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시편 140:12-13, 고린도후서 1:3-6, 누가복음 17:2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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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미국 하버드대의 차기 총장으로 로런스 바카우(Lawrence S. Bacow) 교수가 선임되었습니다. 그는 지난 11년 간 하버드대학의 첫 번째 여성총장으로 재임한 - 그리고 '명예 이화인'이기도 한 - 드루 파우스트(Drew Faust) 현 총장의 뒤를 이어 오는 7월1일부터 차기 총장으로 임기를 시작합니다. 매사추세츠공대(MIT)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하버드대 로스쿨과 케네디스쿨에서 법학과 공공정책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이후 MIT에서의 오랜 교수생활과 터프츠대학의 총장을 거쳐 이번에 하버드대 총장이 되었습니다. 하버드를 포함하여 미국의 명문대학에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 맞서 그가 어떻게 미국 최고의 명문대학을 이끌어나갈지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

그런데 로런스 바카우 신임 하버드대 총장이 세간의 주목을 끈 이유는 그가 '아우슈비츠 생존자의 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동유럽 이민자 가정 출신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나치의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가족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19살에 단신으로 미국으로 가는 난민선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도 동유럽의 유대인 탄압을 피해 탈출한 이민자입니다. 누군가 '만일 유대인이 없었다면 인류의 진보가 1천 년 늦추어졌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하지요. 실로 정치, 경제, 예술, 과학, 교육 등 각 분야에서 유대인들이 활약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유대인들의 강인한 생명력과 우수성은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일까요? 우리 예수님도 유대인이셨지요. 어떻게 유대인들은 아우슈비츠와 같은 끔찍한 역사적 고난을 겪으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강인한 생명력과 희망을 유지하고 있었을까요?

사실 유대인들의 강인한 생명력은 바로 자신들이 겪은 고난과 시련의 역사 그 자체에서 나옵니다. 유대인들은 '중동에서 태어난 아시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나치는 유대인이 아시아인이기 때문에 싫어한다고 공공연히 말하곤 했습니다. 나치가 대두하기 전 독일에서는 이런 말이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몸은 비누 7개를 만들 만한 지방과, 못 하나 만들 만한 철분과, 2천 개비의 성냥을 만들 만한 인을 지니고 있다." 결국 나치는 유대인의 인체를 가지고 실제로 비누와 성냥을 만들었습니다. 아우슈비츠의 참상은 여러 매체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졌지만 그 어떤 것도 1986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 엘리 위젤의 생존기록인 『흑야』(The Night)를 능가하진 못할 것입니다. 책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하루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SS 대원들이 강제노동을 막 끝내고 돌아온 유대인 포로 전원을 광장에 집합시킵니다. 규율을 어긴 세 남자를 공개처형하기 위해서입니다. 빵을 훔쳐 먹은 죄였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하나는 나이가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수 천 개의 눈동자가 그 아이에게 집중되었습니다. 그 아이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고 입술은 꽉 깨문 채였습니다. SS에 협조하던 유대인 간수도 차마 그 아이의 목에는 밧줄을 걸지 못했습니다. 세 명의 SS 대원이 그 일을 대신했습니다. 이제 세 사형수의 발밑에 놓인 의자를 걷어찰 시간입니다. 두 어른이 소리칩니다. "Long live liberty!" '자유 만세!' 그러나 그 아이는 잠잠합니다. 아직 자유가 무엇인지 알 나이가 안 되었습니다. 바로 그 때 엘리 위젤의 바로 뒤에 서 있던 어떤 사람이 묻습니다. "Where is God? Where is He?" '하나님이 어디 계시지? 그가 어디 있냐고!' 그러나 상관의 지시가 떨어지자 세 개의 의자가 굴러 떨어집니다. 순간 모든 사람의 숨이 멎습니다. "Bare your heads!" '머리 들어!' 수용소 소장이 소리칩니다. 고개 숙이지 말고 똑똑히 보라는 것입니다. 빵을 훔쳐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똑바로 보라는 것입니다.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있던 두 성인 남자는 금새 몸이 축 늘어집니다. 그러나 세 번째 밧줄은 아직도 꿈틀거립니다. 아이의 몸이 가벼워 아직 죽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소년은 거기에 그렇게 매달려 30분 이상이나 죽음과 삶 사이에서 투쟁했습니다. 그리고 수 천 개의 눈동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서서히 죽어갔습니다. 막사로 행진이 명령됐습니다. 위젤은 그 아이의 앞을 지나갑니다. 축 늘어진 그 아이의 눈이 아직도 흐려지지 않았습니다. 그 때 다시 뒤에서 같은 사람이 더욱 격앙된 목소리로 나직이 묻습니다. "Where is God, where is God now?" '신이 어디 있는 거야? 하나님이 지금 어디 있냐고!' 그 때 위젤은 자신의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이런 소리를 듣습니다. 다시 책에 쓰인 대로 읽어봅니다. "Where is He? Here He is - He is hanging here on this gallows!"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여기 있잖아. 바로 여기 교수대 위에 달려 있잖아!'

