되어 함께 어울려 산다면 하늘에서 내린 복이 우리 모두에게 흘러넘칠 것입니다. 사람은 홀로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서로 소통하며 도울 때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19세기 말엽부터 21세기가 되는 100년이 넘는 세월동안 엄청난 변화를 겪어 왔고, 수없는 위기의 순간들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한국 교회는 지난 9월 3일 최진홍 집사님이 기도하셨듯이, "그 누구도 고립되지 않고, 누구도 홀로 고통을 겪지 않게" 애써 온 공동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너 없는 나는 있을 수 없고, 우리 없는 내가 있을 수 없음"을 깨닫게 해 준 곳이기도 합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교회의 역할과 성취 그리고 현재]
신라와 고려인들이 불교를 통해서 삶의 위안을 얻고, 조선인들이 유교를 통하여 올바른 길을 구현하고자 했다면, 지난 한 세기가 넘는 세월동안 한국인들은 그리스도교를 통해 새로운 희망을 찾고, 삶의 의미를 얻고자 했습니다. 교회는 무너진 마을공동체를 대신하는 또 다른 마을이 되어 주었고, 목사들의 설교는 고단한 일상을 견디게 하며, 하루를 지탱하게 해 주는 힘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자신의 종교로 받아들인 많은 한국인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신앙 속에서 꿋꿋하게 자신들의 삶을 지켜나갈 수 있었습니다. 매주 정기적인 예배를 통해 흐트러지기 쉬운 마음을 다잡으며, 묵상기도를 통하여 자신을 성찰하고, 통성기도와 열정적인 찬양을 통해 가슴 속 묵은 때와 스트레스들을 날려버릴 수 있었습니다. 병이 낫는다든지, 무너진 집안이 다시 일어난다든지, 빈 쌀독을 채워 주신다든지, 인생의 굽이굽이마다 예수 믿고 놀라운 기적을 한번 체험하지 않은 교인들은 거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를 떠올려 본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은총과 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 믿고 복 받으시오!" 지난 백년간 우리는 이렇게 전도를 했는데, 그리스도인의 체험 속에서 이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믿는 이의 진실한 자기고백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고 복을 받았고, 백정의 아들이 의사가 되었고, 머슴이 교회의 목사가 되었으며, 한국 그리스도교는 100년 만에 천만의 성도를 지닌 부자가 되었습니다. 국회의원의 3분의 1이 대개 그리스도인들이고, 장로가 세 명이나 대통령이 되었고, 한국 사회의 구석구석 그리스도인들이 없는 곳이 없고, 세계 대형 교회들 중 절반이 한국에 있고, 선교를 받던 곳에서 전 세계로 선교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장을 한 지금, 한국교회는 이 사회로부터 다양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성장하던 어느 시점부터 하나님의 은혜나 믿음의 능력이 아니라, 자본의 논리가 교회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정치와 결탁하고, 성추행, 배임, 사기 등 온갖 비리가 교회 안에서 발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녁 뉴스에 등장하는 온갖 추한 소문들에 연계되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없을 정도로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성장과 번영을 하면서 어느 샌가 도덕성과 그리스도교의 참된 가치들을 상실해 갔습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종교가 된 이후 초대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과 이상이 점차 사라져갔듯 지금 한국교회가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속은 비어버린 쭉정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 즉, 생존을 위한 욕구들을 해결해 주셨는데, 우리는 우리들의 욕망을 부추겼고, 필요한 것 이상을 추구하며 탐욕에 빠져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교를 외면했고, 어디 가서 목사나 장로임을 밝히거나, 교회 다닌다고 말을 하는 것이 왠지 부끄러운 일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오늘 저는 주어진 본문의 말씀을 통해 교회가 갱생하는 길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모든 위기는 기회이고, 모든 일에는 명암이 있습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은 더욱 밝게 빛나는 법입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이런 시대에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와 그리스도인의 역할과 책임]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말씀들은 모두 성경전체에 흐르는 매우 중요한 그리스도교의 핵심적 가치 두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매우 분명한 어조로 말합니다. "여러분이 사람을 차별해서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요, 여러분은 율법에 따라 범법자로 판정을 받게 됩니다"(2장 9절). 하나님은 자기 백성 가운데서 부유하고 명망 있는 사람이 특권을 누리고 반대로 가난하고 약한 사람이 푸대접 받는 것을 용인하지 않으십니다.
