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서 24장 14-18절, 누가복음서 24장 25-35절
[지진과 흔들리는 삶]
지지난 주 대한민국은 땅이 흔들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열흘 가량이 지난 지금도 계속해서 작은 여진들이 일어나고, 포항을 중심으로 입은 피해는 약 2만5천여 건에 달하고 있습니다. 작년 9월 12일에는 경주에서 지진이 발생했는데, 저도 그 때 지진을 처음 느꼈습니다.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에는 약 1,900건의 지진 관련 기록이 나옵니다. 그 중 350건 이상이 경상도에서 발생했고, 이 같은 현상을 세종실록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지진이 없는 해가 없고, 경상도에 더욱 많다. 지나간 기유년에 지진이 경상도로부터 시작하여 충청·강원·경기의 세 도(道)에 파급(波及)하였다.... 우리나라에는 비록 지진으로 집이 무너지는 일이 없으나, 지진이 하삼도(下三道)에 매우 많으니 오랑캐의 변란이 있지나 않을까 의심된다." - 세종 14년(1432년) 5월 5일
조선왕조실록에는 서울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지진 30여 건도 기록되어 있고, 이 가운데는 재산 피해로 이어진 비교적 강한 지진에 대한 내용도 있습니다.
"서울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갔으며 한참 뒤에 그쳤다. 처음에는 소리가 약한 천둥 같았고 지진이 일어났을 때는 집채가 모두 흔들리고 담과 벽이 흔들려 무너졌다." - 명종 1년(1546년) 5월 23일
이것뿐이 아닙니다. 1681년 숙종 7년에는 지진해일을 묘사한 듯한 대목도 나와 있습니다.
"강원도(江原道)에서 지진(地震)이 일어났는데, 소리가 우레가 같았고 담벽이 무너졌으며, 기와가 날아가 떨어졌다. 양양(襄陽)에서는 바닷물이 요동쳤는데, 마치 소리가 물이 끓는 것 같았고, 설악산(雪岳山)의 신흥사(神興寺) 및 계조굴(繼祖窟)의 거암(巨巖)이 모두 붕괴[崩頹]되었다. 삼척부(三陟府) 서쪽 두타산(頭陀山) 층암(層巖)은 옛부터 돌이 움직인다고 하였는데, 모두 붕괴되었다. 그리고 부(府)의 동쪽 능파대(凌波臺) 수중(水中)의 10여 장(丈) 되는 돌이 가운데가 부러지고 바닷물이 조수(潮水)가 밀려가는 모양과 같았는데, 평일에 물이 찼던 곳이 1백여 보(步) 혹은 5, 60보 노출(露出)되었다. ~ 중략 ~ 이후 강릉(江陵)·양양(襄陽)·삼척(三陟)·울진(蔚珍)·평해(平海)·정선(旌善) 등의 고을에서 거의 10여 차례나 지동(地動)하였는데, 이때 8도(八道)에서 모두 지진이 일어났다." - 숙종 7년(1681년) 5월 11일
이러한 역사적 기록을 보면 우리나라는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고 언제든 전국에서 지진이 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진으로 인해 지금 포항의 많은 시민들은 심각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1978년 이후 최강의 지진이었던 작년 경주 지진에 이어 두 번째였기에 핸드폰 진동만 울려도 가슴이 철렁하고, 극도의 불안 증세를 느끼고, 피로하고 기억력에도 장애가 생기는 일들이 발생합니다. 한 초등학생은 입맛을 잃어 평소에 좋아하던 고기도 먹지 못하고, 어떤 분은 고층 엘리베이터는 전혀 타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진은 여타의 다른 천재지변과 달리 우리의 가장 안전한 터전이라고 믿었던 땅이 흔들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한 두려움과 불안은 훨씬 더 큰 것 같습니다.
이번 지진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가에 대해서 뼈저리게 느꼈지만, 사실 한국인들은 지난 한 세기를 살면서 다양한 사회적 재난을 당하였고, 그것으로 인해 우리의 정신은 심각한 내상을 입었습니다. 사실 우리 국민의 삶터는 늘 요동쳤습니다. 우리 국민이 앓고 있는 정신적 동요와 감정의 스트레스는 이런 저런 표지로 드러나는데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자살률입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올해 발간한 "2017년 세계보건통계"를 보면 대한민국은 2002년부터 2015년까지 무려 13년 동안이나 세계 183개국 중 자살률 1위를 차지하였고, 올해도 OECD 국가 중에서는 여전히 부동의 1위입니다. 2위인 일본은 7년 연속 점차 자살이 줄고 있고, 우리도 2011년 이후 조금씩 줄지만 10대의 자살률은 오히려 늘고 있습니다.
