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이 글은 침례신학대학교 교수논문집인 『복음과 실천』 제59집(2017년 봄)에 실린 논문 "침례교신앙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를 필자가 대폭 수정하고 보완하여 기고한 것이다. 자유교회 전통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침례교회에서는 무엇을 특별히 강조해서 믿고 있는지를 독자들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을 기대하며 5부로 나누어 연재한다.
IV. 침례교인들이 독특하게 믿고 있는 신앙
침례교회는 기본적으로 국가권력으로부터 자유한 "자유교회 전통"(Free Church Tradition)에 속하는 교회로서, 침례교인들은 다른 교파나 교단에 속한 그리스도인들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몇 가지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1. 국교체제의 교회를 배격하는 교회(교회와 국가의 분리)
침례교회는 영국국교회(Anglican Church, 성공회)로부터 떠나온 분리주의자들(English Separatists)에 의해 1609년에 처음으로 지상에 태동되었다. 분리주의자들의 교회였던 게인즈보로 교회(Gainsborough Church) 성도들과 담임목사 존 스마이드는 뱁티즘은 오직 신자들에게만 베풀어져야 한다고 믿었으며, 신약성서가 말하고 있는 교회는 국가나 세속권력으로부터 자유하거나 무관한 교회, 순수하고 정결한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교회임을 확신하면서 그러한 교회를 지상에 이루고자 하였다. 이들은 신약성서에 기록된 교회를 "회복"(restitutio)하여 지상에 재현하고자 하였다.
또한 1639년에 미국 땅에서 최초의 침례교회를 세웠던 로저 윌리암즈(Roger Williams, c.1603-1683)도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미국 뉴잉글랜드(New England) 지역에는 퓨리탄들(Puritans)에 의해 회중교회(Congregational Church)가 세워졌는데, 이 교회는 매사추세츠만 식민정부(Massachusettes Bay Colony)의 국교로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었다. 윌리암즈는 이러한 국교체제의 교회에 항거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진정한 종교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국교체제의 기독교를 배격해야 한다면서 유명한 두 가지 비유를 들었다. "십계명의 두 돌판들"과 "바다 위에 떠 있는 배와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가 그것이다(McBeth, 135).
십계명 가운데 처음 네 계명은 대신(對神) 관계를 규정하고 있고 나머지 여섯 계명은 대인(對人) 혹은 대물(對物) 관계를 규정하고 있는데, 분리된 두 돌판에 십계명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영적인 권위(spiritual authority)와 민사적인 권위(civil authority)는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바다 위에 떠 있는 배"(Ship at Sea)에서는 비록 배에 왕이나 주지사나 고위 세속정치인이 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배의 선장이 최고의 권위를 가진다는 것이고,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Ship at Harbor)에서는 최고의 권위가 그 항구를 관할하고 있는 세속정치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에서 최고의 권위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있는 영적인 지도자이고, 국가의 최고권위는 우두머리인 세속정치지도자라는 것이다. 이 두 권위는 분리되어 있어야 비로소 "모든 사람들을 위한 종교의 자유"(religious freedom for all)가 제대로 보장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국교체제의 기독교를 지양하고 모든 사람들을 위한 종교의 자유를 헌법적으로 최초로 규정했던 것은 미국 제1차 수정헌법(The First Amendment, 1791)이었다: "의회는 국교의 제정에 관하여 그리고 자유스러운 종교적인 활동을 금지하기 위하여 어떠한 법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First Amendment to the United States Constitution," Wikipedia, [온라인자료] https://en.wikipedia.org/wiki/First_Amendment_to_the_United_States_Constitution, 2015. 11. 7. 접속. "Congress shall make no law respecting an establishment of religion, or prohibiting the free exercise thereof, ...."). "침례교인의 신앙과 메시지"(2000)에서는 제17조항 "종교의 자유"에서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분명한 어조로 진술하고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인이시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거나 그 속에 포함되지 않은 인간들의 교리와 명령으로부터 양심을 자유케 하셨기 때문이다. 교회와 국가는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 목적을 추구함에 있어서 영적인 수단만을 고려하여야 한다. 국가는 어떤 종류의 종교적인 견해에 대해서도 벌을 부과할 권리가 없다.... 자유로운 국가에서의 자유로운 교회는 기독교적인 이상이다(A free church in a free state is the Christian ideal)...." (Blount and Wooddell, ed., 206-7)
물론 세속정부도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세워진 기관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위배되지 않는 한, 국가의 시민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국가권력을 이용하거나 도움을 입고자 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일은 성령의 도움을 힘입어 성취해야 한다. 하나님의 일은 국가권력의 강요(coercion)나 조작(manipulation)에 의해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데, 그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성령의 능력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Norman Cavender, "Freedom for the Church in a Free State," Alan Neely, ed., Being Baptist Means Freedom [Charlotte, NC: The Southern Baptist Alliance Publishers, 1988], 85).
