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이 글은 침례신학대학교 교수논문집인 『복음과 실천』 제59집(2017년 봄)에 실린 논문 "침례교신앙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를 필자가 대폭 수정하고 보완하여 기고한 것이다. 자유교회 전통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침례교회에서는 무엇을 특별히 강조해서 믿고 있는지를 독자들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을 기대하며 5부로 나누어 연재한다.
III. 침례교인들과 주류 종교개혁가들이 공유하고 있는 신앙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운동은 큰 범주에서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주류종교개혁이라고도 일컬어지는 "관료후원적 종교개혁"(Magisterial Reformation)이고, 다른 하나는 급진적 종교개혁이라고도 일컬어지는 "근원적 종교개혁"(Radical Reformation)이다(김승진, 『근원적 종교개혁: 16세기 성서적 아나뱁티스트들의 역사와 신앙과 삶』 [대전: 침례신학대학교출판부, 2011], 27-43 참조). 전자는 세속정치인들의 후원을 입으며 개혁을 이루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시교회 혹은 국가교회 형태의 교회를 세웠다. 루터교회, 개혁교회(장로교회) 그리고 영국국교회(성공회)가 그것이다. 이 교회들은 1,000년 이상 이어져온 유아뱁티즘(유아세례, Infant Baptism, Pedobaptism) 전통을 견지하였다. 갓난아기나 어린 아이가 그리스도인 부모로부터 육체적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유아뱁티즘을 받고 교회로 들어오게 되었다.
후자인 "근원적 종교개혁"의 범주에 드는 개혁가들은 교회란 영적인 출생을 경험한 거듭난 신자들의 공동체라고 믿었고, 따라서 뱁티즘은 오직 신앙고백을 분명히 하는 신자들(believers)에게만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 중 대표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성서적 아나뱁티스트들"(Biblical Anabaptists)이었는데, 유아뱁티즘 행습을 반대했기 때문에 로마가톨릭교회로부터는 물론 관료후원적 종교개혁가들로부터도 이단으로 정죄되어 엄청난 핍박을 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하기까지 하였다. 성서적 아나뱁티스트들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했던 근대 자유교회운동(Modern Free Church Movement)의 원천이 된 사람들이었다. 침례교회 역시 국가권력으로부터 자유한 교회, 다시 말하면 국교체제의 기독교를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는 교회이다.
침례교회가 자유교회의 전통 속에 있는 교회이기는 하지만, 관료후원적 종교개혁가들이 개혁의 기치로 내걸었던 주요한 신앙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공유하고 있다. 종교개혁기간(1517-1648)의 말미에 지상에 태동하게 된 침례교회(1609) 역시 종교개혁운동의 산물이었고, 주류 종교개혁가들이 부르짖었던 개혁적인 신앙의 원리들에 대해서 일정 부분 공감하고 있었다.
1.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신앙
"오직 은혜로"(sola gratia)와 "오직 믿음으로"(sola fide)는 루터와 쯔빙글리와 깔뱅 등의 주류종교개혁가들이 부르짖었던 대표적인 구호였다. 당시 로마가톨릭교회에서는 은혜와 믿음뿐 아니라 선행과 그로 말미암은 공로로 죄사함을 받아 구원받는다고 가르쳤다. 심지어 면죄부(Indulgence, 면벌부)를 구입하면 부모들과 조상들이 받아야 할 벌을 면제받는다고 선전하였다. 주류종교개혁가들은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옳다고 인정을 받는 것)은 "오직 은혜로,"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라고 부른다.
"이신칭의"의 신앙원리는 침례교인들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의롭게 된다"는 말은 죄사함 받는다는 말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죄 없다고) 인정받는다는 말이며 동시에 구원받는다는 말인데, 침례교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죄인의 회개와 믿음으로 그렇게 된다고 믿는다. "침례교인의 신앙과 메시지"(2000)의 네 번째 항목 "구원"에서 칭의에 관하여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칭의는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죄인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공의의 원리에 입각하여 그분께서 은혜롭고 완전한 사면(赦免, God's gracious and full acquittal)을 베풀어 주시는 것이다. 칭의로 말미암아 신자는 하나님과 평화와 호의의 관계로 들어서게 된다." (Ibid., 207)
2. "오직 성경"의 원리를 믿는 신앙
중세 1,000년 동안 로마가톨릭교회는 교황의 칙령들과 공의회의 결정사항들 그리고 교황청이나 교회지도자들이 만들어낸 교리체계를 "교회의 전통"(Tradition of the Church)이라고 부르며, 전통은 성경과 대등하거나 많은 경우에 성경보다 더 우선적인 권위를 갖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결국에는 로마가톨릭교회에서는 교회가 성경보다 더 크고 높은 권위를 갖는 체계를 형성하였다.
이에 대해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은 성경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The Written Word of God)이라고 주장했고, 성경을 기준으로 삼아 교회의 전통이나 교회에서 만들어진 교리나 신학을 검토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Justo L. Gonzalez, The Story of Christianity, vol. 2 [San Francisco, CA: Harper & Row, Publishers, 1985], 29-31). 교회의 전통은 단지 계시의 부차적인 원천이라고 주장하였다. 종교개혁가들은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의미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외쳤다. 그런데 침례교인들에 대한 대표적인 별명은 "그 책의 사람들"(people of The Book)이다. 성경해석에 있어서 원칙과 입장이 조금 다르기는 해도, 침례교인들은 종교개혁가들의 구호였던 "오직 성경"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그들과 신앙을 공유하고 있다.