사람들은 고난을 당할 때 '왜 신이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시느냐'고 묻습니다. 엘리 위젤도 그랬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수많은 동족이 가스실의 연기로 사라질 때마다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고난을 주시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무 답도 주지 않는 '신의 침묵'을 원망하며 그것과 온 몸으로 싸웠습니다. 그런데 그는 교수대에 달린 그 아이에게서 신을 보았습니다. 저 우주 밖에서 시험과 고난을 내리는 신이 아니라 교수대 위에서 그 아이와 함께 고난당하는 신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하나님은 저 멀리서 바라보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아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십자가는 삼위일체적 사건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고난을 당하시는 분입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웃음과 유머를 중요시 해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웃음의 민족'이라고도 불립니다. 참으로 대단한 역설입니다. 즐거울 때는 누구나 웃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괴로울 때야말로 웃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그래서 웃음을 주식(主食)이라고까지 말합니다. 히브리어로 '지혜'(wisdom)라는 말과 '농담'(joke)라는 말은 똑같이 '호크마'입니다. 그 '호크마'의 한 예를 들어봅니다. 어느 날 히틀러가 점성가를 불렀습니다. 독재자인 그는 암살을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점성가는 '당신은 유대인의 축제일에 암살된다'고 했습니다. 히틀러는 즉시 SS 사령관을 불러 '앞으로 유대인의 축제일에는 경비를 보통 때보다 50배로 강화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자 점성가가 말합니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당신이 암살되는 그 날이 바로 유대인의 축제일이 될 테니까요.' 아우슈비츠에서 실제 유행하던 "joke"(호크마)입니다. 괴로울 때에도 웃음을 만들어낼 줄 아는 능력, 그것이 바로 그들의 생명을 지탱하게 해준 힘이었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은 놀랍게도 동시에 패배를 기억하고 수치스러움을 기념하는 민족입니다. 우리는 보통 승리만 기념하고 실패는 잊으려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패배한 날이나 굴욕을 당했던 날들을 '성대하게' 기념하는, 매우 보기 드문 사람들입니다. 성지순례를 가시면 사해바다 앞의 '마사다'(Masada)라는 곳을 빠지지 않고 방문하게 됩니다. 마사다는 히브리어로 '요새'라는 뜻으로, 주변의 광야보다 400미터나 높은 천혜의 요새입니다. 이곳은 유대인들이 로마군에 맞서 저항했던 '유대전쟁' 최후의 격전지입니다. 서기 66년부터 70년까지 로마가 월등한 군사력으로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성전을 파괴하자 항복하지 않은 유대인들이 이곳에서 3년 이상 항거하다가 최후의 한 사람까지 모두 장엄하게 자결했습니다. 오늘날 이스라엘 군인들은 임관할 때 바로 이 마사다 위에서 애국의 결의를 다짐합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실패만큼 좋은 교훈도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 인생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단 한 번도 실패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성공만을 기억하는 사람은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작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한 번의 실패가 아니라 똑같은 실패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실패를 잊으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하지만 뼈아팠던 실패일수록 이를 정직하게 기억하고 크게 기념할 줄 아는 개인과 민족은 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탈무드에 이런 수수께끼가 쓰여 있습니다. "인간의 눈은 흰 부분과 검은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어째서 하나님은 검은 부분을 통해서만 사물을 볼 수 있게 만드셨을까?" 답은 이것입니다. "인생은 어두운 곳을 통해 밝은 것을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어두운 곳, 즉 고난과 실패를 통해서 밝은 것, 즉 희망을 보는 방법을 체득한 것 같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의 시간관념은 혁명적입니다. 우리가 보통 '하루'라고 할 때 아침부터 밤까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그것은 정반대입니다. 유대인들의 '하루'는 해가 진 이후부터 시작됩니다. 유대인들의 성서인 히브리 성서, 즉 우리의 구약성서에서 엄격히 지키라고 한 안식일도 금요일에 해가 질 때부터 시작하여 토요일에 해가 지기 전 끝납니다. 탈무드에서 랍비들은 어떻게 하루가 일몰부터 시작하는가를 놓고 논쟁이 벌어집니다. 그들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밝아져서 시작되고 어두워져서 끝나는 하루보다, 어두워진 후에 시작되어 밝아진 후에 끝나는 하루가 더 좋다."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지 않을까요. 어두워져 끝나는 하루하루가 아니라 밝게 끝나는 하루하루여야 하지 않을까요.