둘째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또 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 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고아와 과부들이란 가정의 돌봄을 받을 수 없는 대표적인 사람들로 당시 사회적 보살핌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아와 과부들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려면 바로 세상 한복판으로 뛰어 들어가야 합니다.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일들을 하면서도 자기를 지켜서 세상의 사고방식, 척도, 행동 양식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 세상에 물들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경건한 사람이라고 야고보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또 구약의 신명기 법전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같은 겨레 가운데서나 당신들 땅 성문 안에 사는 외국사람 가운데서, 가난하여 품팔이하는 사람을 억울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날 품삯은 그날로 주되, 해가 지기 전에 주어야 합니다. ~~ 그가 그 날 품삯을 못 받아, 당신들을 원망하면서 주님께 호소하면, 당신들에게 죄가 돌아갈 것입니다." 오늘 읽은 신명기 법전에는 담보물을 잡는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두 가지를 당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담보물을 잡는다는 이유로 이웃의 집에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채무관계를 형성하게 되면 언제나 빚진 사람은 약자가 되기 마련입니다. 돈을 꾸는 형편에 있는 사람은 급하기 때문에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관계 속에서 언제나 인권은 무시되기 쉽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서는 돈을 꾸고 빌려 주는 관계 때문에 한 인간의 사적인 생활에 침해를 받는다거나, 사람의 권리가 존중되지 않은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또 담보물로 잡은 것이 상대의 생명과 일상의 삶을 살 수 없도록 한다면 다시 되돌려 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이라고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누가복음을 읽으면서 충격을 받을 지도 모릅니다. 어떤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고,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깁니다. 나사로가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아브라함 품에 안겼고, 부자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지옥에 갔다는 말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물 한 방울로 혀를 축이게 해 달라며 고통을 호소하는 부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얘야, 되돌아보아라. 네가 살아 있을 동안에 너는 온갖 호사를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괴로움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 이 말만 들으면, 모든 부자는 이 세상에서 호사를 누리기 때문에 다음 세상에서는 지옥에 가고, 모든 거지는 이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기에 저 세상에서는 평안을 누릴 것이라는 말로 들립니다. 즉,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 아니라 "거지 천국, 부자 지옥"처럼 보입니다. 과연 예수님이 부자와 거지를 양편으로 갈라 사람들 사이에 분열을 일으키기 위해 이 비유를 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누가복음서가 이 비유를 통해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요?
이 비유가 전하고자 하는 속 깊은 뜻을 알려면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서 본문의 앞뒤를 연결해서 살펴야 합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 이전에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으며,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자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의 이 말씀을 듣고 비웃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마음을 아신다.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는 그러한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혐오스러운 것이다. 율법과 예언자는 요한의 때까지다. 그 뒤로부터는 하나님 나라가 기쁜 소식으로 전파되고 있으며, 모두 거기에 억지로 밀고 들어간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과정에서 오늘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비유는 특별히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파들,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을 잘 지켰던 이들이고,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들을 훨씬 더 의롭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입니다. 신명기 28장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모든 명령을 주의 깊게 지키면, 모든 민족위에 뛰어난 사람들이 되도록 할 뿐만 아니라 온갖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모세의 입을 통해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성읍에서도, 들에서도 복을 받고, 태가 복을 받아 자식을 많이 낳고, 땅이 복을 받아 열매를 풍성히 내고, 가축들이 복을 받아 소와 양들이 번식하고, 곡식 광주리도, 반죽 그릇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나님이 약속합니다. 풍성한 보물 창고인 하늘을 열어서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는 자들이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실 것이라 말합니다.