"침례교인의 신앙과 메시지"(2000)에서는 서문에서 침례교인들의 교회생활과 삶에서 성경이 차지하는 위치를 이렇게 단언하고 있다: "침례교인들에게 믿음과 실천의 유일한 권위는 구약과 신약 성경이다. 신앙고백들(Confessions)은 단지 성경해석의 안내자일 뿐이며 양심을 지배하는 권위를 가지지 않는다"(Blount and Wooddell, ed., 197).
3. "모든 신자들의 제사장의 원리"를 믿는 신앙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던 16세기 초의 로마가톨릭교회는 성직계급제도(clergy hierarchy)와 성직자중심주의(sacerdotalism)로 인해 심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은 일종의 신분제도처럼 뚜렷이 구분되어 있었다. 성직자들은 영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평신도들 위에 군림하는 일종의 특권 신분이었다.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은 성서 속에서 "제사장"의 의미를 재발견하였다(출19:5-6, 사61:6, 벧전2:5,9, 계1:6, 5:10). 제사장은 "다리를 놓는 자"(bridge-builder)인데, 예수를 믿은 신자들은 누구나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에서 다리를 놓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글에서 "그리스도인은 아무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완전히 자유한 주인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들에게 종속하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완전히 예속된 종이다"라는 말을 하였다(Martin Luther, "The Freedom of a Christian," 280. William R. Estep, Renaissance and Reformation [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86], 130에서 재인용).
"모든 신자들의 제사장의 원리"는 민주적 회중주의(democratic congregationalism) 정치를 이상으로 하는 침례교회에서는 핵심적인 신앙들 중의 하나다. "침례교인의 신앙과 메시지"(2000)에서도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약성서적 교회는 믿음과 복음의 교제로 말미암은 언약으로 연합된, 침례받은 신자들의 자치적이고 지역적인 회중이다. 그리스도의 두 의식들을 준수하고, 그 분의 법들에 의해 다스림을 받으며, 그 분의 말씀에 의해 그들에게 부여된 은사들과 권리들과 특권들을 활용하며, 땅 끝까지 복음을 확장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각 회중은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주님되심 아래에서 운영한다. 그러한 회중에서 각 회원은 주님이신 그리스도께 의무를 다하고 책임을 다한다." (Blount and Wooddell, ed., 212)
4. 신자들의 영원한 안전을 믿는 신앙
깔뱅의 후예들은 1618-1619년에 네덜란드 도르트레히트(Dortrecht, 도르트)에서 깔뱅주의자들의 대회를 개최하여, 당시 자신들의 신학체계에 도전했던 알미니우스 추종자들의 "항론"(Remonstrance)을 비판하면서 "깔뱅주의 5대 원리"(Five Points of Calvinism)라고도 불리는 도르트 신조(TULIP)를 채택했다(이성호, 『네덜란드 개혁교회 이야기』 [서울: 그 책의 사람들, 2015], 98-106). 그 중에서 마지막 P는 Perseverance of the Saints인데, "성도들의 견인"으로 번역된다. 이성호 목사는 이 항목을 이렇게 해설하고 있다: "5. 견인은 '붙들다'는 뜻이다. 신자의 최종 구원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끝까지 붙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신자를 끝까지 붙들었기 때문에 이루어진다. 성도의 견인 교리를 분명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지 않을 수 없다"(Ibid., 104).
"견인"(perseverance)라는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참는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분 스스로가 예정하고 선택하신 그 분의 자녀들에 대해서 끝까지 참으시면서 그들이 은혜로부터 떨어지지 않도록 붙드신다는 뜻이다. 이는 깔뱅의 후예들이 이신칭의 교리와 함께 확고하게 믿고 있는 신앙이다. 침례교인들은 이를 "신자들의 영원한 안전"(eternal security of believers)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전자가 하나님께서 선택(election)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끝까지 돌보신다는 의미라면, 후자는 예수를 진심으로 믿은 신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영원히 입양(adoption)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분의 아들과 딸을 끝까지 지키신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침례교인들은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면 죄사함받고 구원받는다"는 알미니안 구원론을 믿기도 하지만, "한번 구원받았으면 언제나 구원받은 것이다"(Once Saved, Always Saved)라는 깔뱅주의 구원론도 믿고 있다. "침례교인의 신앙과 메시지"(2000) 제5항목 "은혜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God's Purpose of Grace)에서는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모든 참 신자들은 끝까지 인내를 받는다(All true believers endure to the end).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였고 그 분의 영에 의해 성화된 사람들은 은혜의 상태로부터 결코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 끝까지 견인될 것이다. 신자들은 게으름과 유혹으로 죄에 빠질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을 근심케 할 수 있고, 은혜와 위로에 상처를 입을 수 있고, 그리스도의 목적에 손상을 입혀 스스로에게 일시적인 심판이 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를 받아 믿음으로 인해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다." (Blount and Wooddell, ed., 211)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