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명기 4:10-12, 빌립보서 2:5-11, 누가복음 20:41-44 -
세계적인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가 지난 14일 타계했습니다. 21살 나이에 루게릭병으로 "길어야 2년"이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지만, 55년을 더 살면서 평생 별과 우주를 연구했습니다. 6년 전에 열렸던 런던 패럴림픽 개막식에서 그는 "당신의 발을 내려다보지 말고 고개를 들어 별을 보라"는 인상적인 말을 남겼지요. 평생 별과 우주를 연구한 그가 남긴 말 가운데 어쩌면 가장 멋진 말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 아니라면 우주도 별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표현인 듯 싶습니다. 사실 그가 타계한 3월 14일은 또 다른 천재 물리학자가 태어난 날이기도 했습니다. 1879년 3월 14일은 앨버트 아인슈타인의 탄생일입니다. 연도는 다르지만 같은 날 한 사람은 오고 다른 사람은 떠났습니다.
호킹 박사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빅뱅이론의 창시자가 오니까 일본의 유명 기자들이 다 몰려왔습니다.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박사님, 우주에는 우리 인간과 같은 고등동물이 존재하는 행성이 몇 개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호킹 박사는 주저 없이 약 1,011개의 행성이 존재할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우주에는 지구가 속해 있는 태양계와 같은 것이 약 1,011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기자들은 매우 놀라는 표정이었고 곧 다시 물었습니다. "박사님, 그러면 우리는 왜 지금까지 외계인과 한 번도 접촉하지 못했다는 말입니까?" 이 질문은 우리와 문명적 수준이 비슷한 행성도 있겠고, 더 원시적인 행성도 있겠지만, 우리보다 월등한 문명을 가진 행성도 있을 것이 아니냐는 의도의 질문이었습니다. 호킹 박사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하나의 행성에서 문명이 고도로 발달해 다른 행성으로의 운반수단이 가능할 때쯤이면 그 행성은 그 문명 내부 문제로 스스로 파괴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의 도도한 문명 비판 앞에 기자들은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지난 1992년부터 미항공우주국(NASA)은 SETI(Search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외계 지적 생명체 탐사' 사업입니다. 세계 도처에 거대한 전파 망원경을 설치해놓고 저 드넓은 우주 안에 우리와 비슷한, 혹은 우리보다 월등한 지능을 가진 외계 문명이 존재하는지를 탐색하는 프로그램입니다.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고 우주로부터 외계의 지성체가 보내올지도 모르는 무선신호를 탐지하기 위해 몰두하고 있습니다. 지금 인류의 문명은, 호킹 박사의 말대로, 자신의 문명을 외계에 전달할 수준까지 발달한 것입니다. 하지만 안으로는 자기 스스로를 몇 번이고 멸망시킬 내적 문제를 가득 안고 있었습니다.
지나간 20세기는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눈부신 '과학문명의 세기'였습니다. 그런데 과거 20세기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폭력적인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인류학자들의 추산에 의하면 기원전 3천 년부터 19세기까지, 그러니까 고대문명이 시작되어 약 5천년이 흐르는 동안 인류가 전쟁으로 죽인 숫자는 약 3천 만 명입니다. 그런데 지난 20세기 단 1백 년 동안 인류는 전쟁으로 약 1억 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핵탄두의 숫자는 약 2만 6천 개입니다. 72억 인류와 지구 상 모든 생명체를 몇 차례 전멸시키고도 남는 숫자입니다. 우리는 멀리 우주에서 오는 외계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 내부에서 비롯되는 핵전쟁이나 지구온난화 그리고 유전자 조작 등으로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끝장낼 수도 있습니다. 위기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과학소설 작가 로베르토 바카(Roberto Vacca)의 책 『도래하는 암흑시대』(The Coming Dark Age, 1973)는 오늘 우리의 문명을 예리하게 비판하는 책입니다. "현대 기술이 붕괴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What will happen when modern technology breaks down)라는 부제대로 이 책은 오늘날의 거대 기술사회가 그 안에 품고 있는 위기에 대해 잘 다루고 있습니다. 작가는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로 현대 과학기술문명의 위기를 압축적으로 표현합니다. 어느 날 폭설로 도로와 철도가 마비됩니다. 임무 교대가 지연되자 피곤과 스트레스에 지친 관제탑 요원의 실수로 두 대의 점보 비행기가 정면충돌합니다. 비행기의 잔해가 고압선 위로 추락하자 도시 전체가 정전이 됩니다. 한 겨울 추위에 시달리다 못한 사람들이 곳곳에서 불을 피웠는데 이것이 대화재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쏟아져 나온 차들로 소방차가 통과할 길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안부전화가 폭주하자 곧 전화는 완전 불통상태에 빠집니다. 