어제 우리노회 교육부가 실시한 교사 아카데미가 성암교회에서 있었습니다. 두 번째 강의는 천호중학교 교사이신 송형호 선생님의 "아이들의 낯선 행동의 이해와 대응법"이었는데, 이것은 한 마디로 하면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수업 시간에 끼어들기, 떠들기, 따지기, 방해하기, 공격하기, 잠자기, 땡땡이치기 등의 행동으로 문제를 일으키는데, 이런 문제 행동의 이면에는 관심을 받고 싶고, 센 척하고 싶고, 공격하고 싶고, 도망가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모든 문제행동의 가장 밑바닥에는 우울감이 깔려 있다는 것이 송형호 선생님의 진단이었고, 교사는 이런 아이들을 잘 받아주고 가르쳐서 자존감을 높이고 소속감을 갖게 해 주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수업을 방해하면서 선생님을 공격하는 아이는 최근에 보다 두드러진 현상인데, 이보다 잠자거나 학교에 아예 나오지 않고 모든 수업과 학교생활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아이가 가장 심각하고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런 아이들일수록 자살 충동을 많이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청소년들의 가장 큰 자살 충동의 이유는 역시 성적과 진학(39.2%)이었고, 두 번째가 가정불화(16.9%)였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그런 불안을 다독여줄 안식처, 즉, 가정이 온전히 존재하지 않을 때, 아이들은 죽고 싶은 심정이 되는 것입니다. 특히 한국처럼 사회적 안전망이 부족하고, 갈수록 심해지는 빈부격차와 삶의 질에 대한 판단기준이 인격이나 선한 삶이 아니라 돈의 많고 적음이 될 때, 우리 국민들의 우울감은 해결하기 어려워질 것입니다.
[종교 의례의 기능적 중요성]
오늘 설교의 제목은 "참된 예배"입니다. 그런데 한참을 예배와는 상관없는 듯 보이는 지진과 우리들의 불안정하고 흔들리는 삶을 얘기해서 여러분은 다소 의아해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반복되는 모든 종교의 의례는 외부의 빠른 변화와 그로 인해 상승하는 불안과 스트레스를 치유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매주 주일 여러분은 우리 교회의 예배를 통하여 일주일동안 받은 상처와 온갖 삶의 거친 잡동사니들을 정리하고 깨끗하게 씻어내고 비우게 됩니다. 기도와 찬송, 성서봉독과 설교, 평화의 인사, 친교와 함께 나누는 식사 등 매주 반복되는 예식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삶의 질서를 회복하고, 안정감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반복하는 행위를 통해 삶의 일정한 패턴을 형성하고, 그 규칙과 습관을 통해서 빠르게 변화하는 외부 환경을 수용하거나 거부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모든 인간은 그래서 나름대로의 자기만의 습관을 지니게 됩니다. 아침에 커피 한잔을 반드시 마신다든지, 식사 후에는 꼭 산책을 한다든지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의 안정을 위하여 매우 중요한 의식이 되는 것입니다.
