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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트만] 당신은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나이다 (2)

삶을 위한 신학-신학을 위한 삶 / 2009년 5월 방한 강연

다음은 위르겐 몰트만 박사가 방한 중 서울신대, 한신대, 연세대 등에서 공개 강연한 발제문이다. 몰트만 박사의 허락을 받아 강의 내용 전문을 싣는다. 

2

하나님의 삼중적 도래

▲ 튀빙엔 대학 위르겐 몰트만 교수
그리스도교의 신약성서만이 아니라 유대교의 구약성서도 이미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오신다는 것, 인류에게 그리고 이 땅에 하나님이 오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그 하나님의 도래를 지향하고 있다. 약속의 땅에서 멀리 떨어진 이방에서 살면서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느낌이었을 때 그 백성은 탄식의 노래로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주님 일어나소서. 주님의 얼굴을 드시고 오소서!"(시24:7) 그 백성이 오시는 하나님의 충만한 현존을 경험하면 그분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그 분의 아름다움을 칭송한다.

이스라엘과 교회가 이 세상 속에서 희망의 공동체인 것처럼, 구약과 신약성서는 하나님에 대한 희망의 증인으로 나란히 서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래 속에서 살고 있다.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고, 희망은 우리가 깨어 일어나도록 하고, 앞으로 도래할 것에 우리의 모든 감각을 일깨워준다. 이제 나는 그리스도의 삼중 재림에 대한 옛 교리를 빌어, 지금까지 내 삶의 경험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분은 육체 가운데 오셨고 영으로 오시며 영광 가운데 오실 것이다.

1)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오셨다

그리스도교의 미래에 대한 희망은 확고한 역사적 기억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하나님에 대한 생생한 기억이다. 그분은 이로써 우리의 생명을 그분 자신의 생명으로 만드시고, 피로 물든 이 땅을 희망의 땅으로 바꾸신다. 바로 이것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희망은 오늘날 미래에 대한 인간의 모든 꿈 혹은 미래에 대한 온갖 두려움과 다르다. 하지만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도대체 누구인가?

나는 그리스도론의 교리를 전개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전쟁과 포로생활 시절 내가 하나님을 찾아 헤맸으나 아무런 답도 발견하지 못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는 내게 가까이 오셨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이르렀다. 그리스도가 없었더라면 무신론자가 되었을 거라고 해도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인간의 역사에 대한 경험과 자연에 대한 관찰만을 가지고는 그 시절의 내가 결코 하나님이 계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나는 그리스도께서 그렇게도 친근하게 아마, "사랑의 아버지"라고 불렀던 그 하나님,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신 나라의 주인이신 그 하나님, 바로 그리스도의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다. 나는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의 친밀함과 하나님 나라의 광대함을 느낀다.

내가 만난 그리스도의 첫 번째 이미지는 하나님에게 시험을 당하고, 붙잡히고, 고문당하고, 로마인의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 그리스도의 이미지였다. 마치 나와 운명을 함께한 친구가 나를 이해하듯, 그분이 나를 이해한다고 느꼈다. 그리스도는 고난의 길을 가셨고, 버림 받은 사람들을 찾으시고 그들의 형제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에게서 버림받는 자리까지 가셨다. 그것이 나에게 개인적으로 깊은 감동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버리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버림받은 상태에 처한 나에게 오셔서 나를 발견하도록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 스스로 아직 해결하지 못한 내 운명 가운데 어떤 것이 그분의 운명 가운데 있음을 발견했고, 내 생명 속에는 그분의 현존이라 할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있음을 발견했다. 그 당시 내 책상 위에 붙여 놓았던 중세기의 그림 하나가 있다. 그것은 지옥에 내려가 거기에 문을 내고 있는 그리스도의 그림이다. 잃어버린 사람 가운데 한 명이 그에게 와서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데 꼭 이렇게 말하려는 것 같다. '당신이 나에게 오신 거군요! 도대체 나는 누구입니까?' 그러면 이 그림 속에서 어떤 움직임이 일어나고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돕는 분, 그리스도는 구원하는 분이다. 하지만 그분은 초능력으로 돕는 것이 아니라 무기력한 처지에 있는 우리와 연대함으로써 도우신다. 예언자 이사야는 이 세상을 구원하실 하나님의 종, 고난 받는 종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분의 상처를 통해 우리의 병이 나았다"(53장) 디트리히 본회퍼는 감옥에서 "오직 고난 당하는 하나님만이 도우실 수 있다"고 썼다. 언제나 하나님은 일단 함께 고난당하심으로 우리를 도우신다. "내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지옥에 있어서 당신은 거기 계십니다."(시139:8) 어떤 고난, 어떤 지옥도 이렇듯 함께 고난을 당하시는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다.