생계대책이 없어진 부랑자들이 곳곳에서 슈퍼마켓을 약탈하기 시작하자 도시는 내란 상태에 빠집니다. 경찰과 군부도 신속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정치인들도 우왕좌왕하는 사이,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무장하여 곳곳에서 약탈과 살육이 벌어집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무수히 죽어간 시신들로 전염병까지 창궐합니다. 하지만 병원의 기능은 마비된 지 이미 오래입니다. 사법체계도 무용지물이 되어버렸습니다. 부유층은 급기야 민병대를 조직해 자신의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몸부림칩니다. 이제 약탈과 인간사냥이 생존의 기본조건이 되었습니다. 통제 불능, 시스템 붕괴! 이 상태로 인류는 종말을 맞이합니다.
바카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사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 엄청난 재앙이 어떤 외부 침입자의 의도나 악당의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반 사람들의 평범한 반응들로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단지 추워서 불을 피웠을 뿐입니다. 가족의 안부가 걱정돼 전화를 걸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 지극히 평범한 반응들에 의해 최악의 사태가 빚어졌습니다. 199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는 이를 "파괴를 초래하는 인간의 광기"라 불렀습니다. 인간의 근원적 불안을 그린 작품들을 계속 발표하며 전후 일본문학을 이끌어온 오에 겐자부로 역시 아무렇지도 않은 행동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우리 인간의 일상 그 자체가 인류의 파괴를 초래하는 광기의 근원지가 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사실 바카의 시나리오가 고발하고 있는 것은 우리 모두의 평범한 자기중심성입니다. 모두가 자기를 위해 행한 지극히 평범한 행동들이 공멸의 주범이었다는 것입니다. 위기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일상 안에 내재해 있습니다. 종말의 시간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종말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종말의 시간 한가운데를 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일입니다. 예루살렘 입성하시기 전의 일입니다. 제자들 중 둘을 맞은 편 마을로 보내시며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마가 11:2, 누가 19:30)를 끌고 오라 하십니다. 그냥 "나귀 새끼"(마태 21:2) 혹은 "어린 나귀"(요한 12:14)라고 표현한 마태나 요한과 달리 마가와 누가는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임을 강조합니다. 그만큼 더 어리고 연약한 나귀 새끼임을 이야기합니다. 만일 누가 '왜 이렇게 하느냐'고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마가 11:3, 마태 21:3, 누가 19:31)고 말하라 하십니다. 아마도 주님을 아는 어느 집에 미리 준비를 시키신 것 같습니다. 마태와 요한은 이 일이 구약의 선지자를 통해 예언한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 함이라고 설명합니다. 그 예언이 오늘의 교독문에서 읽은 스가랴서 9:9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신약성서에서 예수님이 구원자로 오심을 언급할 때마다 구약성서를 인용하는데 그 인용된 빈도에 있어서 이사야서 다음으로 높은 책이 스가랴서입니다. 스가랴는 1차 바벨론 포로 귀환자입니다. 바벨론의 노예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귀환자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반대세력의 방해로 중단되었습니다. 그 와중에서 스가랴가 기뻐하고 환호성을 지르라고 명령합니다. 왜냐하면 왕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새로 오시는 이 왕은 이상한 왕입니다. 다른 왕들과는 달리 이 왕은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곧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십니다. 우리는 보통 왕의 귀환 하면 멋진 백마를 타고 보무당당하게 호위무사를 거느리고 오는 왕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우리를 구원하실 공의로운 왕은 겸손하셔서 보잘 것 없는 나귀, 그것도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신다는 겁니다. 도무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왕의 귀환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왕이 오시면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이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어" 온 세상에 참 평화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스가랴가 예언합니다.
