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롬9:1-5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내 양심이 성령을 힘입어서 이것을 증언하여 줍니다. 나에게는 큰 슬픔이 있고, 내 마음에는 끊임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나는, 육신으로 내 동족인 내 겨레를 위하는 일이면,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내 동족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이 있고, 하나님을 모시는 영광이 있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들이 있고, 율법이 있고, 예배가 있고, 하나님의 약속들이 있습니다. 족장들은 그들의 조상이요, 그리스도도 육신으로는 그들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만물 위에 계시며 영원토록 찬송을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 머물지 않는 사람의 아름다움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벌써 사 십년이 지났습니다만, 민중신학자인 안병무 박사의 수상록([時代와 證言], 한길사, 1978)을 읽다가 功成而不居라는 구절과 만났습니다. 공을 이룬 후에는 머물지 않는다는 뜻으로 노자 제2장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때 이후 그 구절은 제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살면서 제일 힘든 때는 사람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 때입니다. 젊은 날 꽤 열심히 살던 이들이 노년에 이르러 변질되는 모습을 우리는 너무 자주 보았습니다. 변화가 아닌 변질입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다른 것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통해 이루어진 일을 자기의 공적으로 삼았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이 다 하셨다고 말하지만 그들의 내심에는 내가 했다는 강한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내려놓을 줄 모릅니다. 놓아야 할 때 놓지 못하면 추해집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어느 판화가는 바닥에 떨어진 땅콩꼬투리와 줄기에 매달린 것을 위 아래에 배치하고는 제목을 '덜 떨어진 놈'이라고 적었습니다. 말장난이지만 뭔가 후련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어떤 일의 결과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아야 홀가분한 자유가 깃듭니다. 잡으려고 하면 놓치게 마련입니다. 노자 2장은 부유불거 시이불거(夫惟不居 是以不去)라는 말로 끝납니다. 머물고자 하지 않음으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붙들고자 하면 오히려 사라지고, 머물 생각을 버리면 오히려 남습니다. 대개 짐작하셨겠습니다만 지난 8월 7일 장로교 통합의 총회 재판국 위원들은 명성교회의 목회직 세습이 적법하다고 판결했습니다. 8:7이었다고 합니다. 교단이 정한 교회법에 따라 공정하게 판단하라고 요구했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신학생들과 한국교회 일반의 요구는 보기 좋게 거부되었습니다. 재판국 위원장은 양심과 법과 원칙에 따라 판단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이 자기들을 더 비루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그들은 몰랐던 것일까요? 그들이 세습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한 취지가 무엇인지 몰랐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명성교회라고 하는 거대 권력 앞에 납작 엎드렸을 뿐입니다.
이 일로 한국교회는 또 다시 신뢰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자정 능력을 잃었다는 세간의 비판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법은 엄정하게 집행되어야 합니다. 친소관계 혹은 권력관계에 따라 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해당 교회는 모든 일이 뜻대로 되었다고 쾌재를 부를지 모르지만, 이 일로 인해 한국 교회의 추락은 가속화될 것입니다. 놓아야 할 때 놓지 못하고, 떠나야 할 때 떠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전락이 자못 심각합니다.
- 진리 안에서 누리는 자유
교회는 이 음란하고 타락한 시대의 논리와 문법을 그대로 추종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영의 눈을 크게 뜨고 역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늠하고, 그 길을 닦아야 합니다. 교권에 눈이 팔린 이들은 십자가로부터 가장 먼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요8:32)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라는 말이 어렵다면 진실, 진정이라는 말로 바꾸어 생각해도 됩니다. 진실한 사람만이 자유를 누립니다. 사람을 진정으로 대하는 사람만이 다른 이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반면 거짓과 허위의식은 우리를 부자유하게 만듭니다. 늘 자기 실상이나 정체가 폭로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혼신의 힘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돈이나 권력이 아닙니다. 교회 성장이란 교인수의 증가나 예산의 증가가 아닙니다.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많아지는 것이 진짜 교회 성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자본주의 사회가 우리에게 주입하고 있는 허위의식을 넘어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돈은 물론 중요하지만 돈이 절대가 되는 세상은 타락한 세상임을 삶으로 입증해야 합니다. 우리는 맘몬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의 교회는 맘몬 앞에 허리를 깊이 숙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전제정치 하에 신음하던 히브리인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셨고, 역사의 흐름에 개입하셨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인류 진보의 위대한 발걸음이었습니다. 강자들이 약자들을 도구화하고 물화하는 것이 당연시 되던 세상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은 히브리인들에게 새로운 삶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은 독점욕과 탐욕에 근거한 삶이 아니라 나눔과 돌봄에 근거한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홀로 만족하는 삶이 아니라 더불어 행복한 삶을 위해 자기를 내려놓을 때 경험하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맛보았습니다.