2) 하나님은 영으로 우리에게 오신다

그리스도교의 미래에 대한 희망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 그리고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영을 체험하는 것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기억할 뿐만 아니라, 그리고 하나님의 미래를 기다릴 뿐만 아니라 오늘도 "장차 올 세상의 권능"(히6:5)을 미리 경험하고 있다. 그 권능은 성령의 생명 에너지다.

그런데 '성령'은 어떤 분인가? 나에게 성령은, 그가 만지는 모든 것을 살아 있게 하시는 "생명의 영"(GEIST DES LEBENS)이다.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생기 넘치는 현존이다. 하나님의 영의 은사와 임재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또는 우리의 인간 공동체가, 모든 살아 있는 존재 또 이 땅이경험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하고 놀라운 것이다. 성령 안에는 여러 가지 선한 영, 혹은 악한 영 가운데 가운데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이고 살아계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 영이 계시는 곳에는 하나님도 특별한 방식으로 현존하신다.

일반적인 편재(遍在, Allgegenwart)의 방식이 아니라, 자기 계시의 방식으로 현존하신다. 하나님이 당신을 계시하는 곳에서는 그분이 자기 자신을 직접 나누신다. 그분의 영원한 생명의 창조적인 에너지는 우리의 유한한 생명을 관통하고 채우고 넘치며 우리의 생명을 속에서부터 완전히 소생시키신다. 하나님의 영을 느끼는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한다. 어떻게? 우리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서! 우리는 마음의 새로운 영성이나 머리의 새로운 신학으로 영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감각을 통해서 생명의 새로운 활력인 그 영을 체험한다.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의 생명, 우리 생명 안에 있는 하나님을 우리는 느끼고 맛보고 듣고 냄새 맡고 본다. 그것을 요한1서 1-2절은 이렇게 묘사한다.

"이 생명의 말씀은 태초부터 계신 것이요, 우리가 들은 것이요,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이요, 우리가 지켜본 것이요, 우리가 손으로 만져본 것입니다. 이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원한 생명을 여러분에게 증언하고 선포합니다."

우리가 이 생명을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하기 때문에, 이 생명의 영의 이름도 여러가지다. 나에게 위로자(paraklet)와 생명의 샘(fons vitae)라는 이름이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다.

그리스도와의 사귐 속에서 우리는 이런 신적인 영의 생명력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슬픔에 빠진 사람, 냉담함에 사로잡힌 사람, 자기 안에서 아무런 생명의 기운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그리스도께 나오면 하나님의 영의 새로운 활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나에게는 그 활력은 새로운 생명의 감성(Sinnlichkeit des Lebens), 그리고 넓디넓은 하나님의 생명의 공간(Lebensraum Gottes) 속에 있다.

큰 슬픔 속에서 우리의 감각이 소실되어 아무런 색채도 보이지 않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 맛도 느낄 수 없고, 우리의 육체가 뻣뻣하게 굳어있을 때라도 하나님의 사랑의 숨결 안에서는 우리의 감각이 다시 열려서 다시금 저 화사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고, 아름다운 멜로디를 듣게 되고, 다시금 입맛을 되찾고 감정을 느끼게 된다. 우리의 삶에 대한 큰 긍정이 우리를 사로잡으니, 이는 하나님의 생명의 영이 베푸시는 생명의 긍정이다.

이 새로운 생명의 전개에 필요한 것은 넓은 생명의 공간(Lebensraum)이다. 시편 31편 5절은 '주님께서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나이다'라고 노래한다. 이 넓은 공간은 우리의 유한한 생명을 사면에서 감싸고 있는(시139:5) 무한하신 하나님의 현존이다. 하나님의 신적인 현존이 사면에서 우리를 감싸면 우리는 우리의 유한한 생명을 사방으로 자유롭게 전개해 나갈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며 하나님 안에서 살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을 건낼 수 있는 인격체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마음껏 전개해 나갈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신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하나님의 신비로운 이름 가운데 하나가 바로 마콤(MAKOM), 즉 공간/장소이다. 우리가 사랑과 우정 속에서 서로를 위해 자기를 개방하고 다른 사람이 우리의 삶 속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생명의 공간을 선물하는 셈이다.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 속에서 그런 자유로운 공간이 없다면 개인적인 자유도 존재할 수 없다. 사랑은 자유의 공간을 주며, 그 자유의 시간을 허용해 준다. 그런 자유의 공간을 경험하는 곳에서 우리는 우리 사이에 있는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한다.

