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하나님의 준비

장윤재 목사(이화대학교회)

- 창세기 22:6-8, 고린도전서 2:6-10, 누가복음 3: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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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Jesu Juva. 한적하고 평화로운 한 작은 마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마을에 나이트클럽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큰 시름에 빠졌습니다. '이제 이 평화로운 마을이 시끄럽게 되겠구나, 젊은 사람들이 이 술집을 드나들면서 우리 아이들도 타락하게 되겠지...' 온 동네가 복잡해지자 급기야 교회에서는 철야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도 중에 한 교인이 조금 과격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저 나이트클럽을 불태워 주십시오.' 매우 구체적인 기도였습니다. 얼마 후, 이 나이트클럽이 정말로 벼락을 맞아 불타고 말았습니다. 나이트클럽 주인은 그 교회를 법정에 고소했습니다. 교회는 책임을 질 수 없다고 맞섰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기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기도 때문에 나이트클럽이 불탔다는 주장은 말도 안 된다.' 그런데 양쪽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판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양쪽의 말이 엇갈려 판단을 내리기 어렵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습니다. 나이트클럽 주인은 기도의 능력을 믿고 있는데, 교인들은 그것을 아예 부정하고 있군요. 내가 보기에는 나이트클럽 주인의 믿음이 교인들의 믿음보다 더 훌륭합니다.'

오늘은 '믿음'에 대해 생각해보려 합니다. 믿음의 진정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려 합니다. 그러기 위해 '믿음의 조상'으로 일컬어지는 아브라함이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아들을 죽여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려했던, 그 유명한 창세기 22장의 이야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에 가서 그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습니다. 아들을 잡아 바치라니요. 더구나 이삭은 어떻게 얻은 아들입니까? 기력이 쇠약한 자신의 몸에서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약속했을 때 사라는 속으로 웃었습니다. 하지만 약속대로 아들이 태어나자 아브라함은 그 아이의 이름을 '이삭'이라 지었습니다. 그 뜻은 '웃는다'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결코 헛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 진정 웃게 만들어준 아이가 바로 이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도로 내놓으라니요. 이 웃음을 빼앗아 가겠다는 소리 아닙니까? 혹시 하나님께서 한번 시험해 보는 것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시험을 당하는 쪽에서는 말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하나님다워 보이질 않습니다.

하지만 더욱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입니다. 대꾸는커녕 반대도 안 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모리아 산을 향해 떠납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설사 길에서 주워온 자식이라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마땅히 항의하고 절규했어야 합니다. 조카 롯을 살리기 위해서 그토록 하나님에게 매달렸던 아브라함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자기 자식의 운명 앞에서는 이다지도 냉혹하단 말입니까. 그 무엇보다도 아이의 엄마와 상의했어야 합니다. 사라를 내세워서라도 하나님에게 저항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아브라함이 사라와 상의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이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사라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길을 떠났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올리고 두 사환과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준비하고는 출발했습니다. 떠난 지 3일 만에 하나님이 일러주신 모리아 산에 도착했습니다. 집에서 모리아 산까지 3일이 걸렸다면 결코 짧지 않은 먼 길이었습니다. 그 긴 3일 동안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이러저러한 이야기도 오갔을 법한데, 성서에는 둘 사이의 아무런 대화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모리아 산에 도착하자마자 아브라함은 두 사환과 나귀를 산 아래 놓아두고 긴 여행에 지쳐 있을 어린 아들만 데리고 곧바로 산 정상으로 향합니다. 두 사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지만 산에 오르는 장면도 충격적입니다. 아브라함은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산에 올라갑니다. 희생양이 될 당사자에게 자기 몸을 불태울 장작을 직접 등에 지고 가게 하다니요. 이 비정하기 짝이 없는 아버지의 손에는 불과 칼이 들려 있습니다.