신앙생활의 보람은 우리를 부자유하게 만들던 것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영원히 두려움의 끈으로 포박해버리는 죽음의 쏘는 가시를 제거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만나고, 부활의 능력을 깨달은 바울은 그래서 오연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고전15:55)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자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죽은 사람은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습니다. 그렇기에 진정한 믿음의 사람은 당당합니다. 저희 집에는 백범 김구 선생님이 쓰신 성구의 복제본이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我等을 爲하시면 誰가 能히 我等을 對敵하리오"(롬8:31). 풍찬노숙의 세월을 견뎌야 했던 백범을 지켜준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었습니다.
로마서 8장에는 믿음의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가장 아름답고 장엄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환난, 곤고,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협, 심지어는 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한 호흡으로 말했지만 이 단어들 하나하나 속에는 그가 감내해야 했던 신산스런 경험이 아프게 배어 있습니다. 예수 때문에 그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온갖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로부터 멀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런 고난과 시련은 더욱 강한 끈이 되어 그를 예수께 결속시켰습니다. 의지가 강하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이 그를 붙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무한한 사랑이 고난의 아픔보다 더 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롬8:37) '이기고도 남습니다'라는 표현이 강력합니다. 이를 악물고 견디는 것이 아닙니다. 넉넉히 이기는 겁니다. 바울 사도는 마치 자기가 한 말을 곱씹기라도 하는 것처럼 다시 한번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합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롬8:38-39) 이런 절대적 확신이 있다면 삶이 아무리 가시밭길이라 해도 견딜 수 있을 것입니다.
- 불을 피우지 못하면
하지만 9장으로 넘어오면서 바울의 어조가 크게 달라집니다. 자유의 찬가를 부르던 그의 입에서 돌연 비가(悲歌, 엘레지)가 흘러나오는 것 같습니다. 바울은 자기 속에 큰 슬픔이 있고, 마음에는 끊임없는 고통이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을 괴롭히는 슬픔과 고통은 자기 동족들에 대한 안타까움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는 열성이 있지만, 그 열성이 올바른 지식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바울의 판단입니다(롬10:2). 선민의식으로 무장한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릇된 확신은 회의보다 위험합니다. 그들은 예수를 따르는 이들을 저주했고, 박해를 가하기도 했습니다. 자기가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용납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이나 태도에 동조하거나 동화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할 때가 많습니다. 모든 근본주의와 배타주의는 자기 의(self-righteousness)로부터 비롯됩니다.
