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주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

장윤재 목사(이화대학교회)

- 이사야 49:13-15, 베드로전서 3:8-9, 요한복음 2:13-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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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안네의 일기』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 『안네의 일기』는 지금까지 50여 개국에서 번역돼 5천만 부 이상이 팔렸습니다. 1944년 15살의 어린 나이에 나치 수용소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안네의 이 유명한 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1942년 6월 12일: 전쟁을 위해 엄청난 돈을 쓰면서도 왜 의료 시설이며 예술가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쓰는 돈은 한 푼도 없는 것일까? 세계에는 음식이 남아 썩는 곳이 있는데도 왜 굶어죽어야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일까?" 당시 겨우 13살이던 안네의 일기장 첫 장은 이런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바로 이 1942년 6월 12일은 안네의 13번째 생일날이었습니다. 아버지 오토 프랑크가 딸의 생일을 기념해 붉은색 바탕의 오렌지색 무늬 표지의 일기장을 선물로 주었던 것입니다. 이 날로부터 체포되기 직전까지 안네는 외출은 물론 창문마저 폐쇄된 캄캄한 밀실에서 2년 동안 살면서 하루하루 주변의 일상사를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와중에 안네에게는 여성으로서 초경이 찾아왔고 이웃집 소년에 대한 첫사랑의 감정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분명 이 일기는 장차 저널리스트가 되기를 꿈꾸던 감수성이 풍부한 한 문학소녀의 성장 기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치 독일의 유태인 탄압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자, 또 시시각각 옥죄어오는 비밀경찰의 무서운 손아귀 앞에 무방비로 서 있는 연약한 한 인간의 절규이기도 했습니다.

안네의 일가 4명은 1944년 9월 6일 발각돼 다른 유태인 1,015명과 함께 화물차에 실려 아우슈비츠로 실려갔습니다. 즉각 선별작업이 벌어져 15세 미만 어린이와 노인 549명이 당일 가스실로 보내졌고 나머지는 남녀별로 수용되었습니다. 아버지 오토는 아우슈비츠에 남았고 안네와 언니 마고는 독일의 베르겐 벨젠 강제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지극히 불결한 이곳에서 언니 마고는 영양부족에 티푸스까지 겹쳐 1945년 3월 먼저 죽었고, 며칠 후 안네도 뒤따랐습니다. 당시 혹독한 추위였지만 티푸스에 의한 전신 발진과 고열로 둘 다 모두 옷을 벗은 채 죽었다고 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히틀러가 학살한 6백 만 유태인 가운데 어린이는 150만이었습니다. 안네가 죽은 지 한 달도 채 안 돼 그가 있던 베르겐 벨젠 수용소는 영국군에 의해 해방되었습니다. 며칠만 더 살았더라면 우리는 올해 88살이 된 안네 프랑크 할머니를 볼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1942년 6월 12일: 전쟁을 위해 엄청난 돈을 쓰면서도 왜 의료 시설이며 예술가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쓰는 돈은 한 푼도 없는 것일까? 세계에는 음식이 남아 썩는 곳이 있는데도 왜 굶어죽어야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일까?" 평범해 보이는 이 말 속에 우리는 우리 시대의 구조적 불의에 대한 안네의 분노의 씨앗을 봅니다. 사람을 죽이는 일에 엄청난 돈을 쓰면서 왜 사람을 살리고 기쁘게 하는 일에는 한 푼도 돈이 없는가? 먹을 것이 남아 썩어 가는 곳이 있는데 왜 우리 주변에는 굶어죽는 사람이 있을까? 7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 질문으로 시작한 『안네의 일기』는 이런 열정적인 소망으로 이어집니다.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인간의 마음이 선하다는 것을 믿는다... (우리에게) 다시 평화롭고 조용한 시절이 찾아올 것이다."