이런 율법의 말씀에 따라 바리새인들, 특히 돈을 좋아하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지닌 경제력과 권력을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기 때문에 이런 복을 받은 것이며,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의로운 사람들,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고, 자신들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며 가난하고 병들고 천한 사람들은 죄인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파와 세리의 기도 장면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바리새파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이런 사람들은 종교적 열심은 있으나 바로 그것 때문에 사람을 차별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여기는 불경죄를 범하면서도 그것을 몰랐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바로 이런 종류의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누가교회에는 이런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파처럼 생각하는 교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는 그냥 부자가 아니라 매우 큰 부자입니다. 예수님 당시 부자들은 대토지 소유자이거나 몇 안 되는 대상인들, 그리고 납세임차인, 즉, 세관장과 같은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백성의 놀라운 시선을 받고 부러움을 사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미움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늘 고독하게 사회 피라미드의 꼭대기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은 가장 부유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었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보냈다는 것은 이 부자가 엄청난 재산의 소유자였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처럼 어쩌면 이 부자는 자신이 율법을 잘 지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었다고 스스로 여겼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와 달랐습니다. 과학기술의 혁신적 발달이 없었던 고대에 어떤 사람이 이런 부를 차지하려면 소작농이나 영세 농민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각 지파마다 동등한 땅을 나눠주고 거기에서 각자 먹을 것을 해결하도록 했던 평등정신이 바로 하나님이 가나안에 세우신 신앙공동체의 정신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엄청난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율법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이 사람의 더 큰 문제는 자신의 대문 앞에 있었던 거지의 고통을 돌아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돕는다"라는 뜻입니다(엘리아잘의 약칭). 하나님은 사람의 손길을 통하여 가난한 이들을 돕는데 지금 이 부자는 하나님의 손길이 되기를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사로는 지금 접시를 닦고 나서 버리는 빵조각이라도 얻을까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조차 얻을 수 없었습니다. 온 몸은 헐어서, 사납게 거리를 쏘다니는 개가 와서 자기 몸을 핥아도 어찌 해볼 도리가 없는 극빈한 상태였습니다.
이런 사람이 지금 자기 집 대문 앞에 있는데, 부자는 이 사람을 한 번도 거두지 않습니다. 만약에 도울 수 없는 형편이라면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이 부자는 날마다 잔치를 베풀 만큼 엄청난 부자였습니다. 따라서 이런 상황은 부자의 몰인정함에 대해 암시합니다. 이런 몰인정함은 바로 율법이 금하는 것이고, 구약의 모든 율법의 핵심 중 하나는, 위에서 우리가 살펴 본 대로 약자를 돌보고 보호하라는 것입니다. 고아와 과부, 외국인, 나그네로 대표되는 이들, 즉, 경제적으로 빈곤하고, 사회 문화적으로 소외되어 있고, 정치권력의 계급구조 속에서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성경은 언제나 그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그들의 울부짖음이 하나님의 귀에 들리지 않도록 그들에게 신경을 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부자는 이런 율법의 핵심을 실천하지 않습니다.
오늘 비유에서 주로 등장하는 것은 바로 부자와 아브라함입니다. 이들의 대화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누가교회에 있는 부자들을 대상으로 설득하는 것입니다. 넉넉한 너희는 너희가 가진 것을 나누어서 가난한 교인과 함께 사용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모세와 예언자들이 전한 것이다. 그들의 말을 살아 있을 때 알아듣지 못하면 죽은 사람이 설령 살아온다 해도 그들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지금 이 부자처럼 지옥에서 고통당하게 될 것이다. 누가는 경고합니다. 이 비유 다음에 이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작은 사람 하나도 걸려 넘어지게 하지 말고, 누구라도 죄를 짓고 회개하면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즉 부자가 자신이 율법을 잘못 이해해서 자신만 복을 누리는 것이 잘못 되었음을 깨닫고 용서를 빌고 회개한다면 얼마든지 용서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난의 문제]
설교를 시작하면서 제가 여러분께 사람은 홀로 살 수 없는 존재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가난의 문제도 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누군가 극빈한 상황에 처했다면 그것은 단순히 그 사람만의 문제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 굶고 있다면 그것은 이 사회 전체가 함께 고민해야할 문제입니다. 가난은 단순히 경제적인 불편함에 머물지 않습니다. 가난은 인간의 품위와 교육 받을 기회와 공동체 속에서 함께 머물 수 있는 가능성들을 자꾸 박탈해갑니다.
