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혜암신학연구소 제5회 공개강연회가 11월 13일(월) 개최된 가운데 제1부 예배 시간에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설교를 했다. 고린도후서 4장 6-7절을 본문으로 삼았으며 제목은 "우리는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다. 설교자의 허락을 얻어 설교 본문을 전재한다.
1. 신학교 교수들이나 목회를 하시는 목사님들 앞에서 설교를 한다는 것은 언제나 짐스럽습니다. 젊은 때나 나이든 지금이나 매 한가지입니다. 이 자리가 그렇습니다. 오늘은 설교라기보다는, 신학자이기 전에 한 목사로서 지난날을 돌아보며 서로 격려 받고 목사로서의 우리 정체성을 성찰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2. 오늘 본문 말씀은 두 구절입니다. 고후 4장 6절은 달, 해, 별, 핵폭발 등 자연물리적 빛과 다른 하나님으로부터 발산되는 신령한 빛을 말하고 있습니다. 태초의 흑암가운데서 "빛이 있으라!"하심으로 빛이 있게 된 창조 첫째 날 빛은 신령한 빛이요, 영적 빛이며, 영광의 빛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않은가 항상 살펴 점검하라"고 말씀하셨을 때의 빛이기도 합니다.
3. 육신으로 오신 갈릴리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계시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은폐이어서, 혈육적 눈으로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혈육적 눈으로서 볼 수 있는 영광의 빛이라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육신을 입고오신 그리스도 예수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알아보려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신령한 빛을 비추어주실 때라야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성령의 내적 조명입니다.
4. 적어도 평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살기로 작정하고 소명받아 이 일에 복무하는 성직자들은, 그들의 마음에 이 신령한 빛을 조명 받은 경험이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 부족한 이 사람도 그랬습니다. 6.25전쟁의 상처가 아직도 완전히 가시지 않았던 1950년대 후반, 유교적 가정에서 자란 한 소년의 심령에 이 신령한 빛이 비추었습니다. 마음이 밝고, 기쁘고, 참으로 경쾌했습니다. 그리하여, 가정이나 학교에서는 쌩뚱맞은 신학공부냐며 반대하고 말리던 신학교엘 입학하여, 전도사가 되고, 목사가 되고, 신학교수가 되어서 60년 가까이 달려왔습니다.
5. 목회자 되기엔 영적 훈련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신 하나님께서는 제게 목회현장보다는 신학교육현장에서 일하도록 섭리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 같은 사람이 목사가 되었다는 빚진 마음 때문에, 기회를 얻을 때마다 개척교회의 시작 단계 1-2년 동안 교회섬김의 일을 자청하여 봉사한다고 대여섯 개척교회를 섬기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제자 신도들도 많이 나오게 되었고, 어느 듯 은퇴 후 명예교수, 원로목사라는 호칭도 받게 되었습니다.
6. 그런데, 솔직하게 고백하지만, 나 자신이 늘 염려하는 일은 약 60년 전 내가 신학교 문을 입학원서를 들고 들어설 때 내 맘을 비추이던 그 신령한 '내면의 밝은 빛'이 점점 희미해져갔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것입니다.
그 내면의 신령한 빛 대신에 이성의 빛, 학문의 빛, 신학적 빛, 교리적 빛이 심령의 방안을 비추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물론 그런 빛들도 귀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빛들은 처음 마음엘 비추이던 신령한 빛이 준 환희, 기쁨, 감사, 경쾌함, 염려·근심 없는 자유로움을 선물로 가져다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기도합니다. "주님, 저에게 청년 때 허락하셨던 그 은혜의 빛을 다시 허락하소서. 단순성과 비움의 영성으로 돌아가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7. 오늘 본문 고후 4장 7절은 보배를 담은 질그릇을 비유로 하여 바울 사도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빛, 예수 그리스도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 줄여서 복음 그 자체를 '보배'로 은유합니다. 그리고 그 복음 예수를 전하고 선포하고 짊어지고 평생 다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그중에서도 특히 성직자들의 생명을 '질그릇'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비유하고 바울 사도는 말씀하기를 하나님께서 보배를 질그릇 속에 담아 전하게 하신 이유가 혹시나 착각하지 말도록 하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질그릇인 인간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8. 질그릇이라면 한국인들의 예술미가 극치에 도달한 예술장르입니다. 질그릇은 진흙의 겉에다가 유약을 바르거나 상감청자를 덧입혀 구워낸 고려청자나 조선조 백자를 말하지 않습니다. 질그릇은 귀족이나 고상한 선비들의 문구류를 담는 그릇이 아닙니다. 소박한 그대로 흙을 가마에 구워내어 만든 그릇입니다. 장독대에 있는 그릇들이요, 오줌통으로도 사용하는 흙그릇입니다.
