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레미야 18:18-22, 골로새서 3:12-14, 요한복음 12:44-47 -
휴가철을 맞아 많은 분들이 여행을 떠납니다. 가족과 함께, 친구와 함께, 때론 홀로 여행을 떠납니다. 물이 있고, 숲이 있고, 신선한 공기가 있는 곳으로 떠납니다. 해외여행이 보편화된 요즘은 비행기를 타고, 배를 타고 멀리 오로라가 펼쳐지는 북극 근처까지, 혹은 한반도보다 더 뜨거운 남태평양의 섬으로까지 여행을 떠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내면으로의 여행'도 떠나고 있습니까? 나 자신 안으로도 여행을 떠나고 있습니까?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이란 제목의 시입니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시인은 홀로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곳에 있는 우물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 안을 조용히 들여다봅니다. 우물은 자신을 살펴볼 수 있는 거울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 안에는 달과 구름과 하늘과 바람과 가을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도 있습니다. 시인 자신입니다. 하지만 순수하고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이 사나이의 모습은 밉기만 합니다. 시인은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우물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암담했던 식민지 시절, 불의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하던 한 지식인의 고뇌가 느껴집니다. 시인은 그렇게 우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미워져 돌아갑니다. 하지만 돌아가다 생각하니 가여움이 생겨 다시 들여다봅니다. 하지만 또 미워져 돌아갑니다. 또 돌아가다 생각하니 이제는 연민을 넘어 그리움이 생겨납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는 내면으로의 여행입니다. 결국 시인은 마음의 평안을 찾습니다. 마지막 연에서, 다시 우물 속에는 달과 구름과 하늘과 바람과 가을이 있는데 이제 거기에는 "추억처럼"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과거의 순수했던 자아, 그리운 자아입니다. 시인은 비로소 자기 미움과 혐오에서 벗어나 안정과 평화를 찾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긴 여행은 내면으로의 여행이라고 하지요. 그것은 '영적인 순례'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순례'라고 하면 사람들은 보통 성지순례와 같이 어떤 낯선 곳이나 종교적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을 향한 여행만 떠올리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순례는 반드시 그런 외적인 여정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전통은 언제나 '내면의 순례,' 즉 머리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가슴에서 삶으로 이어지는 신앙의 여정을 중시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학의 역사에서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사람으로 평가되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바로 이 여정의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서구 문화사에서 빛나는 고전으로 평가받는 그의 책 『고백록』은 한 개인의 내면의 여정을 담은 최초이자 최고의 저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회심한 이후 그는 세례를 받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탐구에 매진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그는 정직하게 자기 자신과 대면했습니다. 그 결과 그의 『고백록』 안에는 언제나 개인의 영혼의 문제를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 즉 '인간의 내면이야말로 진리가 사는 집'이라고 하는 그의 생각이 잘 담겨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올바른 길, 지혜의 길을 알려줄 분은 우리 내면에 있다. 그분은 '내적 교사'인 하나님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우리에게 '내면으로 돌아가라'고 초대합니다.
스튜어트 헤젤딘(Stuart Hazeldine) 감독의 영화 <오두막 The Shack>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작년에 개봉한 영화인데, 얼마 전 우리 교회의 '영화가 있는 주일 오후' 시간에 상영했습니다. 원작은 윌리엄 폴 영(William Paul Young)이 썼습니다. 이 소설은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49주 연속 1위, 아마존 종합 베스트셀러 1위,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 Top 100을 기록했고 전 세계 46개국에서 총 2천 만 부 이상이 판매되었습니다. 저도 이런 책을 하나 쓰고 싶습니다... 작가는 어린 시절 선교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뉴기니에서 살았는데 원주민에게 그리고 이후 학교 기숙사에서 상급생들에게 성추행을 당하는 아픔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엄격하고 정형화된 신앙교육을 강조하는 아버지와는 한 번도 깊은 대화를 나눠보지 못합니다. 그의 소설 『오두막』은 그의 이러한 내면의 상처를 주제로 하고 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깊은 치유를 완성도 높은 줄거리로 감동 있게 전하고 있습니다.