사람들은 영웅을 기다립니다. 영웅의 시대를 갈망합니다. 시대가 어려울수록 절대적인 영웅에 대한 갈망은 더욱 커집니다. 그러한 대중의 심리에 편승해 갖가지 이름의 영웅들이 출현합니다. 언젠가 유네스코 본부는 전 세계 23개국 12살 어린이 5천 명을 대상으로 오늘날 지구촌 어린이들이 국경과 인종 그리고 언어를 넘어 가장 숭배하는 영웅이 누구인지 조사해본 적이 있습니다. 조사대상자 어린이 5천 명 중 88%가 '터미네이터'를 가장 숭배한다고 답했습니다. "Terminator," 글자 그대로 '끝장내는 사람'입니다. 영어가 서툰, 근육질의 독일계 미국인 아놀드 슈워제네거(Arnold Schwarzenegger)가 연기했습니다. 여러 번 죽어도 불사조처럼 다시 살아나 악당을 한 방에 끝내버리는 터미네이터가 우리 지구촌 어린이들의 영웅입니다. 할리우드 영화의 영향력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정신과 의사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 1897-1957)가 쓴 『파시즘의 대중심리』라는 책이 있습니다. 1933년에 출간돼 전 세계 26개국 언어로 번역된 책인데, 히틀러의 나치즘이 독일에서 성공을 거둔 과정을 추적하며 대중의 도착적인 욕망을 파헤친 고전입니다. 그는 '왜 대중이 파시즘을 열망하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대중의 억눌린 욕망과 그것을 대리 표출시켜주는 독재자의 통치술 사이의 깊은 상관관계에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그는 이 책 때문에 이듬해 국제정신분석학회에서 축출되었고, 바로 그해 독일은 히틀러에 의해 장악됐습니다. 이 책의 요지는 파시즘이 결코 어떤 악마적 인간 한 사람의 탄생에 그 원인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파시즘이 역사에 등장하기 위해서는 절대적 영웅의 출현을 간절히 원하는 수많은 '우리,' 즉 그 독재자의 공범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공범이 바로 대중입니다. 대중이 어떤 무리입니까? 어느 학자의 말대로, 대중의 특징은 "남이 하는 대로 따라하는 것"(just like everybody)입니다. 최윤의 소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1992)의 서두에 나오는 것처럼, 대중은 "익명의 인파 속에 익사하는 것을 좋아"하고, 자신의 "고유한 이름을 불편해" 하며, 자신의 욕구와 "익명의 인파가 좇는 욕구가 조금이라도 마찰을 일으키는 것을 두려워"하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대중이 영웅을 갈망합니다. 영웅의 시대를 기다립니다. 시대가 어려울수록 강력한 왕의 귀환을 소망합니다. 하지만 성서는 이런 영웅에의 갈망에 종지부를 찍습니다.
구약성서의 다섯 번째 책인 신명기는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40년 간 광야에서 긴 방황생활을 하다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진입하기 직전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영웅 모세의 영도 아래 출애굽의 대장정을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드디어 꿈에 그리던 새 세상이 눈앞에 다가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생을 다 끝나고 이제 막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선고를 내리십니다. '모세, 너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 모세는 이렇게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었습니다.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신 3:25). 하지만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모세가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이며 그 아름다운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라고 명시하신 것입니다(신 4:21). 그 대신 하나님은 여호수아 세대에게 '다시' 법을 내려주십니다. 그것이 '신명기'(申命記)라는 책입니다. 신명기의 '신'자는 한자로 새 신(新)자가 아니라 '거듭하다,' 혹은 '되풀이하다'는 뜻의 신(申)자입니다. 신명기는 이전에 주신 법과 다른 새로운 법이 아니라 이미 주신 같은 법을 '다시'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영어로도 신명기가 "Deuteronomy"인데 이는 "deutero," 즉 '두 번째' 혹은 '다시'에 "nomos," 즉 '법'을 합한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렇게 이스라엘에게 다시 법을 주실 때 하나님의 '소리'는 있으나 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는 구절입니다. 바로 오늘 읽은 신명기 4:12입니다. "여호와께서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되 음성뿐이므로 너희가 그 말소리만 듣고 형상은 보지 못하였느니라." 다시 주시는 법은 청각으로는 지각할 수 있으나 시각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첫 번째 계명이 떨어집니다. "여호와께서 호렙 산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그리하여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해 어떤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지 말라"(신 4:15-16). 