드디어 이삭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 말했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에 쓸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처음으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침묵이 깨지는 순간입니다. 이 질문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여야 하는 이 아버지의 폐부를 날카롭게 찌릅니다. 그리고 이 질문으로 이삭은 자기 대신에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법정에 피고로 세웁니다. 지금까지는, 비유하자면, 이삭은 아브라함의 법정에 피고로 서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라는 질문으로 이제 자기 대신에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법정에 피고로 세웠습니다. 거기에 아브라함의 신앙도 함께 심판대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에게도 아직도 여지가 남아 있었습니다. 스스로의 결단에 의해 이삭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시간적 여지는 아직도 남아 있었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턱대고 따르는 것보다 차라리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 보다 더 인간적이며, 결국 하나님도 수긍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여기서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그동안 침묵하던 아브라함은 자신의 재판정에서 이렇게 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친히 준비하셨다.' 이 판결문의 요지는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준비를 믿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을 죽여야 하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준비를 믿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이삭의 질문으로 이제 피고석에 앉게 된 하나님을 향해 아브라함이 내린 최종선고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하지만 시험은 하나님 자신에게 엄청난 위험부담이 따르는 모험이었습니다. 상상해보십시오. 만일 아브라함이 부당한 명령을 내린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 버린다면, 그것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에 대한 반역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은 이렇게까지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고 아브라함을 시험에 몰아넣었을까요? 아브라함은 처음에 이삭의 탄생 예언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을 비웃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이삭의 탄생은 하나님의 은총을 실제로 경험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 은총에 대한 감사는 앞으로 어떤 시련이 닥쳐와도 흔들리지 않을 '하나님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로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는 것인지는 아직 알 길이 없었습니다. 사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보아도 그런 것 같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관계라는 것이 좋을 때는 한없이 좋지만 조금만 틀어지면 언제라도 깨어질 수 있는 게 우리 인간 사이의 신뢰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벼운 사랑, 값싼 믿음을 원치 않으신 것 같습니다. 어떤 상황, 어떤 조건 속에서도 '배반당하지 않을 신뢰와 사랑'을 확인하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확인에는 실험이 따라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과 신뢰가 진실인지 아니면 변할 수 있는 것인지의 여부는 시련을 통해서 비로소 증명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이 '이삭의 희생'으로 알려진 이야기는 해피 앤딩으로 끝났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졌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의 가슴에 내리꽂으려고 번쩍이는 비수를 높이 쳐든 그 최후의 순간까지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번제할 양을 준비해두셨을 것이라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아들을 향했던 아브라함의 냉혹함과 비정함은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가혹한 심문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나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당신을 믿는데, 당신도 나를 끝까지 믿겠습니까?' 이것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던진 질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위에 올려놓고 칼을 내리치려 했습니다. 시퍼런 칼이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아들의 몸을 향해 떨어졌습니다. 이제 당황한 쪽은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그만! 그만!' 다급해진 하나님은 어린 이삭의 하얀 가슴을 향해 사정없이 떨어지는 아브라함의 팔을 움켜잡았습니다. '아니야, 알았어, 제발 그러지마, 네 마음 내가 알았어, 널 못 믿은 내가 잘못이야.'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결국 하나님이 졌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의 믿음의 대결에서 패했습니다.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친히 준비하셨다"고 끝까지 믿은 아브라함이 이겼습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보니 숫양 한마리가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에게 번제로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친히 준비한 양으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땅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입니다. 줄여서 '여호와의 준비'입니다. 아브라함이 이겼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이겼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믿음은 '하나님의 준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오늘부터 대림절(待臨節)이 시작됩니다. 대림절은 대강절(待降節) 혹은 강림절(降臨節)이라고도 불립니다. 성탄절이 오기 전에 한 달 동안이 대림절 기간입니다. 세상의 달력은 1월 1일을 기점으로 한 해가 시작되지만, 교회의 달력은 대림절을 기점으로 한 해가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오늘은 교회력으로 새 해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대림절에 사용하는 예전색은 보라색입니다. 오늘부터 매주 하나씩 불을 밝히는 4개의 대림초도 모두 보라색입니다. 목사의 스툴 역시 보라색입니다. 보라색은 '기다림'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다릴까요.