제가 언제한 번 말씀 드렸지만, 우리나라의 대기업 총수들이 가지고 있는 사유재산은 몇 조가 넘습니다. 예를 들어 이건희, 이재용 부자(父子)는 삼성전자의 고공행진으로 올해 주식자산만 5조원을 늘렸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부터 지금까지 2000년 동안 매일 백만 원씩을 저금한다고 합시다. 그렇게 해도 7천 300억 원입니다. 1조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한 사람이 1년 만에 자기의 노동으로 5조를 벌 수 있을까요? 어느 한 사람이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정당한 노동이 아닙니다. 한국 기업이 성장한 배경에는 저임금과 장시간의 노동량이 투입되었다는 것은 전 세계가 알고 있습니다. 즉, 수많은 이들의 노동이 한 사람에게 모인 것입니다. 그리고 다들 알다시피 한국의 재벌은 건실하게 자란 기업이 아니라 한국만의 특수한 상황에서 정경유착, 부동산 투기, 탈세와 조세포탈 등을 통해 만들어진 온갖 불법의 산물입니다. 이들이 구원받는 유일한 길은 바로 이런 불법을 회개하고 정당하게 일한 사람들에게 돌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진국의 많은 기업인들은 버는 것의 상당 부분을 사회에 환원합니다.
오늘 야고보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압제하고, 법정으로 끌고 가고 심지어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들이 바로 부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부자가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진 것이 많아질수록,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더 많이 가지기 위해 탐욕이라는 욕망의 유혹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교만하고, 남을 무시하며, 이웃의 고통을 아랑곳하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우리는 뉴스를 통하여 이러한 사례들을 수없이 듣게 됩니다.
오늘 야고보서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택하여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에 부요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안전과 기쁨과 삶의 의미를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입니다. 온전히 여호와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한국 그리스도교가 타락하게 된 것은 교회조차도 자신의 운명과 활동과 모든 기획과 계획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돈에 맡겼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타락하게 된 것은 삶의 기준과 의미를 하나님의 참된 계명을 지키는 도덕적, 윤리적 삶에 두지 않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두지 않고, 율법을 지켰을 때 얻는 떡고물, 즉, 복에만 관심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목적과 수단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어서 복을 받았던 경험이 복을 받으려고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으로 잘못 자리잡은 것입니다.
이제 제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참으로 믿음에 풍요한 사람이 되십시오. 믿음에 풍요한 사람은 돈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돈 때문에 벌벌 떨지 않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고, 또 좋은 곳에 돈을 잘 쓰는 주인이 됩니다. 믿음에 풍요한 사람은 언제나 넉넉하기에 이웃에게 베푸는 사람이 됩니다. 복을 나누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나누고 베푸는 사람이기 때문에 늘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께서 말씀 하신 대로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기 때문에 움켜쥐려는 욕심의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부자는 더 부자가 되려고 또 탐욕의 노예가 됩니다. 그렇게 자기만 살려고 아등바등하는 사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부자 되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으십시오. 여러분이 주님의 계명을 성실히 이행하면 하나님은 여러분이 들어가든지 나가든지, 앉아 있든지 서 있든지 복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게 주님으로부터 받은 복을 가지고 여러분 대문 앞에 앉아 있는 나사로를 도우십시오. 그래서 그의 이름이 빛나게 하십시오. 나사로의 이름은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하나님이 돕는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의 손길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드러나고, 그 도움의 손길을 받는 사람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십시오.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생명을 살리고 사랑이 넘치는 생명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인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세상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 당신은 온 세계 만물을 지어내시고, 그들을 한 결 같이 돌보십니다. 성숙의 계절, 산과 들은 울긋불긋 수놓은 듯 당신의 솜씨를 한결 뽐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다채로운 색으로 아름답게 펼쳐지게 하시고, 그 열매들은 탐스럽게 익어가게 하소서. 우리가 믿음에 부요한 자가 되어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게 하소서. 세계의 온 생명과 공명하는 마음을 주시어, 잎새에 부는 한 점 바람에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는 삶이 되게 하소서. 모든 곡식들이 무더운 여름 찌는 더위 타는 태양 아래 알찬 낟알들을 키워 가듯이 이 험난하고 시련 가득한 세상 아래에서 우리들의 믿음을 더욱 굳세게 하소서.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17.11.5.)
* 여기에 들어가시면 설교 음성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cafe.daum.net/SoulLoveCommunity/UkVO/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