유대인들의 시간관념이 혁명적인 것은 그들이 생명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안식일' 안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에 시작하여 토요일 해지기 직전까지 만 하루 계속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이 시간이 휴일입니다. 유대인이라면 이 24시간 중에 일한다는 것은 유대교 계율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 24시간 중에는 사업 이야기를 해도 안 되며, 또 일에 대해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금요일 해가 지기 직전에 미리 만든 요리를 불에 피운 난로 위에 얹어 놓습니다. 불을 붙이거나 때는 행위조차 금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가장 괴로운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담뱃불도 붙이면 안 되니까요. 또 이 날에는 교통수단을 이용해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친구 집을 찾아갈 때에는 걸어가야 합니다. 물론 이 철저한 금기사항을 깨뜨리지 않을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예외를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에게 이 날은 '신성한 날'입니다. 진짜 휴일입니다. 안식일이 시작되면 그들은 먼저 목욕을 합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온 가족이 회당(Synagogue)에 갑니다. 집에 돌아오면 식탁 위에 촛불을 켜고 남편은 아내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성경구절을 골라 읽습니다. 그리고 모두 함께 찬송하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런 엄격한 규율과 시간들이 인간이 소외되고 공동체가 파괴되는 현대 사회에서 일종의 대안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업이나 일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인생에 대해, 예술에 대해, 그리고 신에 대해 진지하고 깊은 대화를 나눕니다. 자기 자신을 창조하고, 가족과 벗들 간에 사랑을 돈독히 하며, 문학과 예술과 철학에 대해 깊이 토론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재창조를 위한 진정한 휴식을 종교에 의해 보장받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흔히 휴일이 되어도 일에 관해 고민하는 사람들, 집에까지 일을 싸가지고 와서 그 일에 매달리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또한 심신이 망가질 정도로 정력적으로 노는 사람들도 많이 봅니다. 모두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인지 유대인 가운데 알코올 중독자나 가정불화 혹은 노이로제 환자가 극히 드물다고 합니다. 바로 안식일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쉬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을 풍요롭고 값지게 만드는 멋진 기술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가운데 위대한 문학가와 예술가와 철학자가 유독 많이 나오는 이유는 바로 이 안식일, 즉 '쉼의 제도'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탈무드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쉬는 방식에 따라 변한다." 여러분은 일주일에 하루를 어떻게 쉬고 계십니까?

오늘날 시장 이데올로기는 우리를 끝없이 쉬지 못하게 하고 만족을 모르게 하며 끝없이 추구하게 만듭니다. 극심한 경쟁은 쉼 없이 이어지고 결국 제어가 불가능한 지경에까지 이릅니다. 이런 모습은 도무지 만족을 모른 채 생산을 독려하던 파라오의 명령을 닮았습니다. 원래 안식일 계명은 출애굽 내러티브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쉬시는 하나님은 노예들을 해방시켜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은 이집트의 노동 시스템과 그런 시스템을 정당화시키는 이집트의 여러 잡신들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집트의 잡신들의 공통점은 이들이 모두 '빼앗아 가는 신'이라는 점입니다. '끊임없이 생산을 요구하며 만족을 모르는 신'이라는 점입니다. 이런 신들은 거대한 재물을 쌓아놓을 저장시설을 필요로 했고 바로 그 시설들을 짓기 위해 히브리 노예들에게 끊임없이 벽돌 생산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쉼이라곤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피로한 시스템 속으로,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이 뚫고 들어오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벽돌이라는 생산품이 아니라 정의와 생명의 새로운 언약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하나님이 베푸시는 안식일의 쉼은 무한 경쟁이 난무하는 현대의 상황에서도 일종의 저항이요 대안입니다. 오늘날 안식일이 우리 문명에 대한 저항일 수 있는 이유는, 안식일이 생산과 소비에 우리 삶의 본질이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깨우쳐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녹초로 만드는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향해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태 11:28-30). 여기서 '멍에'는 종종 제국이 매기는 세금을 가리켰습니다. '멍에'는 또한 지나치게 율법에 매여 무한 충성을 강요하던 종교 시스템을 가리키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로마제국이 물리는 무거운 세금이나 지나치게 율법에 매인 종교를 염두에 두시고 그 대안을 우리에게 이렇게 제시하셨습니다. "내게로 와서 쉬라!"

