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서 5장 10-18절, 빌립보서 1장 19-29절
[12월의 기도]
목필균 시인의 "12월의 기도"라는 시가 있습니다. 한해를 보내는 우리들의 마음을 담은 것 같아 소개할까 합니다.
마지막 달력을 벽에 겁니다.
얼굴에 잔주름 늘어나고/ 흰 머리카락이 더 많이 섞이고/
마음도 많이 낡아져가며/ 무사히 여기까지 걸어왔습니다.
한 치 앞도 모른다는 세상살이/ 일 초의 건너뜀도 용서치 않고/
또박또박 품고 온 발자국의 무게/ 여기다 풀어놓습니다.
제 얼굴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는/
지천명으로 가는 마지막 한 달은/ 숨이 찹니다.
겨울바람 앞에도/ 붉은 입술 감추지 못하는 장미처럼
질기게도 허욕을 쫓는 어리석은 나를/
묵묵히 지켜보아주는 굵은 나무들에게/
올해 마지막 반성문을 써 봅니다.
추종하는 신은 누구라고 이름 짓지 않아도
어둠 타고 오는 아득한 별빛같이/ 날마다 몸을 바꾸는 달빛 같이
때가 되면 이별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의 기도로 12월을 벽에 겁니다.
아마 시인이 이 시를 쓸 때의 나이가 마흔아홉이었던 것 같습니다. 백세 시대를 산다는 지금 인생의 절반을 살아온 것인데, 문득 한 장 남은 달력, 즉 12월을 보며 자신의 인생을 성찰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살았지만 한편으로 헛된 욕망을 좇은 것은 아닌지 일종의 반성문을 씁니다. 그러나 반백의 세월을 살며 깨달은 것이 있어서, 때가 되면 이별도 할 줄 알고, 흘러가는 시간을 보낼 줄도 아는 넉넉함이 보입니다.
12월이 되면 한편으로는 다가오는 새해를 기대하는 마음과 함께 다른 한편으로 올 한 해 어떻게 살았나 돌아보게 됩니다. 언제나 12월이 되면 아쉬움도 남지만, 그래도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온 자신을 토닥이며 "애썼다!"라고 격려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한 살 더 먹는다는 생각에 만감이 교차합니다. 여러분의 올 한해는 어떠셨나요?
제가 아는 강사 분 중에 강의를 시작할 때,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다섯 글자로 말해보라고 하는 분이 계십니다. 여러분의 올 한 해를 다섯 글자로 요약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하시겠습니까? 잠깐 생각해 보시지요. 저는 저의 올 한 해를 "바쁨과 기쁨"이라고 정해보았습니다. 정책당회를 준비하면서 2017년 목회일지를 쭉 적어보니 참으로 많은 것을 하였고, 그래서 늘 바빴지만, 또 그런 만큼 결실들이 있어서 기쁜 한해였던 것 같습니다. 『논어』에 보면 "싹은 났지만 꽃을 피우지 못한 경우도 있고, 꽃은 피었으나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子曰, "苗而不秀者, 有矣夫! 秀而不實者, 有矣夫!")는 공자님의 말씀이 나오는데, 여러분은 올해 어디에서 꽃을 피웠고, 어디에서 결실을 맺으셨는지요?
[예수의 사랑, 거듭난 생명이 되기 위하여]
올 한해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서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기를 소망해 왔습니다. 그래서 설교도 예수님께 집중하였고, 매주 수요일에는 올 해 표어를 제일 첫 번째 기도제목으로 놓고 매주 기도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떤 원칙이나 기준이 없이 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은 하나의 원칙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빌립보서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아무 일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온전히 담대해져서, 살든지 죽든지, 전과 같이 지금도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시리라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제대로 믿는다면 바로 거기에 세상적인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이 깃들어 있고, 삶의 진정한 의미가 녹아 있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함께 교회를 다니고, 기도를 하고, 성서를 읽어도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깊은 진리에 도달하는 것은 저마다 다릅니다. 신앙의 참된 맛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첫째 보이는 것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고, 이 세상에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 돈이나 권력으로 측정 가능한 것만을 귀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많이 가지려고 하고, 높은 직위를 차지하고, 좋은 집과 자동차와 명품과 좋은 학벌을 얻으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얻게 되면 세상을 다 소유한 것처럼 기뻐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자족할 줄 모르고 더 욕심을 부립니다. 어떤 사람은 또 교만하여져서 그것을 얻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깔보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불행이 닥쳐서 그런 것들을 잃어버리면 삶은 순식간에 절망으로 치닫게 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혹시 잃을까봐 늘 불안에 떨며 삽니다. 문명이 발달해서 모든 면에서 훨씬 더 풍족해지고, 편리해졌지만 그런 것들이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을 없애지는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밤에 산길을 가다 발을 헛디뎌 벼랑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는 다행히 흙 밖으로 나온 나무뿌리 하나를 간신히 잡게 되었습니다. 천만다행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얼마간 그 나무를 붙들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게 되자, 그는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운 흑암에 쌓여 두려움이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천길 낭떠러지를 생각하니 전신이 떨려 왔습니다. 누구든 이런 상황이 되면 하나님을 찾기 마련이지요. 이 사람은 두 손으로 나무뿌리를 힘껏 움켜잡고 살려 주시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그런데 눈물의 호소가 하늘에 들렸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움켜쥔 손을 놓으라!" 말도 되지 않은 응답에 이 사람은 소리 쳤습니다. "아니, 내가 미친 줄 아십니까? 여기서 손을 놓으면 어떻게 되라는 겁니까?" 이 사람은 이렇게 외치고는 밤새 지옥보다 악몽 같은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그 뒤로는 하늘에서 어떤 음성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덧 아침이 밝아 오고 동쪽으로부터 해가 떠오르자 이 사람은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한 치 발밑이 넓은 땅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다른 동물과 달리 우리들의 지식과 노력으로 많은 것을 이루어 왔습니다. 그러나 한편 그러면서 진정한 생명이 어디에 있는지 잊어 버렸습니다. 세상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유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두터움에 대한 신뢰가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늘 아버지께서는 지금까지도 일하고 계시는데, 우리는 그것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주시겠다고 하셨는데도 우리의 신앙이 너무 얕기 때문에 여전히 불안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는데, 우리 또한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계획은 우리가 하더라도, 결정은 주님께 맡기고, 그렇게 우리가 하는 일들을 주님께 맡기면 계획하는 모든 일들이 주님의 뜻 가운데서 이뤄질 것입니다(잠언 16:1, 3). 아멘.