2. 신자의 뱁티즘과 침수례에 의한 뱁티즘
(1) 신자의 뱁티즘
침례교회에서는 유아뱁티즘(유아세례, infant baptism)를 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네 복음서들에서 예수님께서 한 번도 유아들에게 뱁티즘을 베푸신 적이 없었고, 공생애 기간 중에 단 한 번도 유아뱁티즘에 관한 언급이나 명령을 하신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에서도 유아들에게 뱁티즘을 베풀었던 사례나 그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유아뱁티즘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인간의 발명품(human invention)이며 인간들이 만들어낸 교리이자 관습이자 전통이다. 침례교회에서는 뱁티즘은 오직 신앙고백을 분명하게 하는 신자들에게만(believers only) 베풀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를 "신자의 뱁티즘"(Believer's Baptism, Credo-baptism)이라고 부른다.
유아뱁티즘을 행하는 교회들에서는 구약의 할례가 신약성경에 와서는 유아뱁티즘이 되었다고 가르친다. 로마가톨릭교회와 정교회에서는 뱁티즘 자체에 죄를 사하고 구원을 주는 신비한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루터교회에서도 유사한 입장을 취한다(John H. Armstrong, ed., Understanding Four Views on Baptism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7], 91-109). 개혁교회에서는 언약신학(covenant theology)에 근거하여 유아뱁티즘의 정당성을 설명한다(Ibid., 59-72). 유아뱁티즘 자체에 구원하는 능력이 있다고는 주장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택하심의 "인침"(sealing)이 그리스도인 부모의 자녀들이 받는 유아뱁티즘에 있다고 본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면서 그와 그의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다(창 17:10-11,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서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그래서 신약에서는 유아뱁티즘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 간의 새로운 언약의 증표(sign)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갓난아기들이나 어린 아이들이 유아뱁티즘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언약을 맺게 된다는 것이다(Ibid., 64-8). 할례가 구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언약이었다면, 유아뱁티즘은 신약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의 언약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유아뱁티즘이 신약에서 구약의 할례를 대체하게(replace) 되었다고 주장한다(Ibid., 70-2).
그러나 신약성경 어디에도 그런 말이 없다. 할례는 유대인 부모에게서 "육체적인 출생"(physical birth)을 한 아들(son)에게만 태어난 지 8일만에 행해진 의식이었고, 이방인인 성인남자(Gentile adult man)가 육체적인 유대민족의 일원이 되고자 할 때 할례를 행하였다. 할례를 받는 것은 육체적인 이스라엘(Physical Israel)로 들어가기 위한 필수적인 관문이었다. 그러나 교회는 영적인 이스라엘(Spiritual Israel)이다. 영적인 이스라엘, 즉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서 영적으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 신약성서가 말하는 뱁티즘은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서 "영적인 출생"(spiritual birth)을 경험한 신자가 교회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의식이다. 만약 할례가 신약에 와서 유아뱁티즘이 되었다고 한다면, 남자 갓난아기나 남자 아이에게만 유아뱁티즘을 베풀어야 할 것이고, 그것도 태어난 지 8일만에 베풀어야 할 것이다.