스마트폰이 생긴 이후 현대인들은 스마트폰을 보는 것이 하나의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스마트폰으로 무엇인가를 하고 있으면 안정감을 느끼고, 스마트폰이 없으면 불안함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잠시도 휴대폰을 놓지 못하는 현상이 생기지요. 그래서 휴대전화를 보면서 걷는 사람이 평균 4분의 1이 되는데, 이것 때문에 많은 사고가 나고, 유럽은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법제화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례는 바로 안정성을 향한 인간의 습관이 얼마나 무섭고 집요한가를 알려 주는 것이고, 동시에 안정감을 향했지만 방법이 잘못되었을 경우 도리어 생명에 위협을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문제는 예배와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참된 예배가 아니라 잘못된 안정감을 향한 무의미하고 무의식적인 습관으로 굳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제대로 만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훨씬 더 활기차고, 생명의 능력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를 통해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사실 그 누구도 예배가 무엇인지, 예배의 각각의 구성 요소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자세히 알려 주지 않았고, 또 배우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설사 배웠다 하더라도 매 순간 그런 의미를 생각하고 느끼며 예배를 드리는 것이 쉽지 않기도 합니다. 제가 우리 생명사랑교회에 부임하고 곧바로 오후 집회에서 약 7회에 걸쳐서 예배에 대한 특강을 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사실 한국교회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2000년 전통의 그리스도교 예배가 지니는 의미와 역사, 그리스도교 예배만의 특징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합니다. 어떤 계기를 통하여 교회에 왔고, 와서 적응하다보니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그 예배가 어때야 하는지 어떤 예배가 바른 것인지 묻지 않고, 그냥 익숙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하나님은 온 데 간 데 없고, 신나는 찬양을 통해 스트레스도 좀 풀고, 개그맨처럼 웃음과 재미를 주는 설교를 통해 나름 자신에게 유익했다고 느끼면서 거기에 매우 만족하고 마는 예배도 허다합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겠다는 어떠한 다짐도 없이, 그저 자신의 욕구불만이 해결되면 되는, 형식은 다르지만 내용면에서 마치 무당의 굿을 통해 얻으려고 했던 것이 한국교회의 예배에 침투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실 많은 교인들은 교회에 와서 만족을 느꼈고, 자신의 문제도 해결되고, 교회도 성장했지만, 교인들 개개인의 도덕성은 나아지지 않았고, 이 사회에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시민사회로부터 외면당하는 결과를 맞이하고야 말았습니다.
지난 주 설교를 통해 심민정 전도사께서 말씀하셨지만, 앞으로 저의 목회는 우리 생명사랑교인 한명 한명이 올바른 신앙인이 되어 목회의 모든 활동에 주체적으로 활약하는 "평신도 중심의 사역"을 하는 데에 집중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참된 예배의 회복"입니다.
[생명사랑교회의 예배 갱신을 위하여]
제가 부임하고 지난 2년 동안 우리교회에 많은 방문자들이 다녀갔습니다. 이분들이 우리와 함께 예배하고 모두가 반드시 말하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가 생동감이 넘쳐서 살아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가족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매우 큰 칭찬이고 희망을 주는 말입니다. 한국교회가 점차 노령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젊은 활력을 느낄 수 있는 것! 대형교회에서는 맛보기 힘든 가족 같은 분위기를 우리가 유지한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입니다. 예배의 목회기도를 제직자들이 돌아가면서 골고루 하는 점, 교회규모에 비해 성가대의 수준이 높다는 것, 예배 시간에 헌금통을 돌리지 않는 것, 주일 낮예배에서 젊은 교육부 교역자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것도 장점입니다.
그러나 몇 가지 점에서 수정보완될 것들도 있습니다. 우리들이 부르는 찬송은 매우 오래된 것들입니다. 현대의 다양한 복음성가나 세계의 찬송가, 우리가락으로 만들어진 찬송들은 거의 불리지 않고 있습니다. 예배에 평신도들이 더 많이 참여해야 합니다. 성서 읽기와 감사기도를 평신도들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공동축도도 가능하고, 설교에도 평신도가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배 순서도 수정이 필요합니다. 한국교회는 오래도록 묵도하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설교하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축도하는 형식을 예배의 기본틀로 알고 실행했습니다. 이것은 19세기 초반의 미국의 부흥운동을 이끌었던 찰스 피니(Charles G. Finny)의 예배론에 따른 것입니다. 찰스 피니를 이어 받은 새로운 학파의 목사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회심시키는 것에 예배의 목적을 두었고, 잃어버린 자들을 찾기 위해 강한 열정과 신나는 분위기를 만들고, 이야기식 설교를 통해 사람들을 설득하여 강단 앞으로 나오게 하거나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여 함께 기도하는 등의 형식을 잘 사용했습니다. 부흥집회 방식의 예배는 2000년 기독교 전통이나 개혁교회 전통, 또한 장로교나 청교도 신학과도 다른 것이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교인의 양육을 소홀히 하는 예배 형식이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런 새로운 학파의 선교사들을 통해 기독교를 접했기 때문에 이런 예배가 예배의 전부인 줄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참된 예배]
이제 한국 개신교도 시대에 알맞고, 그리스도교 명맥을 잇고, 초대교회의 전통을 되살리는 바른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 교회도 그런 면에서 예배에 대해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매년 1-2회에 걸쳐 예배 신학에 대해서 강의를 할 계획입니다만, 오늘은 핵심적인 것 한두 가지만 강조하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성서의 말씀은 여호수아가 하나님께서 약속해주신 땅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른 신앙고백을 하라고 주문하는 장면입니다. 이제 애굽을 탈출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자 하는 공동체는 확실하게 선택을 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의 신, 또는 자기의 가족신이나 아모리 사람의 신을 섬길 것인가?