교우 여러분, '엿새 일하고 하루 쉬기'는 하나님 자신의 리듬입니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분의 리듬이 우리 몸에 배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일주일에 하루를 구별하여 그 날을 충실히 지키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단순히 율법적인 강요가 아닙니다. 예수님도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은 단순히 '지키는'(keep) 것이 아니라 '축하하고 기념하는'(celebrate)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 안에서 거룩한 시간을 우리가 기쁨으로 선별하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실로 평범한 것들 속에서 신성함을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우리에게 주어진 지침은 간단합니다. 쉬고, 멈추고, 기념하고, 기억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은 의무로 해야 하는 모든 것들을 멈추십시오. 오늘은 쉬고, 멈추고, 기념하고, 기억하고, 즐거워하는 날입니다. 생명이 충만한 이 안식이 우리의 삶은 풍요롭게 해줄 것입니다.

유대인들 가운데 출중한 사상가들이 많이 나오는 이유는 또한 그들의 교육에 대한 남다른 이해 때문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무엇보다 '배움'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나이를 먹었으니까 이젠 배울 것이 없다는 말은 유대인들에게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들은 살아있는 한 배웁니다. (교우 여러분도 우리교회 성경공부에 많이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유대인 아이들은 어릴 때 꼭 이런 질문을 부모에게서 받습니다. '만일 우리 집에 불이 나면, 너는 맨 먼저 무엇을 가지고 도망갈래?' 아이들은 당연히 무언가 자기에게 귀한 '물건'들을 가지고 나가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부모가 다시 묻습니다. '아니 그런 것 말고, 형태도 빛깔도 냄새도 없는 거 말이야.' 그래도 대답을 못하면 비로소 부모가 답을 줍니다. '얘야, 가지고 나갈 것은 돈이나 보석이 아니라 지성이란다.' 유대인들은 절대로 책을 침대의 다리 쪽에 두지 않습니다. 반드시 머리 쪽에 둡니다. 지성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유대인들은 어릴 때부터 권위를 믿지 않고 그것을 의심하도록 교육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권위를 의심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힘입니다. 아이슈타인을 비롯하여 세계 지성사를 바꾼 수많은 석학들이 유대인들에게서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어릴 때부터 권위를 의심하도록 교육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단지 배우기만 하는 것을 찬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배우는 것의 목적은 통찰력을 키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식을 아무리 많이 쌓아도 지혜가 없는 사람은 '많은 책을 등에 지고 가는 당나귀'라고 비유합니다. 때문에 그들은 질문을 하게 만듭니다. 항상 의심하고 질문하게 만듭니다. 의심이 곧 지혜와 지성의 입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존의 권위를 의심하고 질문하는 유대인들은 하나님 앞에서도 당당히 주체로 섭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계약의 민족'이라 생각합니다. 그들은 이집트의 파라오 시스템에서 탈출하여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새 삶의 '계약'(covenant)을 맺었습니다. 인간이 감히 신과 계약을 맺은 것입니다. 계약이란 게 무엇입니까? 어떤 일에 대하여 지켜야 할 의무를 미리 정해 놓고 서로 어기지 않을 것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약은 상호적입니다. 상호주체적입니다. 놀랍게도 유대인들의 사고방식 안에서 사람은 신을 따라야 함과 동시에 신에 대하여 독립된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계약을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계약사상이 우리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매우 약한 것 같습니다. 그 한 예가 기도에 관한 생각입니다.