[자기를 넘어서는 일]
우리가 참된 신앙의 깊이에 도달하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는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마가 8:34)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자기를 부인하지도 않았고, 자기 십자가를 질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자기를 지켜 준다고 생각했던 것, 자기의 습관, 자기가 체험하면서 느낀 것들이 바로 자기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자기를 넘어서는 일이야말로 구원을 향한 첫걸음인데, 바로 그 한 걸음을 떼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요한복음서가 이런 사실을 매우 잘 보여줍니다. 오늘 유대 사람들은 예수가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친 것과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부른 것 때문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제가 우리 교회 카페에 이번 주의 성서본문을 올리고 매일 아침 묵상하면서 댓글을 답니다. 지난 금요일에는 이렇게 썼습니다. "유대인들은 왜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가? 무엇 때문에 생명을 유린하려고 하는가? 자신의 신념이 생명을 해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고 경계해야 한다."
예수님은 38년이나 누워 있던 병자를 고쳤습니다. 아무도 관심 없던 사람, 병이 걸린 지 너무나 오래 되었기에 나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그 사람! 그렇게 세상에서 소외되고 스스로 절망적인 삶을 살던 사람의 인생을 바꾸었는데, 유대 사람들은 그 놀라운 표적을 보지 않고, 안식일 법을 어긴 것에만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지금 이 땅에서 지금 활약하고 계시다는 것을 말이지요. 안식일이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라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는 안식일에도 사람을 고치실 수 있다는 것을 이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종교적 신념입니다. 유대 사람들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셨고, 그 날에 쉬셨으며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날을 거룩하게 여겨서 어떤 일도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출애 20:8-11). 안식일 준수계명은 십계명의 4번째 계명이었고, 이 율법은 바벨론 포로가 된 이후에 더욱더 강화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절기에 따라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굳게 지켜왔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을 때 이런 방식으로 신앙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위해 할례를 더욱 철저하게 시행하였고, 안식일의 준수 계명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는 공간이 사라지자 이제 안식일이라고 하는 시간적 개념이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신들이 난무하고 그런 신들이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해주는 이방 땅에서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유대인들의 노력은 바로 할례와 안식일 준수에 집중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유대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지만 여전히 로마라고 하는 대제국의 식민지였고, 그래서 이런 종교적 신념이 여전히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종교적 신념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보지 못하고, 생명을 살리는 더 큰 일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종교적 신념이 무서운 것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념인데, 그것을 마치 하나님의 명령이나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유대인들 또한 안식일에 관한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을 하나님의 계명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둘째, 유대 사람들이 지닌 또 다른 잘못은 바로 권력에 대한 집착이었습니다.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 곳곳에서 예수님은 안식일 문제로 유대의 당국과 심각한 마찰을 일으킵니다. 율법학자들과 제사장들, 그리고 바리새파와 유대 순혈주의자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고 살리고 기적을 일으킬 때마다 문제를 삼습니다. 왜냐하면 이 안식일법을 통해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을 믿는 종교가 유대교인데, 모든 종교가 그렇듯이 하나님이 계시면 그 하나님을 연결해준다고 하는 매개체가 생기게 됩니다. 제사장이 그렇고, 말씀을 연구하고 해석해주는 율법학자가 그렇고, 회당의 제도가 그렇습니다. 누구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지만 종교제도가 성립하고 나면 그 뒤로는 이 종교제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처럼 되어버립니다. 하나님과 종교제도가 뒤바뀌는 현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로 유대 사회를 움직이는 그 원리 또한 안식일 법과 같은 종교제도에 있었고, 그 종교제도의 우두머리들은 하나님의 대리자를 자처하며 권력을 쥐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유대 사람들로 통칭되는 이들은 바로 이런 권력을 누리던 자들이었고, 예수님은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심으로써 뜻하지 않게 권력의 중심부를 공격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추구하라]
오늘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라는 말씀을 유대인들에게 남겼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공격한 사람들은 예수가 안식일 법을 어겼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겼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들의 관점으로 예수님을 판단하고 그래서 더욱더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함께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자, 이 세상과 우주의 역사를 이끌어 오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도 일주일에 하루는 쉬셔야 할까요? 만약 하나님이 진짜 쉬신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사실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이 문제는 논쟁 거리였습니다. 