구약의 할례에 대칭이 되는 신약의 언약은 유아뱁티즘이 아니라, 영적인 할례, 즉 마음의 할례, 그리스도의 할례다. 영적인 할례는 죄인이 회개를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체험적인 믿음"(experiential faith), 다른 말로 하면 "구원하는 믿음"(saving faith)을 가리킨다. 신약에서는 유아뱁티즘을 받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자녀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않는다. 골로새서 2장 11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또 그(예수 그리스도-필자 주)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구약의 할례는 사람의 손으로 하는 할례인데, 신약의 할례는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not with a circumcision done by the hands of men), 즉 "그리스도의 할례"(but with the circumcision done by Christ)다. 이것은 회개하고 예수를 믿은 마음의 상태, 즉 마음의 할례(circumcision in the heart)인데, 죄인의 회개와 믿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언약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영접하는 방법 이외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 없다. "혈통"(of natural descent)으로도 안 되고, "육정"(of human decision)으로도 안 되고, "사람의 뜻"(of a husband will)로도 안 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야"(but born of God) 한다. 이를 요한복음 3장 3절에서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unless he is born again)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거듭난다는 말은 두 번째로 나는 것이요 위로부터 나는 것이요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는 것이요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것을 가리킨다. 단순하게 말하면 영적인 출생(spiritual birth)인 것이다. 유아뱁티즘이 아니라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음을 고백하는 신자의 뱁티즘이 신약성서가 말하는 하나님 자녀됨의 언약이다. 불신자나 유아에게 뱁티즘을 베푸는 것은 마른 죄인(dry sinner)을 젖은 죄인(wet sinner)으로 만들 뿐이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직전에 마지막 유언의 말씀으로 제자들에게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뱁티즘을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a). 예수님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복음을 전하여 예수 믿는 자들이 되게 하여-필자 주) "제자가 된 자들에게" 뱁티즘을 베풀라고 유언으로 명령하신 것이다. "제자가 된 자들의 갓난아기들이나 어린 자녀들에게" 뱁티즘을 베풀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설사 목사의 자녀라고 할지라도 그 자녀가 아직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것이다. 육체적 출생 그 자체가, 그리고 유아뱁티즘을 받았다고 해서, 비록 그 부모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녀임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야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한국교회에는 "뱁티즘을 받은 불신자들"(baptized unbelievers)이 적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구원의 도리를 깨달은 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서 그 분의 제자가 된 사람이 뱁티즘을 받아야 한다. 갓난아기나 어린 아이 때 뱁티즘을 받게 되었거나 확실한 신앙고백에 근거하지 않은 뱁티즘을 받았기 때문에, 뱁티즘은 받았으나 여전히 죄사함 받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인 것이다. 죄사함과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회개와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예수님은 유아뱁티즘을 받지 않으셨다. 나이가 30살 정도 되셨을 때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비로소 뱁티즘을 받으셨다. 사도 바울도 성인이 된 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적으로 만났을 때 아나니아에게서 뱁티즘을 받았다(행9:1-19). 예수님으로부터 지상명령의 유언을 받았던 제자들의 의식 속에도 갓난아기들이나 어린 아이들에게 뱁티즘을 베푼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행전 어디에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유아뱁티즘을 베풀었다는 말이 명시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단지 집안 식구들이 뱁티즘을 받았다는 진술이 몇 군데 등장하기 때문에(가문뱁티즘, Household Baptism, 행2:38-39, 16:15, 30-34, 18:8; 고전1:14), 유아뱁티즘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집안 식구들 가운데에는 유아들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추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진술의 앞뒤 문맥을 살펴보면 복음을 들었거나 성령을 받았거나 하나님을 믿은 자들이 뱁티즘을 받았다는 것을 곧 확인할 수 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빌립보 간수의 온 가족들이 뱁티즘을 받았는데, 그들 모두는 주의 말씀을 "들었고," 하나님을 "믿었고," 그래서 "크게 기뻐했다":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뱁티즘을 받은 후, 그들을 데리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크게 기뻐하니라"(행16:31-34).