저는 안네의 일기장 첫 구절을 보면서 12살 된 어린 예수님이 유월절에 부모를 따라 예루살렘에 갔다가,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고 혼자 남아 예루살렘을 배회했던 누가복음 2장(41-51절)의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일을 마치고 나사렛으로 돌아가던 부모가 일행 중에 당연히 아들이 있으려니 생각하고 하룻길이나 길을 가다가 아이가 없음을 확인하고 황급히 발길을 돌려 예루살렘을 샅샅이 뒤진 사건 말입니다. 아들을 찾아 사방을 수소문한 지 사흘 만에 그들은 잃어버린 아들을 겨우 찾았습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는 어머니의 말에 어린 예수님의 대답은 조금 황당한 것이었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누가복음에는 12살의 어린 예수님이 성전의 선생들 중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묻기도 했다고 하는데(2:46) 아마 논쟁을 하신 것 같습니다. 이로부터 20년 후 다시 예루살렘 성전을 찾은 예수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와 상인과 환전상들을 후려치고 상을 둘러엎으며 성전을 청소하셨습니다. 12살의 예수님은 성전에서 무얼 보고 느끼셨던 것일까요? 성서에는 기록이 없지만 혹 예수님의 마음에도 안네 프랑크가 자신의 일기장에 처음 적었던 질문들을 생각하지는 않았을까요?

사회적 시각에서 보면 종교는 '인격수양'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자가 되면 무엇보다도 화를 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화를 낼 줄 모르는 인간으로의 개종, 혹은 무덤덤한 성인군자가 되는 게 신앙의 목표라면 이제부터는 예수님보다 감정 없는 돌멩이를 따르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분노하는 분이었습니다. 마가복음 3장을 보시면 (1-6절)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시는 것을 트집 잡아 고발하려는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이 '분노'하셨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런데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하려고,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주시는지를 보려고, 예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서 가운데로 나오너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그들은 잠잠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노하셔서(with anger),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들의 마음이 굳어진 것을 탄식하시면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 사람이 손을 내미니, 그의 손이 회복되었다."

성서는 분노를 사랑의 반대말로 보지 않습니다. 성서는 분노를 사랑 혹은 자비의 이면이라고 말합니다. 분노와 사랑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성서의 사랑의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진노(wrath of God) 안에 있는 더 깊은 하나님의 사랑(love of God)과 자비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무슨 역설입니까?

작가 박완서 씨의 저서 가운데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노하는가』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잔 신경질은 느는데 큰 것, 본질적인 것에 대한 분노는 실종되고 없는 우리의 자화상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가수 김수희 씨의 노래 구절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처럼 우리는 시대적 불의와 비인간적 구조 앞에서는 꼬리를 내리고 거기에서 받는 정신적 압박을 가족이나 동료 그리고 이웃 가운데 약자들에게 분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당한 분노가 밖으로 표출되지 못하고 자꾸만 안으로 쌓이고 있습니다. 분노가 밖으로 폭발("explode")하지 않고 안으로 폭발, 즉 내파(內波, implode)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렇게 속으로 억눌린 분노 때문에 생기는 병을 '화병'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떤 심리학자(Karl Menninger)도 "속으로 눌러 넣은 화는 반드시 겉으로 나와 병이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분노를 속으로 삭이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잘못된 제의,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는 종교, 시대의 불의와 우상 앞에 머리를 숙이고 분노를 속으로 눌러 넣으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성전 뜰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환전상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상을 둘러엎으신"(요한 2:14-15) 분이셨습니다. 대단히 과격한 행동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성전의 힘없는 상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당시 성전의 상권은 대제사장 친족들에 의해 교묘하게 장악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이 지정한 짐승과 화폐가 아니면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만들어 그들은 독점적으로 막대한 폭리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종교를 팔아 장사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에 예수께서 분노하신 것입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은 시편 69:9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의 이 과격한 분노가 "주의 집을 사모하는 열심"에서 나왔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요한 2:13-17). 시편 69편은 다윗의 시인데, 다윗은 주를 위하여 비방을 받고, 수치를 당하고, 심지어 형제들에게 낯선 사람이 되는 이유가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자신을] 삼"켰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온 "주의 집을 사모하는 열심"을 새번역은 "주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분노(anger)는 바로 이 열정(zeal, passion)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뜨거운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분노하셨습니다. 그의 가슴이 냉소적이거나 방관적이 아니었기에 그가 분노하신 것입니다. 가슴이 뱀처럼 차가운 사람은 냉소하지 분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분노하셨습니다.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주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46년이나 걸려 지은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면 자신이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요한 2:19). 주님의 분노는 주님이 보여주신 사랑과 자비의 원천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릴 곳이 오직 예루살렘 성전 한 곳 뿐이며, 예배드릴 예물은 오직 자기들이 지정한 것들로만 드려야 한다는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그분의 분노는, 그들의 교리와 가르침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고 운명처럼 따르기만 하던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을 한없이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과 자비의 마음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닙니다. 미움도 어쩌면 사랑의 일종입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입니다. 무관심을 영어로는 "apathy"라고 합니다. 어원을 따져보니 그리스어로 '파토스가 없는'("a"[without] + "pathy"[pathos])이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파토스'(pathos)가 무엇입니까? '문학, 음악, 이야기 등에서 연민의 정을 자아내는 힘'을 말합니다. '파토스'는 '느낌'이나 '고통'의 뜻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무감정, 무감동, 냉담, 냉정으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파토스'의 라틴어 동의어가 '파시오넴'(passionem)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영어의 "passion" 즉 열정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영어에서 가장 기이한 것은 열정을 뜻하는 "passion"이라는 말이 '그리스도의 수난'을 가리키는 말도 된다는 사실입니다. 멜 깁슨 감독의 영화제목 "The Passion of the Christ"는 '그리스도의 열정'이 아니라 2천 년 전 그리스도가 당하신 '십자가의 수난'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입니다. 그리스도가 고난을 당하신 이유는 그가 우리를 향해 품었던 그 뜨거운 열정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무관심은 인간에 대한 가장 무서운 사형선고와 같습니다. 영어로 "shun"이란 '~을 피하다, 비키다, 멀리하다, 꺼리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본래 18세기 유럽에서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내려진 징벌의 명칭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shun" 선고가 내려지면 아무도 그를 상대해서는 안 됩니다. 한 동네와 이웃에 살아도 그는 거기에 속하지 못한 인간이 되고, 설사 사람들 틈 속에 섞여 있다 하더라도 관심 밖에 벗어난 인간이 됩니다. 살았지만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가 됩니다. 인간이 인간다우려면 서로에 대한 관심 속에 살 때만 가능할 것입니다. 무관심은 남에게 아무런 피해도 끼치지 않는 가장 좋은 중립의 상태가 아니라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친구가 친구를, 부모가 자녀를, 자녀가 부모를, 그리고 이웃이 이웃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가장 차갑고 비인간적인 방법입니다.

