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성교회 다문화 가정 사역 이방인들 소외시켜"
고양시 일산동구 중산동 하늘마을. 교회 성장은 멈춘지 오래고, 교회들 간 수평이동만 간간히 이뤄지고 있는 요즘 개척교회 무덤이라고 불리는 이곳에 4년 전 한 개척교회가 들어섰다.
교회를 개척한 목회자와 사모는 다문화 가정이다. 한국인 목회자와 일본인 사모는 다문화 가정으로 한국사회에서 살면서 겪은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다문화 가정을 위한 특수 목회를 하고 있었다.
기자가 교회를 찾은 날에도 다문화 가정 교회 구성원들을 돌보는 프로그램이 운영 중이었다. 화이트보드 앞에 선 손범서 목사(49˛에벤에셀교회 담임)는 '的'(적)이라는 글자를 써놓고 해당 표현이 한국어 회화에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다양한 사례를 들어 설명했다.
교회에서 진행되는 한글 교실에 참석한 필리핀 다문화 가정 어머니들은 한개라도 더 배워가겠다는 생각에서인지 평소 궁금했던 부분들이 명쾌하게 해소될 때까지 꼬리를 물며 계속 질문했다. 교회에서 일주일에 두 차례 진행되는 한글 교실은 필리핀반과 베트남반으로 운영되었다. 이날 약 두 시간 남짓 진행된 한글 교실에서 본 다문화 가정 어머니들의 열기는 뜨거웠다.
개척교회 전도는 사모가 전담한다는 말이 있던가? 이들 다문화가정이 교회 예배에 출석하기까지 일본인 사모 하세가와 아끼꼬(49)씨의 뜨거운 눈물과 기도가 있었다. 지자치에서 시행하는 IT 정보대학에서 자격증을 딴 사모는 다문화 가정을 대상으로 일대일 방문 지도를 하는 과정에서 다문화 가정 어머니들을 처음 만났고 교회 구성원으로 인연이 이어지게 되었다.
이들 다문화 가정 어머니들에게 하세가와 아끼꼬씨는 단순히 목회자 사모 이상의 존재다. 그들에게 그녀는 다문화 가정 선배이면서 동시에 한국사회에서 낯선 이방인으로서 겪는 고달픈 삶을 나누고 자문을 구할 수 있는 벗이자 가족 같은 존재였다.
한 두 가정으로 시작된 다문화교회 목회는 지난 4년간 사모의 이 같은 헌신과 기도 속에서 자라면서 40여명 규모의 개척교회로 성장했고 지금은 예배당 뿐만이 아닌 교육관까지 따로 임대해서 목회 활동을 할 정도가 되었다.
"이방인들과의 느슨한 동맹...모호한 정체성 속에 연대 이어져"
백화점 같은 중대형교회들이 버젓히 자리잡고 있는 이 곳, 그래서 목회자들 사이에서는 개척교회 무덤이라고 불리는 이곳에서 동네 구멍가게 같았던 에벤에셀교회는 어떻게 살아 남았고 또 자랄 수 있었을까? 손범서 목사 부부는 지난 4년 동안의 목회 활동을 돌아보면서 "느슨한 동맹"이라는 교회 정체성을 꼽았다.
세겜에서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이방인들과도 동맹을 맺었다는 점을 강조한 손 목사는 기성교회가 자기들끼리의 단단한 동맹을 형성하는 정체성을 고집해 이방인들을 소외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기성교회 다문화 사역이 다문화 가정을 수혜 대상으로만 인식했다고 지적했다. 다문화 가정을 받는 것에 익숙하게 길들였다는 것.
손 목사는 믿음 좋다는 사람들끼리의 이타적 행위로 위장된 기성교회 다문화 가정 사역이 오히려 다문화 가정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비판하며 다문화 가정이 진정한 교회 구성원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자기 희생정신이 담보된 '자기 것을 내어놓는 행위'에 동참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손 목사 부부 목회 철학 때문인지 에벤에셀교회 다문화 가정들은 교회 예배 나 행사 때 빈손으로 오는 법이 없었다. 요리에서부터 외국어 교육까지 각자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자기 것을 내어놓고 나누는 일에 익숙해 있었다. 자기 희생 속에서 더욱 단단한 연대가 이어졌고 가족 밥상 공동체로 자라났다. 느슨한 동맹은 너와 나의 구분이 모호해진 이른 바 '모호한 정체성'을 형성하며 이방인들과 토착민을 공동체의 이름으로 한 데 묶어냈다.
이러한 '모호한 정체성'은 교회 장소에서도 목회자 부부의 라이프스타일에서도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었다. 교회는 예배당이면서 동시에 한글 교실과 식탁교제, 바자회로 쓰이는 장소였다. 또 목회자 부부는 한글 선생이면서 고충 상담가로서 자신들의 '모호한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목회 활동을 지속해왔다. 에벤에셀교회는 말씀 선포가 이뤄지는 예배당 뿐만 아니라 다문화 가정이 안식할 수 있는 보금자리이자 둥지로써 지역사회를 섬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