예수님이 어린 아이들을 사랑하셨고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마19:14)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안수하셨다"(마19:15)는 말씀과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셨다"(막10:16)는 말씀은 기록되어 있지만, "그들에게 뱁티즘을 베푸셨다"는 말씀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안수나 축복보다 더 절차가 복잡하고 신학적으로 더 깊은 의미를 가지는 것이 뱁티즘인데,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들에게 뱁티즘을 베푸셨다면 왜 그 사실이 네 복음서들 가운데 한 곳에서라도 기록되어 있지 않을까? 결국 예수님께서 갓난아기나 어린 아이에게 뱁티즘을 베푸신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는 뱁티즘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된 신자들에게만 베푸는 것이지, 유아들에게 뱁티즘을 베푼다는 것은 애당초 생각조차 없으셨던 것이다.
사실 성경에는 "유아뱁티즘"이라는 말 자체가 없다. 아니 성경에는 유아뱁티즘 행습 자체가 없었다. 그것은 2-3세기경 교부들 중 일부가 만들어낸 인간의 발명품일 뿐이다. 초대교회 교부들 가운데에 어떤 이들은 당시 유아들의 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에, 유아들이 죽었을 때 그 영혼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고민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유아들에게 뱁티즘을 베풀어서 원죄를 사함받는 것으로 하자는 "뱁티즘중생설"(baptismal regeneration)을 주장하는 교부들이 생겨났고, 또한 성례 자체에 죄사함과 구원을 주는 신비스러운 능력이 있다고 믿는 성례전주의(sacramentalism)를 주장하는 학자들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었고 인간들이 만들어 낸 신학과 교리의 산물이었다.
주후 150년경의 작자 미상의 문헌인 "디다케"(Didache, "열두 사도들의 교훈집" The Teachings of the Twelve Apostles)라는 글이 있는데, 뱁티즘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담겨 있다:
이렇게 뱁티즘을 주어라. 흐르는 물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뱁티즘을 주노라"라는 말을 먼저 하라. 그러나 만일 흐르는 물이 없으면 다른 물에서 주되, 찬물에서 줄 수 없으면 더운 물을 사용하여라. 그러나 만일 이러한 물도 없으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물을 머리에 세 번 부으라. 뱁티즘을 주기 전에 뱁티즘을 주는 자와 받는 자들은 금식을 해야 한다. 뱁티즘을 받는 자들에게 하루 혹은 이틀 동안 금식할 것을 주문해야 한다. (Henry Bettenson, ed. The Early Christian Father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7], 50)
이 문헌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흐르는 물에서"(in running water) 뱁티즘을 베풀라는 것은 침수례(immersion)에 의한 뱁티즘이 정상적인 초대교회적인 방식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더운 물을 사용하든지"(use warm water), "머리에 물을 세 번 부으라"(pour water on the head thrice)는 표현에서 "예외적으로" 약례(略禮)가 행해질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디다케"는 영감받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이 글에 근거하여 약례의 방식도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권위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디다케" 문헌에서는 유아뱁티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아마도 뱁티즘 받는 일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해서 "뱁티즘을 받는 자들에게 하루 혹은 이틀 동안 금식할 것을 주문해야 한다"(you must order the baptized to fast for a day or two)는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유아뱁티즘이 2세기 중반까지는 아직 상례화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갓난아기나 어린 아이에게 금식을 하라고 권면할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침례의 중요성』(Your Baptism Is Important)이라는 책에서 앤더슨(Stanley E. Anderson) 박사는 유아뱁티즘은 율법과 복음을 뒤섞는 것이며 유대교와 기독교를 혼합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뱁티즘과 할례의 두 의식은 전혀 그 뜻이 다르며, 이 둘을 서로 연결시키고자 하는 어떠한 노력도,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고 장사지낸바 되고 부활하여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을 상징하는 뱁티즘을 없애고자 하는 절망적 기도에 불과하다. 