이러한 무관심을 우리는 개인 사이의 문제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무관심은 또한 역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세계문명사와 관련하여 도전과 응전의 역사관을 피력한 영국의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에 따르면, 인류의 역사에는 21개의 커다란 문명이 있었는데, 그 중 2개를 뺀 19개의 문명이 외부의 정복 때문이 아니라 내부의 부패로 소리도 없이 붕괴되었다고 합니다. 그 내부의 부패는 바로 한 사회 속에서 서로에 대한 무관심에서 기인했다고 그는 지적한 바 있습니다.

사실 관심이란 곧 사랑입니다. 사랑이란 곧 관심입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도 따지고 보면 관심의 농도를 뜻합니다. 관심이 깊어지면 곧 사랑이 됩니다. 관심의 깊이가 곧 사랑의 깊이입니다. 부부가 서로의 취미나 기호와 같은 것에 관심이 없으면서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것은 입술로만 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아무리 외쳐도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소외되고 고통당하는 이웃에 대해 구체적인 관심이 없으면 그것은 거짓 구호에 불과합니다. 사랑은 추상적이고 막연해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사랑은 작지만 구체적이고 깊이 있는 관심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어린 왕자』의 작가 생텍쥐페리는 슬픔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살아있는 증거이고, 남을 위해 흘릴 줄 아는 눈물은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 숨어있는 보석이라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관찰입니까? 생을 깊이 바라보고 있는 작가입니다. '슬픔을 느끼는 것'! 그것이 살아있다는 증거라 그는 말했습니다. 삶을 내 맘대로 휘두르지 못해서 우는 오만의 눈물이 아니라 '남을 위해 흘릴 줄 아는 눈물'이 우리 가슴속에 숨어 있는 보석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교우 여러분, 그런 마음, 그런 보석 다 가슴에 가지고 계시지요?

은주라는 이름을 가진 한 학생 자원봉사자의 이야기입니다. 연말에 고아원에서 어린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했습니다. 어느 날 한 살짜리 아기를 돌보고 있는데 갑자기 아이가 숨을 헐떡이고 몸을 비꼬며 심하게 경련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놀라고 너무나 겁이 난 나머지 큰 소리로 수녀님을 불렀으나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수녀님, 수녀님!' 아무리 불러도 오지 않았습니다. 은주는 그 아이를 꼭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마침내 담당 수녀님이 와서 그 아이가 간질증세 발작을 보인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때 은주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수녀님, 저는 이 아이가 죽는 줄 알았어요. 이 아이만 살려주시면 무슨 일이든 다 하겠다고 기도했어요. 태어나서 그렇게 온 마음으로 열심히 기도해본 적이 없어요."