한 단란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아빠 맥은 다정다감하고, 엄마 낸시는 따뜻한 사람입니다. 자녀로는 아들 조쉬와 딸 케이트 그리고 막내 딸 미시가 있습니다. 아빠 맥은 가족에 매우 헌신적인데 그 자신의 어린 시절에 겪은 상처와 고통 때문입니다. 맥은 한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자라났습니다. 아버지는 교회의 장로였으나 술만 먹으면 어머니를 때리고 자녀를 폭행했습니다. 옆집 흑인 아주머니가 파이를 구워주며 위로하면서 하나님은 언제나 듣고 계시니 하나님께 말하라고 일러줍니다. 그래서 맥은 주일예배 시간에 목사님 앞에 나아가 고백했습니다. "아빠를 막으려 해도 막을 수가 없어요. 엄마를 보호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요." 그날 밤 아버지는 혁대를 풀어 아들을 쳤습니다. 그리고 골로새서 3장 20절을 외우라고 했습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13살 아들은 결국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야 맙니다. "언젠가 용서해주길 바란다"는 메모를 남기고 아이는 아버지의 술병에 살충제를 넣었습니다.
그런 뼈아픈 어린 시절을 겪었기에 맥은 가정에 헌신적입니다. 그에게 가정은 절대적입니다. 가족을 지킬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너무도 견딜 수 없는 끔찍한 시련이 닥쳐옵니다. 맥은 세 자녀를 모두 사랑했지만 그 중 특히 영특한 막내딸 미시를 끔찍이 아꼈습니다. 어느 날, 맥은 아이들만 데리고 캠핑을 가게 됩니다. 아내는 세미나 때문에 빠졌습니다. 강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중, 보트를 타던 큰 아들 조쉬와 큰 딸 케이트가 물에 빠집니다. 큰 딸이 장난을 치다 배가 뒤집어진 것입니다. 둘 다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으나 아들은 보트에 끈이 묶여 빠져나오질 못합니다. 황급히 물속에 뛰어든 아빠는 겨우 아들을 구해내고 인공호흡 끝에 숨이 돌아옵니다. 모두가 한숨을 돌립니다. 그런데 그 혼동 중에 강가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던 막내딸 미시가 보이질 않습니다. 사방을 뒤져도 없습니다. 경찰이 출동하고, 아빠는 막내딸이 그림을 그리던 도화지 위에서 무당벌레 핀을 하나를 발견합니다. 딸의 것이 아닙니다. 경찰은 FBI가 수년간 뒤를 쫓던, 5명이 넘는 여자아이를 유괴한 자의 소행 같다고 말합니다. 얼마 후 산 속에서 범인의 트럭을 찾았다는 연락이 옵니다. 경찰과 함께 거기에 가보니 거기에는 오두막이 하나 있습니다. 낡고 음침한 오두막입니다. 원작 소설책의 표지에도 어둡고 칙칙한 곤색의 오두막이 그려져 있습니다. 안에 들어가 보니 딸아이가 입었던 겉옷만 피 묻은 채로 발견됩니다. 아빠는 울부짖습니다. 그는 그렇게 5살짜리 막내딸을 잃습니다. 그리고 가정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이 모든 일이 자신의 장난 때문에 일어난 거라는 죄책감으로 큰 딸은 마음의 문을 닫아버립니다. 엄마는 두 아이들을 데리고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남편의 무너진 마음을 돌아오질 않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무너지기 직전입니다. 그때 '파파'로부터 편지가 옵니다.