그것은 한 조각의 새 천을 헌 옷에 갖다 붙이는 것과 같으며, 그 결과는 떨어진 옷을 깁지 않은 것만 못한 것이다(마 9:16).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분별하는 신자라면, 아무도 유대교를 기독교와 혼합하지는 않을 것이다. (Stanley E. Anderson, 『침례의 중요성』[Your Baptism Is Important], 이요한 역 [서울: 침례회출판사, 1975], 154)
저명한 침례교 조직신학자 스트롱(A. H. Strong) 박사는 할례와 뱁티즘을 결부시키는 것은 복음의 진의를 오해한 데서 연유한 것임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할례의 위치를 대신하는 것은 뱁티즘이 아니라 중생이다(What takes the place of circumcision is not baptism, but regeneration). 바울은 그 의식(할례-필자 주)을 디도에게 베풀지 못하도록 했는데, 그것은 할례를 교회에 매어두려는 의도를 봉쇄한 것이다. 그러나 후에 유대주의자들은 유아뱁티즘의 형식으로 할례를 계속시켰으며, 그 후에는 유아뱁티즘의 형식으로 할례를 존속시키는데 성공하였다. (A. H. Strong, Systematic Theology [Valley Forge, PA: Judson Press, 1979], 955)
"오직 믿음!"(sola fide!)을 외쳤던 루터와 깔뱅이 약 1,000년 동안 지속되어 온 로마가톨릭교회의 유아뱁티즘 전통을 끊어내지 못하고 답습한 것은 스스로 자기모순에 빠진 것이다. 성례(주의 만찬)를 단지 상징으로 보았던 쯔빙글리마저도 취리히 시청에서 열린 제3차 공개토론회(1525년 1월 17일)에서 취리히 시의회의원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정교일치의 중세적 전통이었던 유아뱁티즘을 버리지 못하였다(William R. Estep, The Anabaptist Story: An Introduction to Sixteenth-century Anabaptism [Grand Rapids: William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6], 19-21). 도리어 신자의 뱁티즘을 주장하는 자신의 제자들을 향해 소나기 같은 비난을 퍼부으며 "비더토이퍼"(Wiedertaeufer, Rebaptizer, Anabaptist)라고 경멸적인 언사를 사용하며 조롱하고 정죄하였다(김승진, 76).
루터, 깔뱅, 쯔빙글리를 비롯한 관료후원적 종교개혁가들(Magisterial Reformers)은 중세 1,000년 동안 유럽을 지배해 온 로마가톨릭적인 유아뱁티즘의 관습을 타파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충분히 신약성서적인 초대교회의 모습을 회복(restitute, restore)해내지 못한 한계를 드러내었다(김승진, 『종교개혁가들과 개혁의 현장들: 아직도 미완성인 종교개혁』 [서울: 나침반출판사, 2015], 319-34). 엄격히 말하면 "오직 믿음!"이라는 구호와 유아뱁티즘을 행하는 것은 상호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갓난아기나 어린 아이는 믿음(구원하는 믿음, saving faith)을 가질 수도 없고 신앙고백을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의 손자·손녀"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녀" 혹은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는 말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죄인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아들·딸)가 되는 것이지 유아뱁티즘을 받음으로써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뒤집어서 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God the Father)이시지 "할아버지 하나님"(God the Grandfather)이 아니시다. 16세기의 성서적 아나뱁티스트들(Biblical Anabaptists)처럼 침례교인들은 뱁티즘이 오직 회개를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그 분을 향한 신앙고백을 분명하게 하는 신자에게만 베풀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신자의 뱁티즘"이 신약성경이 말하는 성서적인 뱁티즘(Biblical Baptism)이라고 믿는다.