그런데, 인류문명은 질그릇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유약을 바르고, 온갖 문양과 색상을 겉에다 새겨넣습니다. 특히 보배, 보석류, 귀중품을 담는 그릇은 더욱더 그러합니다. 나중에는 그릇이 깨지기 쉬우니까 나무로 보석함을 만들고 마찬가지로 온갖 문양과 색상과 금속류를 박아넣어서 단장합니다. 유럽박물관엘 가보면 프랑스 귀족들, 특히 귀족부인들이 사용하던 보석상자가 문화재로 진열되어 있음을 봅니다.
9. 저는 2005년 봄 학기를 마지막으로 12년 전 65세 정년퇴직을 하였습니다. 수유리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예배실에서 봄 학기가 끝나는 마지막 채플시간에, 학교당국은 은퇴하는 이 사람에게 마지막 고별설교를 하도록 배려하였습니다. 강단 위에 서니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은사 혜암 이장식 선생이 여기 예배에 함께하고 계십니다만, 1959년 2월 입학식 날, 김경재 학생은 맨 뒷줄에 앉아 스스로 감격에 겨워 흘러넘치는 눈물을 닦고 감추느라고 교수들의 설교와 권면 말씀을 들을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감격의 이유는, 아모스보다도 더 예언자 반열에 서기엔 자격도 없고 집안 내력도 없는 젊은이 하나가, 선지학교라는 신학교 입학식 예배석에 앉아있다는 이 놀라운 은혜의 기적 앞에서 감격과 감사의 눈물이 저절로 막 쏟아졌던 것입니다.
10. 그러데, 교수생활과 목사안수 받은 후 30년을 뒤돌아보니, 부끄럽고 죄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내 일생이 질그릇 속에 담아주신 '보배, 복음, 예수' 만을 전하고 자랑하고 관심하고 살았어야 했건만, 보배담은 질그릇과 보석함의 겉치장에 더 많은 관심과 시간과 열정을 쏟았다는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내가 쓴 논문이나 책을 누가 어느 정도 읽었을가? 세상의 매스컴이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긍정적 평가를 하는가? 교단 안에서나 신학계에서 받을 예우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살았던 죄인이었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인간의 명예심, 권력욕, 물욕, 남에게 칭찬받고 인정받으려는 욕망이 이렇게도 질기고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닌다는 현실에 한없이 절망하고 주님께 죄송했습니다. 중생을 체험했더라도 성화의 과정이 지속되지 않으면 인간은 다시 속화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고백합니다.
11. 북간도 명동촌과 만주땅 용정에서 수많은 인재를 길러내고 독립운동의 지도자였던 김약연 목사의 임종에 즈음하여, 가족들과 둘러선 제자들이 마지막 유언이라도 한 말씀 남겨주십시오 했더랍니다, 그 때 김약연 목사가 하신 말은 "유언은 무슨 유언이냐? 내 삶이 곧 내 유언이다"였습니다.
12. 요한복음 1장 14절에 이르기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종교개혁500 주년이 되는 올해, 한국교회는 여러 행사를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 근본 원인은 한국교회의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그들이 전하는 예수의 복음을 '삶과 몸으로 육화' 시켜 전하지 아니 한 결과 그 말과 삶의 불일치, 언행의 불일치가 폭로된 데서 밖에 달리 찾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성경 말씀을 항상 묵상하면서 후회 없는 목회자로서 남은 삶을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