만약 하나님에게 안식일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쉬시는 동안 누가 이 세상 모든 만물로 하여금 계속해서 질서 있게 돌아가게 하는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당대 랍비들의 일치된 견해는 하나님은 안식일에도 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일하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섭리가 한 주간마다 정지되는 일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인간만큼은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이유는 인간에게 세상을 맡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담에게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모든 것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하셨고(창세 1:28), 노아에게는 "내가 이것들을 다 너희 손에 맡긴다"(창세 9:2)고 하셨습니다. 즉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모든 창조세계를 돌보아야 하고, 특별히 생명을 살리고 모든 아픈 것들을 치유하여 온전하게 하는 일, 즉 구원 사역에 매진해야 합니다. 이것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본래의 뜻입니다. 우리가 이 사역을 잘 감당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사실을 다시금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모든 인류가 어떻게 살아갈 때 참으로 인간답게 사는 것인지, 하나님의 형상으로 온전하게 살아가는 것인지를 보여 주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는 이 한 마디에 바로 하나님의 우주를 경영하시는 그 사역과 그 사역을 이어서 이 땅을 아름답게 가꾸어야 하는 인류의 사명이 그대로 녹아 있는 것입니다.
[성탄절을 맞아 생명살림을 위하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올 한해 참으로 수고 많으셨습니다. 여러분의 몸과 마음을 잘 다스리시고, 건강한 모습으로 이 자리에 오신 것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생명을 온전히 유지하신 것 잘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여러분은 우선적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셔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아프거나 감기가 들거나 할 때 가장 먼저 하나님께 죄송합니다. 주님 주신 몸을 온전히 보존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참으로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여러분의 생명과 삶이 방해받아서는 안 됩니다. 종교제도나 율법보다도 여러분의 삶이 더 중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기쁨과 즐거움이 되어야지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제가 담임목사로서 교회활동에 참여하라고 여러분을 초대하고 또 한편으로 재촉하기도 하지만, 그 모든 교회활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에서 비롯된 것이어야지, 안하면 벌 받을까 두려워서, 또는 사람의 눈치가 보여서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참 신앙은 여러분을 자유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트만이라는 신학자는 "따름이 자유다!"라는 매우 역설적인 신앙의 진리를 선포하였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여러분 각자의 삶을 매우 소중히 여기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소중하듯이, 우리 형제자매와 이웃의 삶도 중요하고,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명체의 삶도 고귀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의 풍성함을 위해 남을 억누르고 이용합니다. 심지어 살생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온갖 동물들과 식물들에게 해서는 안 되는 유전자 조작이라든가 밀집형 사육을 통해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고 또 범죄를 행합니다. 음식을 먹어야 살 수밖에 없는 모든 생명체들이 함께 사는 방식은 먹은 만큼 내어 주는 것입니다. 받은 만큼 주었을 때, 살생이 섭생이 되고 상생이 됩니다. 그런데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쫓아가면서 준 것보다 더 받으려고 하고 남들보다 더 많이 먹으려고 합니다. 주고받을 때 이것을 반드시 따집니다. 편하게 넉넉하게 줄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제 한 주만 지나면 크리스마스가 다가옵니다. 성탄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주신 날이고, 예수님께서 자신을 세상에 내어준 날입니다. 오늘 바울사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귀한 특권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내어주신 당신의 그 아들을 만나고 그분과 관계를 쌓아가며 그분을 신뢰하여서 죄악의 길로 가지 않게 된 특권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특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이제 이웃과 형제자매 모든 생명의 살림을 위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당하는 특권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것을 겪을 각오도 된 사람입니다. 사랑은 바로 함께 비를 맞을 때 더욱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가족 여러분! 올 한 해 참으로 잘 사셨습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갑시다. 여러분들만이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내 가족, 형제자매와 이웃, 우리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을 향하여 걸어갑시다. 그 길은 때로 고난의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난은 장차 올 영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비하면 어려움이 오히려 기쁨이요 보람입니다. 언제나 그리스도를 위한 특권을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길 빕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신 하나님! 한 해를 보내며 주님께 감사의 찬송을 올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올 한해도 잘 살았습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시고 예수를 신뢰하여 승리하는 삶을 사는 특권을 주신 것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가 그 사랑 형제자매와 이웃과 나누게 하소서. 그 길이 비록 좁은 길이라 하더라도 그 또한 소중한 길이라는 것을 알게 하소서. 바울사도를 본받아 주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특권을 우리가 누리게 하소서.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여기에 들어가시면 설교 음성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cafe.daum.net/SoulLoveCommunity/UkVO/3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