"맥, 오랜만이다. 다음 주말 그 오두막에 있을 테니 나를 만나고 싶으면 그리로 오게. 파파." 장난편지인 줄 알았습니다. 생각하기도 싫은 그 끔찍한 오두막으로 오라니요. 혹 편지는 범인이 아빠를 유인하려는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30년 만의 폭설이 내렸던 그 날, 편지가 넣어진 우체통 앞에는 어느 누구의 발자국도 찍히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파파'는 아내가 하나님을 부르는 애칭이었습니다. 맥은 친구의 충고를 물리치고 홀로 오두막으로 찾아갑니다. 깊은 산 속 눈에 파묻힌 그 오두막에 도착한 맥은 권총을 들고 조심스럽게 들어갑니다. 하지만 아무도 없습니다. 다시 그 때의 악몽이 떠오르고 맥은 쓰러집니다. 허탈감에 돌아가려 하는데 누군가 오두막으로 다가옵니다. 범인인 줄 알고 잔뜩 긴장했지만, "맥, 날씨가 추우니 장작불 피우러 같이 갑시다"라고 말하는 그를 맥은 따라갑니다. 그러자 갑자기 계절이 바뀌면서 숲은 겨울에서 따스한 봄이 됩니다. 새들이 지저귀고 숲속에는 환한 햇살로 생기가 넘칩니다. 눈을 의심하는데, 호수 앞에 예쁜 집이 하나 나타납니다. 가보니 거기에는 어릴 적 자신을 위로해주던 친근한 얼굴의 옆집 흑인 아줌마가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엘루시아'(Elousia)라고 소개합니다. 이 이름의 뜻은 "진정으로 실재하며 모든 존재의 근거가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그가 바로 맥에게 편지를 보낸 '파파'입니다. "그러면 당신이 바로 그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입니까?"라고 맥이 질문하자 파파와 함께 서 있던 다른 두 사람이 모두 동시에 "그렇다"라고 대답합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주인공을 맞아준 것입니다. 그를 여기로 데려온 남자, 즉 성자 하나님 예수는 아랍계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집에 성부 하나님과 함께 있던 성령 하나님은 동양계 여성의 모습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모습을 언제나 흰 턱수염의 할아버지로 상상했다"는 맥에게 파파는 이렇게 답합니다. "그건 산타 할아버지고, 자네의 과거를 뒤돌아보았을 때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은 부담이 될 것 같아서" 친근한 흑인 아줌마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이야기해줍니다.
이제 거기서 맥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논쟁을 벌입니다. 우선 파파에게 따집니다. "전지전능하시다면서요. 그런데 왜 내 딸을 죽게 하셨죠? 가장 절박한 순간에 왜 그 아이를 버리셨죠? 그러고 보니 나쁜 습관을 가지고 계시네요. 사랑하는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며 울부짖을 때에도 그에게 등을 돌리셨더군요." 파파는 조용히 자신의 손목을 보여줍니다. 파파의 손목에도 못 자국이 선명합니다. "내 아들의 선택으로 인한 대가를 내 아들이 혼자 치렀다고 생각하진 말게. 우린 그 때 함께 있었어. 난 내 아들도, 자네도, 그리고 자네 딸 미시도 떠난 적이 없지... 자신의 고통만 바라볼 때는 나를 보지 못하는 법이야... 아픔의 옹이구멍으로만 세상을 보지 말게. 자네의 근본적인 흠은 나를 선(善)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세."
논쟁은 성령 하나님과도 이어집니다. 야생의 정원을 함께 가꾸면서 동양 여성의 모습을 한 성령 하나님이 맥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다고 믿나요? 기준이 뭐지요?" 맥이 답합니다. "분명하잖아요. 내게 이로운가 아닌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익인가 아닌가. 그것이 기준입니다." 그러자 성령 하나님이 눈물을 글썽이며 말합니다. "당신은 심판자군요. 당신과 같은 사람들이 수 십 억 명이예요. 그들은 각자의 기준으로 선과 악을 판단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선이 이웃과 악과 충돌하면 말다툼을 벌이고 전쟁을 합니다. 다들 신 노릇을 하려고 하니까."