히브리어로 기도는 '팔랄'인데 이것을 영어의 "pray"와 같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영어의 "pray"는 '신에게 빌다' 혹은 '신에게 청하다'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팔랄'은 '자신을 평가하다' 또는 '자신을 측정하다'는 뜻입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지 자신을 돌아보고, 평가하고, 측정하는 것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탈무드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신에게 기도해서는 안 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에게 기도할 때 무엇을 부탁하거나 빌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이 갈망하는 것을 신에게 말했다고 그것이 기도가 아니다. 그것은 에고이즘[즉 자기중심주의]에 신이라는 이름의 향수를 뿌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교우 여러분,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닥친 문제부터 해결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면 우리는 맨 마지막에 기도해야 할 것부터 시작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자비로우심을 기억할 때 우리의 문젯거리는 원래의 크기로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유대인들은 야곱을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생각합니다. 야곱이 바로 하나님에게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얻은 사람이 아닙니까? 그가 얍복강 강가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하나님과 겨루었습니다. 복을 주기 전까지는 자신을 떠나지 못한다고 주의 천사를 끝까지 물고 늘어지다가 허벅지 관절이 부러지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끈질기게 달라붙는 야곱에 주의 천사가 두 손을 다 들고 무어라 말했습니까?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창세기 32:28). 그래서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 즉 '엘을 이겼다,' '하나님을 이겼다'가 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 의지하려고 하는 것은 좋은 믿음이고 훌륭한 신앙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하나님과 겨루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게 의존적이지 않고 주체적이었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신과 인간이 주체 대 주체로 계약을 맺은 것입니다. 신의 뜻에 순종하면서도 신 앞에 당당한 이들의 자세야말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유대인들이 생명을 잇게 만들어준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작은 역경과 시련에 처해도 곧 좌절해 버립니다. 빚을 많이 졌다고, 시험에 실패했다고, 직장에서 쫓겨났다고 좌절합니다. 스스로 생명을 끊는 사람이 너무도 많습니다. 최근에는 명절 끝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다고 하지요. 하지만 유대인들에게 이런 정도의 역경은 역경이라 부를 가치조차 없는 것들입니다. 그들은 아우슈비츠와 같은 가혹한 시련과 역사 속에서도 희망의 원리를 터득해 살아왔습니다. 고난과 시련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괴로울 때도 웃음을 만들어 냅니다. 패배를 기억하고 수치를 기념합니다. 절망과 싸우기보다 희망의 등불을 키워나갑니다. 밝게 끝나는 하루하루를 만듭니다. 철저히, 제대로 안식합니다. 의심하고 권위에 도전하며 지혜와 통찰력을 키웁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계약의 주체로 당당히 섭니다.

물론 오늘날의 유대인들을 미화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들의 지나친 선민의식과 미국사회의 기득권을 장악하고 보여주고 있는 폐쇄성, 그리고 지금 이스라엘 정부가 팔레스타인 땅에서 펼치고 있는 폭력적이고 비평화적인 정책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고난과 역경을 거치며 유대인들이 터득해 낸 희망의 원리 중에서 배울 것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봉독한 시편 말씀에 "여호와는 고난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 것이라 약속합니다(시편 140:12-13).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자비의 아버지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라 이야기하면서 그 분은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친다"(고린도후서 1:3-6)고 증언합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저 멀리 우주 밖에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며 시험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저 아우슈비츠의 교수대 위에서 그리고 오늘 우리 하나하나의 고난의 삶의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고난당하시는 분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이사야 53:5). 이런 고난의 주께서 우리의 시련과 아픔에 위로가 되십니다.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이 겪으신 고난을 기억하며 그 고난에 동참하는 거룩한 사순절 기간에, 우리의 고난을 기억하시고 우리의 고난에 동참하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위로가 여러분과 늘 함께 하시길 빕니다. (2018.2.18.)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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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무종교인들의 증가는 기성 종교에 또 다른 도전"

최근에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무종교인의 성격을 규명하는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정재영 박사(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종교와 사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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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섭리 숨어있는 『반지의 제왕』, 현대의 종교적 현실과 닮아"

『반지의 제왕』의 작가 톨킨의 섭리와 『반지의 제왕』을 연구한 논문이 발표돼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숭실대 권연경 교수(성서학)는 「신학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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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소개] 탈존적 주체, 유목적 주체, 포스트휴먼 주체

이관표 박사의 논문 "미래 시대 새로운 주체 이해의 모색"은 세 명의 현대 및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의 주체 이해를 소개한다. 마르틴 하이데거, 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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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쇠퇴하고 신학생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고 필요하다"

한신대 김경재 명예교수의 신학 여정을 다룬 '한신인터뷰'가 15일 공개됐습니다. 한신인터뷰 플러스(Hanshin-In-Terview +)는 한신과 기장 각 분야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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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과 선에 쏠려 있는 개신교 전통에서 미(美)는 간과돼"

「기독교사상」 최신호의 '이달의 추천글'에 신사빈 박사(이화여대)의 글이 소개돼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어와 리쾨르를 거쳐 찾아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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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봉사를 개교회 성장 도구로 삼아온 경우 많았다"

이승열 목사가 「기독교사상」 최근호(3월)에 기고한 '사회복지선교와 디아코니아'란 제목의 글에서 대부분의 교단 총회 직영 신학대학교의 교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