(2) 침수례에 의한 뱁티즘
또한 오늘날 침례교인들은 특별한 예외적인 상황(임종을 앞둔 환자, 물속에 들어갈 수 없는 중환자, 물에 대한 공포증을 가진 자 등)이 아닌 한, 전신을 물속에 잠그는 "침수례에 의한 뱁티즘"(Baptism by Immersion)을 행한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6장 3-4절과 골로새서 2장 12절에서 언급했던 대로, "죽음"(death)과 "장사"(burial)와 "부활"(resurrection)의 행동언어를 가장 잘 상징해 주는 뱁티즘의 방식은 침수례다. 상징을 약례화(略禮化)해 버리면 상징하고자 하는 원뜻이 파괴되거나 왜곡되어 버린다. 예를 들면 미국의 국기인 성조기(星條旗, The Stars and the Stripes)에는 파란 바탕에 흰 별 50개가 그려져 있고 빨간 줄과 하얀 줄 13개가 가로로 그려져 있다. 잘 알고 있다시피 별 50개는 현재 미국의 50개 주를 상징하고 있고 줄 13개는 미국이 건국될 당시에 존재했던 13개 주를 상징하고 있다. 그것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시작과 현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약식화하여 별을 25개만, 줄을 6개만 그린다면 이것들은 무엇을 상징해줄 수 있는가? 상징을 약식화하면 상징하고자 했던 원래의 의미가 왜곡되어 버리는 것이다.
뱁티즘(침례)은 복음의 양대 기둥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crucifixion)과 부활하심(resurrection) 그리고 예수를 믿은 자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였음(identification)을 상징하는 의식이다. 뱁티즘(세례)은 죄를 씻는 것도 아니고 죄씻음을 상징해주는 의식도 아니다. 기독교는 죽고 사는(die and live) 종교이지 씻어주고 말려주는(wet and dry) 종교가 아니다. 동시에 그것은 침례받는 자가 행하는 제자도(discipleship)의 고백이기도 하다. 새 생명을 얻게 된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Savior)로뿐 아니라 주님(Lord)으로 믿고 따르겠다는 헌신의 고백이요 표현인 것이다. 뱁티즘의 의미로서 가장 중요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유언(마 28:19-20)에 대한 "순종"(Gehorsam, Obedience)인데, 그분을 진심으로 믿은 자가 맨 먼저 순종해야 하는 것이 뱁티즘을 받는 것이다. 침례교회에서는 내용에 있어서도 순종하고("신자의 뱁티즘"), 형식에 있어서도 순종하는("침수례")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유언의 말씀을 전적으로 순종하여 따르지 않는 것은 유언하신 분에 대한 불충(不忠)이다.
그래서 침수례에 의한 신자의 뱁티즘을 받는 것은 교회로 들어가는 관문이며 교회회원(church member)이 되는 전제조건이다. 뱁티즘(침례)을 받는 자는 교회의 회중 앞에서 "저도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 믿고 죄사함 받고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저의 옛 습관과 옛 삶을 장사지내고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저의 새로운 주인으로 모시고 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저도 여러분의 신앙공동체에 일원이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고백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뱁티즘은 그 본질에 있어서 (구원을 뿌려주는) 성직자의 의식이라기보다는 (구원받았음을 고백하는) 뱁티즘 받는 자의 의식이다. "침례교인의 신앙과 메시지"(2000)는 "뱁티즘"에 관하여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기독교적인 뱁티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신자를 물속으로 침수시키는 것(immersion of a believer in water)이다. 그것은 순종의 행위인데, 십자가 죽음을 당하시고 장사지낸바 되시고 부활하신 구주에 대한 신자의 믿음을 상징하는 것이고 신자가 죄에 대하여 죽고 옛 삶을 장사지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삶, 즉 부활의 삶을 산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symbolizing)이다. 그것은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종국적으로 부활할 것에 대한 신자의 믿음을 증언하는 것(testimony)이다. 교회의식으로서 침례는 교회회원이 되는 권리와 주의 만찬에의 참예를 위한 전제조건이다(prerequisite to the privileges of church membership and to the Lord's Supper)." (Blount and Wooddell, ed., 213-4)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