이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다른 이방신의 차이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고대 근동에서 이방 민족들은 매우 많은 신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고대인들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 신령스러운 신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고, 그 신들을 모두 잘 달래야 자신이 복을 받고 화를 면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편 신들도 도덕성과는 상관없이 자기의 말을 잘 들으면 복을 주고, 그렇지 않으면 화를 내고 벌을 주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말하듯, 야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거대한 폭력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이며,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자유"와 "평등"이라고 하는 인류의 이상을 보여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다른 이방신들이 보편적 윤리의 문제를 도외시하고 그저 개인의 복과 안녕만을 위해 존재했다면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불의와 부패 때문에 신음하는 이들을 위해 구원을 베푸신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예배한다는 것은 개인의 사적인 행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고 정의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것과 연관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이고, 그 나라는 저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살펴보자면 그리스도인들보다도 비그리스도인이, 교인보다도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더 잘 행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에 우리는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서의 말씀에는 예배의 핵심 두 가지가 완벽하게 녹아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실망하여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사람에게 예수께서 나타나셨고, 예수님은 이들에게 구약 성경에서 예언하고 있는 모든 일들에 대해 말씀해주십니다. 바로 예수라고 하는 인격에서, 그분의 삶과 가르침에서 모세의 율법서와 모든 예언자들의 글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뜻이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알고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만,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두 길손은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주실 때 눈이 열려서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바로 우리가 행하는 성찬 예식을 통해 이들은 예수님을 바로 알게 됩니다. 따라서 예배에서 주님이 제정하신 성찬식이 빠질 수는 없습니다. 성찬식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원래 매주 성찬식을 해야 하지만, 우리는 한 달에 한번 정도 하려고 합니다. 성찬식 없는 예배에서는 봉헌이 그것을 대신합니다. 아들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아들을 보내시고 아들과 함께 그 모든 고통에 참여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그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우리를 드립니다. 이것이 봉헌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봉헌할 때 우리는 자신을 봉헌하신 예수를 먼저 기억합니다. 여러분이 성찬 빵과 잔을 받으면서 마음이 떨리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이 가슴과 여러분의 양심에 새겨지지 않는다면, 자신을 내어 놓을 수가 없다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예배는 헛된 것입니다.
둘째, 두 길손은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또한 말씀을 읽으면서 마음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목사의 설교가 부족할 수 있겠지만 여러분 스스로 말씀 때문에 생기가 솟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기에 삶의 의욕이 넘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다면 설사 그 예배를 통해 마음의 안정을 얻고 삶의 스트레스를 풀고 걱정 근심을 해결했다 하더라도 반쪽짜리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예배하는 여러분은 주일예배의 마침과 동시에 저 세상이라는 삶의 현장으로 파송되는 것이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펼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베풀어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만이 만족하는 것에서 멈추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억압과 폭력에서 구원하여 주시고,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 또한 억압과 상처, 아픔과 고통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동참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참된 예배가 우리 삶에서 이어지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새롭게 탄생하는 신앙공동체에게 명령하듯이 오늘 저 또한 새롭게 거듭나리라 다짐하는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주님을 경외하면서, 그를 성실하고 진실하게 섬기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여러분의 조상이 이전에 섬기던 모든 탐욕의 신, 권력의 신, 허황된 거짓 신들을 버리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확고하게 하십시오. 우왕좌왕 하지 말고 참된 진리에 뿌리를 내리십시오. 생명의 근원에 당신의 인생을 세워 나가십시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우리의 예배를 받아주소서. 당신의 말씀 앞에 우리가 서게 하시고, 주님께서 베푸신 식탁을 통해 영의 양식을 얻게 하소서. 매 주일 거룩한 주님의 몸과 피를 받으며 나는 사라지고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가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겨나게 하소서. 구원의 하나님, 당신은 우리를 줄곧 지켜주셨습니다. 그 구원의 능력이 우리 생명사랑교회 믿음의 식구들을 통하여 이 사회에 드러나게 하소서. 땅이 흔들려 우리의 마음마저 요동치는 이 때 무엇보다 굳센 반석이 되어 주소서.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여기에 들어가시면 설교 음성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cafe.daum.net/SoulLoveCommunity/UkVO/3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