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특별기고] "변화 지지하는 역사의 힘, 평화 향한 뜨거운 마음 믿어야"

원마루 (브루더호프 공동체)

편집자 주] 글쓴이는 남북정상회담 소식을 영국에서 접하고 현지인들의 반응과 고국의 안녕에 대한 염원을 서광선 본지 회장께 편지글의 형식으로 전하고 있다. 그는 현재 영국 남동부 로버츠브릿지에 있는 브루더호프 공동체에서 아내와 함께 세 아들을 키우며 산다. 옮긴 책으로 『왜 용서해야 하는가』,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 등이 있다.

블루벨
(Photo : ⓒ 원마루 )
▲영국의 봄, 숲에 바다를 이룬 블루벨 꽃들 (브루더호프 공동체 식구가 그린 그림을 사진으로 찍은 것임)

안녕하세요, 서광선 교수님,

영국에는 봄이 한창 물이 올랐습니다. 특히 제가 사는 남동부 지방에는 블루벨이라는 파란색 종 모양의 꽃들이 잣나무들이 즐비한 숲을 파란색 바다로 덮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봄소식은 한반도에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애타게 기다렸던 남북대화가 이뤄졌고, 북미대화도 현실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작년 말까지만 해도 애간장 타는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습니다. 북한의 핵실험과 대륙간 탄도미사일 시험이 잇달아 일어나고, 그에 맞서 미국이 격한 반응을 보일 때마다 저희는 고국에 계신 분들의 안전을 걱정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평화를 위해 기도해야만 했습니다. 너무 애가 탄 나머지 교회 모임에서 한반도를 둘러싼 상황을 알리고 기도를 부탁하기를 거듭했습니다. 한국의 상황을 함께 걱정해 주는 이웃들, 함께 기도하는 교회 식구들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꿈만 같던 남북정상회담이 있던 날은 마치 저희 집에 경사가 난 것처럼 교회 식구들이 축하해주고 함께 기뻐해주었습니다. 시내에 있는 한국 식료품점에 가서 냉면 재료를 구해다가 축하를 하기도 했고요. 모두들 평화의 소식만큼 기쁜 소식이 없다며 덕담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아이들도 함께 한 식사 자리에서는 오늘 한국 식구들이 왜 이렇게 기뻐하는지 설명해 달라는 부탁을 받아 가슴 벅차는 심정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시내에 가서 물건을 사고 열쇠를 복사하러 갔을 때도 제가 한국인임을 아는 분들이 환하게 웃으며 평화의 소식이 들려와서 반갑다며 축하를 해주었습니다.

물론 의심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특히 영국 언론을 보면 남북정상회담에는 상징적 요소가 차고 넘쳤지만 실질적인 합의는 없었다는 진단이 우세합니다. 더 지켜봐야 한다는 거지요. 하지만 제가 아는 한 할아버지는 그런 언론과 학계의 분석이 너무 민숭민숭하다며 꼬집으시더군요. 그런 진단을 내리는 게 안전할지는 몰라도 정치적 대화나 변화의 모색을 지지하고 있는 역사의 힘, 평화를 바라는 많은 이들의 뜨거운 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소극적으로 지켜보는 것보다 평화를 확신하고 계속 기도하며, 매일의 삶에서 적극적으로 평화를 이루자고 할아버지는 저를 독려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일요일(5월 6일), 마을의 어린이들까지 모두 모이는 자리에서 저는 한국의 동화책 하나를 영사기를 통해 그림을 보여주며 읽어주었습니다. 이억배 화백의 『비무장지대에 봄이 오면』이라는 동화책을 영어로 번역해서 읽어준 겁니다. 책에는 비무장지대를 배경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로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그곳에 사는 새들과 고라니, 연어, 점박이물범, 수달, 산양이 분단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유로이 오가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북한이 고향인 한 할아버지가 통일전망대를 때마다 찾아 북녘 땅을 바라보며 한없이 그리워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정겨운 우리네 모습과 익살스러운 동물들의 모습을 보며 제가 읽는 동화를 듣는 사람들은 이따금 탄성을 질렀습니다. 이윽고, 할아버지가 굳게 닫힌 비무장지대의 철문을 활짝 열고 그곳에서 평화롭게 노니는 동물들 사이로 손자와 함께 걸어가서 그토록 보고 싶었던 형제를 만나는 장면에서는 모두 숨을 죽이고 바라봤습니다. 모임이 끝나자 많은 사람이 저희 가족을 찾아와 동화를 잘 들었다며 머지않아 그리운 남과 북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만날 날이 오면 좋겠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선생님, 지금 이 편지를 쓰는 순간 미국의 강경파가 북미 대화에 앞서 북한을 계속 압박하고 있으며 그에 반응해 북한도 불만을 표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가슴을 졸이는 소식이지만, 한편으로는 예상을 했던 상황이지요. 어찌 보면 평화로 향하는 길에 꼭 만나기 마련인 갈등이겠지요. 그때마다 진정한 평화를 바라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생각하며 대화하고, 경청하고, 설득하며 서로 살리는 길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멀리서 한 가족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지만, 만나는 이들과 평화를 이루려고 합니다. 이곳에서 작은 평화를 이루면 그곳의 있는 분들도 힘을 얻겠지요. 선생님도 지금까지 해 오셨던 것처럼 많은 분들에게 진정한 화해와 용서의 길을 보여주시기를 감히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원마루 드림

2018년 5월 8일 어버이날에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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