전통은 소중하지만, 그것은 늘 새롭게 해석되어야 합니다. 철학자 카알 야스퍼스는 "전통의 샘은 현재에서 새롭게 실현되기 위해 포착될 때에만 샘솟는 것"(카알 야스퍼스, 哲學的 信仰, 신옥희 역,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79년 9월 15일, p.31)이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토라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예수의 시선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참 길이 눈앞에 있건만 그들은 그 길을 걸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거룩'이라는 척도를 가지고 사람들을 평가하고 가르는 일에 익숙했기에,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을 덥석 품는 '자비'의 사람이 되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선민 혹은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자의식은 충만했지만 구원받은 사람다운 삶은 드러내 보이지 못했습니다. 이게 바울을 아프게 했습니다. 물론 신앙은 민족주의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하늘을 가를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신앙인에게도 조국은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 정체성의 뿌리이기도 한 동족들도 예수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하지 못합니다. 바울이 큰 슬픔과 고통을 느끼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나는, 육신으로 내 동족인 내 겨레를 위하는 일이면,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달게 받겠습니다."(롬9:3)
바울의 말은 매우 비장합니다. 마치 출애굽 공동체를 이끌던 모세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올라가서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자, 불안해진 백성들은 아론을 찾아가 자기들을 이끌 신을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바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금으로 송아지 상을 만들고는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흥청거리며 뛰놀았습니다. 하나님은 우상 없이 기다리지 못하는 그 백성에게 진노하셔서 그들을 없애버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모세는 하나님의 진노의 팔을 붙들고 제발 재앙을 거두어 달라고 간구합니다. "이제 주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시려면, 주님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저의 이름을 지워 주십시오."(출32:32) 바울의 심정이 이러했던 것 같습니다. 동족을 향한 이 사랑이 참으로 뜨겁습니다.
바울은 자기 동족들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이 있고, 하나님을 모시는 영광이 있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들이 있고, 율법이 있고, 예배가 있고, 하나님의 약속들이 있습니다"(롬9:4). 그러나 정작 그들은 자기들이 누구인지를 모릅니다. 자기들에게 있는 것을 누리지 못합니다. 마치 요리를 위한 모든 재료를 다 갖추었으나 불을 피우지 못하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바울은 이들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라는 불꽃이 그들 속에 옮겨 붙기를 바랍니다. 이 뜨거운 마음이 참 아름답습니다.
- 복을 심는 나라
미국의 평화주의자 윌리엄 슬론 코핀 목사는 세상에는 세 부류의 애국자가 있다고 말합니다. "두 부류의 나쁜 애국자와 한 부류의 좋은 애국자다. 나쁜 애국자들은 무비판적 연인이자, 애정 없는 비평가다. 좋은 애국자들은 그들의 국가와 사랑싸움을 계속한다. 이들의 싸움은 연인이 세계와 싸우는 방식을 반영한다."(파커 J. 파머,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김찬호·정하린 옮김, 글항아리, 2018년 7월 27일, p.174에서 재인용) 나쁜 애국자는 나라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에 빠진 사람 곧 국수주의자들과,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사사건건 비평만 해대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아름다운 사회 혹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땀 흘리려 하지 않습니다. 좋은 애국자들은 국가와 사랑싸움을 계속합니다. 비평할 것은 비평하되 애정을 가지고 매사를 바라봅니다. 당파적인 이익이나 특정인에 대한 호불호의 감정에 휘둘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곧 광복절 73주년이 다가옵니다. 정인보 선생이 작사한 광복절 노래를 몇 번씩 불러보았습니다.
1.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춘다/기어이 보시려던 어른 님 벗님 어찌하리이날이 사십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2. 꿈엔들 잊을 건가 지난 날을 잊을 건가/다같이 복을 심어 잘 가꿔길러 하늘 닿게세계에 보람을 거룩한 빛 예서나리니/힘써 힘써 나가세 힘써 힘써 나가세
1절은 광복을 기다리던 이들의 절절한 마음과 광복을 경험한 이들의 감격을 노래합니다. 2절은 광복을 복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염원이 절절하게 담겨 있습니다. "다같이 복을 심어 잘 가꿔길러 하늘 닿게/세계에 보람을 거룩한 빛 예서나리니". 이것은 촉구인 동시에 염원입니다. 복을 심는 나라, 그것으로 세계에 거룩한 빛을 비추는 나라의 꿈이 자못 장엄합니다. 평화 통일은 그 꿈의 주춧돌입니다. 경제성장만이 우리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정신이 살아 있는 나라, 다른 이들을 복 되게 하는 나라, 생명과 평화가 넘실거리는 나라의 꿈은 어떤 경우에도 포기되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 정신이 우리 민족의 가슴에 굳게 세워져야 합니다. 성시화 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나를 희생해 남을 살리는 마음이 우리 삶의 원리로 자리잡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더불어 이런 세상을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이 땅에 있는 주님의 교회와 성도들이 이런 생명과 평화 세상의 향도가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