새 세대에게 다시 주시는 계명에서 하나님이 가장 먼저 강조하신 것은 우상숭배 금지입니다. "남자의 형상이든지, 여자의 형상이든지, 땅 위에 있는 어떤 짐승의 형상이든지, 하늘을 나는 날개 가진 어떤 새의 형상이든지, 땅 위에 기는 어떤 곤충의 형상이든지,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어족의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신 4:16b-18)였습니다. "또 그리하여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해와 달과 별들, 하늘 위의 모든 천체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배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기지 말라"(신 4:19)였습니다. '영웅 이후의 시대' 여호수아 세대에게 다시 주시는 계명의 가장 첫 번째 것은 바로 '영웅 금지령'이었던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라는 이름이 '여호수아'와 같은 이름이라는 것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사실 예수라는 그 이름 자체가 모세라는 걸출한 영웅 이후의 시대를 웅변적으로 상징하는 이름입니다. 예수, 즉 히브리어로 예슈아(יֵשׁוּעַ)라는 이름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는 뜻의 여호수아와 같은 이름입니다. 이 예슈아의 그리스어 표기가 바로 '이에수스'(Ἰησοῦς)입니다. 마태는 이 이름의 뜻이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1:21)라고 일러주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이 구원자가 "유대인의 왕"(마태 2:2)임을 알았습니다. 바로 이 왕이 다른 왕들과는 달리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스가랴 9:9)를 타고 오신다는 스가랴의 예언을 이제 예수님 자신이 보여주시려 하십니다. 그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 예수님은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마가 11:2, 누가 19:30 - 혹은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마태 21:5] 혹은 "한 어린 나귀"[요한 12:14])를 타고 초라한 모습으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개선하는 왕처럼 행진하시지만 주님은 모습은 사실 우스워 보입니다.
종려주일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의 귀에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열광적으로 환영하던 군중들의 '호산나'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제자들은 나귀 새끼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었고, 예수님이 그 위에 타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거나 들에서 벤 나뭇가지(마가 11:8) 혹은 종려나무 가지(요한 12:13)를 길에 펴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태 21:9)라고 외칩니다. (마가는 "다윗의 자손이여" 대신에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11:10], 누가는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19:3], 요한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12:13]라고 합니다.) 어떤 분들의 귀에는 할리우드의 뮤지컬 에 나오는 유명한 노래 '호산나'(Hosanna)가 맴돌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스가랴의 예언을 따라 겸손히 나귀 새끼를 타심으로 자신이 대중이 갈망하는 그런 '영웅'이 아님을 보여주신 예수님은 자신을 향해 군중이 외쳤던 '다윗의 자손'이라는, 또 다른 영웅에의 기대에도 찬물을 끼얹으십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에서 우리가 읽은 대로 예수님은 후에 바리새인 혹은 서기관들과 논쟁하시면서, 어찌하여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있느냐, 다윗이 친히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며 그리스도를 다윗과 같은 영웅적 메시아와 동일시하는 기대에 일침을 가하십니다(마가 12:35-37, 마태 22:41-46, 누가 20:41-44).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주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할 때에도 아무에게도 이를 말하지 말라 경고하셨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영광이 아니라 고난을 받으셔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 베드로가 이에 강력히 항변하자 그를 사탄이라고까지 질타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가 8:27-34). 대신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 10:45, 마태 20:28)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회개하여 주님을 "따르고 섬기는"(follow and serve) 새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임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걸출한 영웅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서로 사랑하며 섬김의 삶을 살 때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호산나를 외치던 무리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다윗이라는 과거 영웅의 향수에 젖어 그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통치를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영웅의 계보를 거부하셨습니다. 