우리는 기도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은주 학생처럼 그렇게 온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기는 아마 드물 것입니다. 은주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아이만 살려주시면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자기 아이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봉사활동을 해주고 떠나면 되는 고아였습니다. 그런데 은주의 마음에는 아름다운 보석이 숨어 있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은주는 그 경험을 통해서 그 아름다운 보석을 소유하게 됐는지도 모릅니다. 그 아이를 꼭 끌어안고 울면서 자신도 모르고 있던 자기 마음속의 보석을 발견했는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속에도 아름다운 보석들이 하나씩 박혀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으실 때 누구도 빼지 못하게 몰래 박아 놓은 아름다운 보석입니다. 다이아몬드나 에메랄드나 그 어떤 돌멩이도 견줄 수 없는 아름다운 보석입니다. 그 보석의 다른 이름은 눈물입니다. '슬픔을 느낄 줄 알게 만드는' 눈물샘입니다. 특히 다른 사람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입니다. '왜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되는 거야' 하며 흘리는 자책의 논물이 아닙니다. 타인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느끼게 만드는 연민의 눈물입니다. 그 보석을 찾아보십시오. 그 보석을 발견하십시오. 그 보석을 몰래 숨겨두지 말고 자랑하며 사십시오. 그 보석은 내가 자꾸 울수록 더 아름다운 광채를 내는 보석입니다. 예수께서도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셨다'고 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그 아름다운 보석이 영롱히 빛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수 나훈아 씨는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라고 노래했지만, 저는 오늘 '눈물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사랑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하나씩 심어놓으신 그 씨앗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2017년 정유년 한 해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올 한 해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사람들은 우리 시대가 무신론의 시대라고 한탄합니다. 이 시대가 하나님을 잃어버렸다고 개탄합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는 하나님의 마음을 닮지 않아서 하나님을 잃어버린 시대요, 서로에 대해 너무도 무관심하고 냉담하기에 무신론의 시대입니다. 우리 시대는 안네 프랭크의 감수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집을 생각하는 [주님의] 열정'을 잊어버렸습니다.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속에는 주님의 열정과 주님의 분노가 타오르지 않고 있습니다. 자신의 불편과 이익 때문에 격분하면서도 이웃과 세례를 향해 불타오르는 열정과 분노가 없습니다. 당연히 사랑과 자비도 없습니다. 열정이라는 원초적인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존경하는 위인들은 분노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분노는 '저항하는 사람들'(Protestant), 즉 개신교도들을 탄생시켰습니다. 백의의 천사라는 나이팅게일은 세상에 둘도 없는 고집불통에다가 성미마저 불같이 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환자들을 짐짝처럼 다루는 잘못된 치료에 대한 그의 분노가 그를 '백의의 천사'로 만들었습니다. 영국의 존 하워드는 죄수를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는 영국 감옥에 대한 분노로 근대적 감옥제도를 만든 사람입니다. 흑인 노예들을 짐승처럼 취급하는 것에 대한 윌리엄 개리슨의 화산 같은 분노가 미국 노예해방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무관심하고 무감동하며, 냉정한 마음으로는 우리는 새 해를 맞이할 수 없습니다. 열정을 회복해야 합니다. 분노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약하고 소심한 심성만으로는 안 됩니다. '주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에 때문에 분노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우리가 품어야 합니다. 영어로 '열정'을 뜻하는 또 하나의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enthusiasm"입니다. 어원을 찾아보니 그리스어 "entheos"이고, 그 뜻은 '하나님 안에서'(in God)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에 열중하다, 열정을 갖다, 열심을 다하다 라는 말은 다른 말로 무엇을 '하나님 안에서', 즉 '신들린 듯'이 한다는 말입니다. 새해에는 이렇게 '하나님 안에서' 무슨 일이든 뜨겁게, '신들린 듯' 뜨거운 열정과 따뜻한 시선을 가지고 살아가는 복된 그리스도인들 되시길 기도합니다. (2017.12.31.)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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