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명 '흑금성'의 대북 공작활동을 그린 영화 <공작>이 절찬 상영중이다. 주인공 박석영(황정민)은 사업가로 위장해 북한 잠입을 시도한다. 북쪽 리명운(이성민)은 북한 경제를 발전시키겠다는 일념으로 박석영의 손을 맞잡는다. 이후 박석영과 리명운은 때론 협력하고, 때론 갈등한다. 첩보극이지만 <미션 임파서블> 식의 액션은 찾아볼 수 없다. 사실 첩보극의 묘미는 치열한 수싸움이다. <공작>은 이 같은 첩보극의 묘미에 집중한다.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김대중 당시 대선후보의 당선을 막기 위해 정부 여당 쪽 사람들과 박석영의 상관인 안기부 최실장(조진웅)이 베이징 밀레니엄 호텔에서 리명운과 비밀회동을 갖고 군사도발을 요구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지난 1995년 12월 제 15대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이회창 당시 대선후보의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청와대 행정관 3명이 중국 베이징에서 북한 박충 참사를 만나 휴전선 인근에서 무력 시위를 해달라고 요청한, 이른바 '총풍 사건'이 모티브다.
남한 측 인사들은 리명운에게 군사 도발을 간청하다시피 한다. 회의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최실장이 입을 연다. 이때 최실장은 방안에 음악을 튼다. 도청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이때 턴테이블에서 흐르는 곡은 슈베르트의 대표작 '마왕'(Erlkönig)이다.
남북 비밀회동에서 ‘마왕'이 흐르다
원래 이 곡은 독일의 대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다. 시는 한 편의 가극을 연상시킨다.
어둡고 늦은 밤, 아버지는 아이를 안고 급하게 말을 달린다. 이때 마왕은 아이에게 나타나 달콤한 말로 유혹한다.
"얘야, 나와 함께 가자꾸나.
예쁜 내 딸들도 너를 기다리고 있단다.
너와 함께 밤 강가로 갈거야.
너를 위해 함께 춤추고 노래도 불러 줄 것이란다."
아이는 마왕의 유혹을 받자 아버지에게 간절히 호소한다.
"아버지, 저 마왕이 보이지 않으세요?
망토를 두르고 왕관을 쓴 마왕 말이에요!"
이러자 아버지는 환상이라며 아이를 달랜다.
"아가 우리 아가, 보인다, 아주 잘 보여.
그러나 그건 그저 시든 버들가지일 뿐이란다."
아버지는 마왕의 유혹을 이기고자 더욱 박차를 가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절박함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그만 세상을 떠난다.
마지막 연이다.
"아버지는 공포 속에 더욱 빨리 말을 몰아댄다.
신음하는 아이를 팔에 안고서.
겨우 집에 도착했을 때,
사랑하는 아들은
그의 품에서 이미 죽어 있었다."
마지막연 독일어 원문은 'Das Kind war tot'다. 독일어는 과거 시제를 과거형 보다 완료형으로 쓴다. 과거형을 쓰는 경우는 존재의 부재, 즉 죽음을 말할 때다. 그래서 과거형으로 쓴 마지막 연은 아이의 비극을 더욱 극대화 한다.
이 곡 '마왕'은 숱한 가수들이 불렀는데,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와 헤르만 프라이가 가장 유명하다. 난 조심스럽게 헤르만 프라이에 더 점수를 주고 싶다. 영국 출신 피아니스트 제럴드 무어의 반주는 곡을 더 극적으로 만들어 준다.
영화 <공작>에서 '마왕'을 쓴 건 신의 한 수라는 생각이다. 한국전쟁 이후 남한의 집권 세력은 북한의 위협을 빌미로 기득권을 유지해왔다. 북한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 남북한 국민은 분단된 나라에서 태어나 살아가고 있다는 이유 만으로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영화에서 집권 여당이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막기 위해 북한과 비밀회동을 가진 건 기득권 유지의 유혹 때문이다. 이 같은 유혹은 흡사 '마왕'의 유혹만큼 달콤하면서 치명적이다. 이런 이유로 안기부 최실장과 북한 리명운의 비밀회동 장면에서 슈베르트의 '마왕'이 흐른 건 참으로 적절했다.
한국 영화에서 이런 음악적 센스를 느낀 건 참 즐거운 일이다. <공작>의 조영욱 음악감독에게 찬사를 아끼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