3. 하나님은 영광 가운데 우리에게 오신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하나의 위대한 희망으로 만났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은 바울이 로마서 15장 13절에서 말하듯이"희망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도 계실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 '오실' 분이다(계1:4). 그분은 미래로부터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그러므로 그 넒은 미래의 지평은 나중에 그리스도교에 덧붙여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본질적인 요소다. 신앙이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 안에서 사는 것이며 "하늘에서와 마찬가지로 땅으로도" 오시는 그분의 나라를 향해 우리를 활짝여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오심을 대망하면서 산다. 우리는 그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그분의 오심의 빛으로 살아간다. 우리 위에 언약의 별이 빛나고 있다. 하나님의 언약은 새로운 날, 하나님의 날을 알리는 새벽별과 같다. 그리스도교의 시간 느낌을 바울은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롬13:12)

어떤 미래가 하나님의 언약과 우리의 희망과 이 세상의 기대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하나님은 인간의 땅에서 인간과 함께 '살기' 위해서 오신다. 그렇다면 모든 피조물은 그분의 성전이 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이것을, 이 세상을 향해 오는 "하늘 예루살렘"의 이미지로 묘사했다. 하나님의 이 우주적인 쉐키나(Schechina=거주)를 위해서 모든 것이 새롭게 창조되고 준비되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고 고통과 울부짖음은 사라지고, 더 이상 죽음도 없을 것이다.(계21:5) 신적인 것이 모든 현세적인 것 안에 있고, 모든 현세적인 것이 신적인 것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모든 것을 빛나게 한다. 이것이 인류에게 있는 희망의 역사의 완성이며 창조의 완성이다. '태초에' 창조된 모든 것, 하늘과 땅, 및, 생명, 식물과 동물과 인간 모두는 바로 이것을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베드로후서 3장 12절에 의하면 우리는 '주님의 미래가 오기를 기다리며 그것을 앞당겨야 한다.' 이것은 모순처럼 들리지만 결코 모순이 아니다. 이것을 우리의 경험, 우리의 언어로 옮겨보자.

기다림(Warten): 이 말은 불의한 현실에 순응하지 말고, 눈에 보이는 세력을 인정하지 말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보다 나은 어떤 것이 있을 수 있고, 그와는 다른 무엇이 오고 있음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기다림이란 결코 단념하거나 포기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기다릴 수 있음-그것은 희망의 기술(Kunst der Hoffnung)이다. 인내는 흼아의 미덕이다. 기다림이란 성취의 시간이 올 때까지 긴장감 속에서 깨어있는 것이다. 기다릴 수 있음-그것은 "주 우리의 하나님, 이제까지는 주님 말고 다른 권세자들이 우리를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우리가 오직 주님의 이름만을 기억하겠습니다."(사26:13)하고 말했다. 그리고 살아남았다. 루벰알베스(Rubem Alves)가 말했듯이, 포로기의 신학 없이는 해방의 신학도 없을 것이다.

서둘러 앞당김(Eilen): 이것은 지금의 현실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의 미래를 우리의 모든 행동과 노력으로 선취하는 것이다. 의로운 사람의 모든 행동으로 우리는 정의가 거하는 새로운 세상의 길을 예비한다. 폭력 아래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뭔가를 위해 헌신한다면 한 조각 진리가 우리의 세상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우리가 온갖 불의와 폭력으로 이 땅의 많은 보물과 생명력을 탈취하고 있어서 당은 신음하고 있다. 땅도 자기의 권리보장을 기대하고 있다. 우리가 그러한 정의를 선취할 때 "주님의 미래"를 "앞당기며" 그 정의 안에서 "새로운 땅"이 생겨날 것이다.

기다림과 앞당김, 그것은 저항하고 선취하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생명을 거룩하게 하고 하나님의 미래를 확신하게 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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