영어로 대림절을 뜻하는 "Advent"는 '오다'는 뜻을 가진 라틴어 "Adventus"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러니까 대림절은 예수님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대림절을 그저 성탄절을 준비하는 기간 정도로 여기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림절은 예수님의 탄생, 즉, '처음 오심'뿐만 아니라 '다시 오심,' 즉,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대림절이 예수님의 처음 오심보다는 다시 오심을 고대하는 기쁨과 희망의 기간이었습니다. 중세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이 곧 심판 날이 될 것으로 생각하여 두려움 속에 대림절을 속죄의 기간으로 지켰습니다. 종교개혁 이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의 재림을 기다리는 기쁨의 절기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렇듯 대림절은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오늘 부른 찬송가 "곧 오소서 임마누엘"의 가사처럼, 메시아의 오심을 고대하는 기쁨의 절기입니다. "곧 오소서 임마누엘, 오 구하소서 이스라엘, 그 포로 생활 고달파, 메시아 기다립니다, 기뻐하라 이스라엘, 곧 오시리라 임마누엘." 메시아에 대한 이 기다림은 이사야 40장에 실려 있습니다. 오늘 예배 중에 읽은 복음서의 본문(누가 3:4-6)도 이 이사야 40장을 인용한 것입니다. '제2이사야'라 불리는 이사야서 40-55장은 주님 오시기 전 6세기 바벨론의 포로생활을 그 역사적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사야 40장은 '위로의 메시지'부터 시작합니다. "너희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1절). 왜 이스라엘이 위로를 받아야 합니까? 그것은 이제 그들의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2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3절)고 외칩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즉각적으로 출애굽을 연상시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와 사막을 지나 약속의 땅에 이르렀던 것처럼, 이제 바벨론의 포로생활로부터도 해방되어, 광야와 사막을 지나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이사야 40장에서 특별히 우리의 주목을 이끄는 것은 장차 이스라엘에게 임하실 메시아가 '목자'로 오신다고 말하는 구절입니다. 11절입니다.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오시는 메시아가 심판하여 징벌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의 백성을 목자와 같이 친히 돌보시는 구원과 위로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로생활을 하는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라 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대림절은 바로 이와 같은 이사야 40장의 비전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다시 한 번 메시아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우리를 목자와 같이 위로하고 돌보시는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립니다. 이사야는 그 분이 오심으로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보리라"(40:5)고 약속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곧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나타나심은 한 두 사람이 아니라 모든 육체가 볼 수 있게 나타나신다고 했습니다. 실로 우리는 그것을 예수님에게서 보았습니다. 참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참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우리에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교우 여러분, 대림절은 바로 이 목자와 같은 메시아의 오심을 대망하는 은혜의 절기입니다. 눈물과 힘겨움으로 가득한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애타게 부르짖는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기를 간구하는 절기입니다. 실로 고통과 온갖 악으로 점철되어 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의 다시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조물들도 하나님의 아들의 나타나심을 고대하고 있습니다(로마서 8:18).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하나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로마서 8:21) 대림절은 바로 이와 같은 간절함과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소망 가운데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이 복된 기다림의 절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준비'를 신뢰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처럼 번제할 숫양을 가시덤불 속에 하나님이 이미 준비해두셨음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은 근거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믿음에 기초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정한 구원과 위로와 복을 준비해두셨다는 '여호와 이레'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 가운데 희생양을 번제로 바칠 것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번제할 어린 양을 하나님 자신을 위해 친히 준비하셨다'는 믿음에 기초한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보여준 바로 그 믿음에 기초한 기다림인 것입니다. 오늘부터 성탄절까지 이 복된 믿음과 기다림이 교우 여러분의 삶 한 가운데 있기를 기도합니다. Soli Deo Gloria. (2017.12.3.)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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