단호히 거부하셨습니다. 자신을 영웅으로 만들려는 모든 노력을 질타하셨습니다. 오늘 읽은 빌립보서의 말씀처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빌 2:5-8). 그런데 신비로운 것은,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은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빌 2:9-11)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왕 중 왕'인 것은 그가 이 세상의 모든 왕들보다 더 큰 권세를 쥐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 왕들의 통치방식을 뒤집는 완전히 다른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갑 없는 은혜'입니다. 갑, 을, 병, 정 할 때의 '갑' 없는 은혜입니다. 인쇄소가 오타인 줄 알고 '값'없는 은혜로 바꾸는 바람에 주보를 다시 인쇄해야 했습니다. 우리 주님이 값없이 주시는 이 무상의 은혜는 소위 '갑질'하지 않으시는 은혜입니다. 군림하고, 억압하고, 무시하고, 생색내고, 대접받으려는 그런 값싼 은혜, 거짓 은혜가 아닙니다. 요즘 한국사회에 "Mee Too" 운동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대다수 성폭력의 본질도 '힘의 차이와 기울어진 권력구조에 의한 폭력'입니다. 주님은 이 자체를 거부하셨습니다. 그 힘의 차이와 기울어진 권력구조가 인간 세상 모든 폭력의 근원임을 보셨기에 주님은 자신의 권력과 힘을 먼저 내려놓으셨습니다. 온 세상을 지으시고 운행하시는 주권자가 자신을 스스로 낮추고, 비우고, 버리셨습니다. 영웅이기를 거부하시고 대신 우리 하나하나를 하나님의 나라의 주체로 세워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뒤뚱거리는 어린 나귀 위에 미안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앉아계신 그 분은 모습은 이 세상의 모든 갑질을 끊어버리는 하나님의 겸손을 상징하는 모습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06년 전 1912년 4월 14일 밤 11시 50분, 타이타닉(Titanic)호가 빙산과 충돌해 1,120명이 차가운 바다에 빠져죽었습니다. 벨파스트 항구를 출발할 때 일어난 불길한 석탄창고 화재도 은폐하고 출항했던 배, 빙산과 충돌하기 직전 적어도 6번 이상의 위험경고를 받고도 최고 속도를 고집했던 배, 2,200명의 승객을 태우고도 그것의 절반밖에 안 되는 1,178명분의 구명보트만 실었던 배, 그나마 훈련이 안된 선원들이 그 구명보트 정원의 절반도 채우지 않고 사람을 내려 겨우 705명밖에 구조하지 못했던 배가 타이타닉이었습니다. 그런데 혹 바로 이 배가 지금 우리 인류가 타고 있는 배는 아니겠습니까! 그리스 신화에서 하늘의 신이라는 우라노스(Uranus)와 지구의 여신이라는 가이아(Gaia) 사이에 태어난 괴력의 신 타이타닉(Titanic)의 이름을 딴 배, 그래서 '결코 가라앉지 않는 배'라고 자부하다가 얼음장 같은 북대서양 바다 속으로 침몰한 배, 그 배가 우리가 자랑하는 문명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강철로 만들어진 이 배가 결코 가라앉지 않을 것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타이타닉이라는 배의 강철 두께는 10센티미터에 불과했습니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두께는 겨우 10센티미터였습니다. 수천 미터의 깊은 바다 얼음장 같은 물로부터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는 강판의 두께는 겨우 10센티미터였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위기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 안에, 우리의 평범한 삶 안에 위기가 있습니다. 종말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종말의 시간 한가운데를 살고 있습니다. 스티븐 호킹 박사는 "당신의 발을 내려다보지 말고 고개를 들어 별을 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동시에 발아래 우리의 삶의 터전을 내려다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문명이 서 있는 허약한 토대를 직시해야 합니다. 우리의 일상 안에 내재돼 있는 위기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저 멀리 낯선 외계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가장 낮고 천한 삶의 자리에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 겸손한 우리의 구원자를 맞이해야 합니다. 군중 속에 파묻혀 호산나를 열광하지 말고, 볼품없이 초라하게 우리의 평범한 삶 안으로 찾아오시는 그 예수님을 맞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과 함께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그를 따라가야 합니다. 거기서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그와 함께 영광스럽게 다시 부활해야 합니다. 고난주일과 부활주일을 앞두고 있습니다. 겸손하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신비에 참여하는 복된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018.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