이후 성령 하나님은 어두운 동굴 속에서 '지혜의 신'의 모습으로 나타나 맥과 같은 논쟁을 이어갑니다. 여기서 빛이 없는 암흑의 동굴은 주인공 맥의 내면을 상징합니다. 심판자인 지혜의 신은 맥에게 "오늘은 당신이 심판자의 자리에 앉으라"고 권합니다. 맥이 주저하자 "평생 심판자를 자처하더니, 전문가답게 오늘도 해보라"고 강권합니다. 맥은 살인자, 마약상, 테러리스트들과 같이 온갖 나쁜 사람들을 유죄로 심판합니다. 자기 아버지도, 그리고 그 아버지를 죽인 그의 아들도. 자신의 딸을 죽인 범인은 당연히 지옥에 떨어져야 한다고 분노하며 판결합니다. 그러자 지혜의 신은 그 범인의 아버지는 어떻게 할 거냐고 묻습니다. 그 범인을 변태로 만든 그의 괴물 아버지 말입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아버지들, 그러니까 인류의 조상 아담까지 올라가는 그 뒤틀린 유산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묻습니다. 나아가 이 모든 결과를 알면서도 방관한 하나님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묻습니다. 맥은 하나님도 유죄라고 판결합니다.
그러자 지혜의 성령은 마지막으로 맥에게 그의 두 아이를 심판하라고 합니다. "딸 케이트는 당신에게 상처 주는 말을 했고, 당신을 밀어냈지요. 아들 조쉬는 요즘 말도 안 듣고, 거짓말을 하고 다닙니다. 둘 중 하나는 천국에, 다른 하나는 지옥에 보내야합니다. 선택하십시오." 맥은 그것만은 못하겠다고 거부합니다. 아니, 안 하겠다며 거절합니다. 대신 자기를 지옥에 보내달라고 간청합니다. 그제야 비로소 맥은 모든 사람을 지으신 부모와 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왜 하나님이 정죄와 심판이 아니라 자비와 구원을 말씀하시는지 깨닫기 시작합니다. 오늘 읽은 복음서에서도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을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한 3:17)고 했습니다. 맥은 하나님이 악을 꾸미는 분이 아니라, 악에서 선을, 그리고 비극 속에서 좋은 일을 이끌어내는 분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 맥은 동굴 밖 천국에서 행복하게 뛰어노는 딸 미시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됩니다. 맥은 비로소 자신의 어두운 내면의 동굴에서 나와 폭포수에 몸을 씻습니다. 이 장면은 에베소서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에베소서 5:26). 그리고 별이 쏟아지는 아름다운 평원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만납니다. "아들아 정말 미안하다. 내가 눈이 멀어 아무 것도 보질 못했어." "네, 아버지 알아요. 무서웠어요. 어찌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아들아 널 용서한다. 나를 용서할 수 있겠니? 너는 내가 꿈도 꾸지 못할 멋진 아빠가 되었더구나." 아버지와 아들은 거기서 깊이 포옹하고 서로 용서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용서해야 할 사람이 하나 더 남아 있습니다. 맥은 자신의 사랑스런 딸을 죽인 범인까지도 용서해야 할까요?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맥은 파파에게 강하게 저항합니다. "그 자를 용서하라고요? 아니, 고통을 주고 싶습니다. 그가 괴로웠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그랬듯이! 지옥 불에 타야죠. 파파가 고통을 주세요." 파파가 말합니다. "다시 심판자가 된 건가? 그가 한 짓을 봐주란 것이 아니라, 나를 믿고 옳은 일을 하라는 것이네. 용서란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지. 그냥 그 자의 목덜미를 놓아주는 것이야. 지금 내면의 고통이 자네를 삼키고 있네. 그것이 기쁨을 앗아가고 사랑하는 능력을 잃게 만들었지. 그것이 계속 당신을 옭아매고 있어. 용서는 혼자 하지 않아도 되네. 내가 함께 할게." 맥은 하나님에 도움으로 그 범인을 용서합니다. 그 때 맥의 손 안에 있던 무당벌레가 하늘로 날아갑니다. 범인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맥은 깊은 바위 아래 묻혀 있던 딸의 주검을 찾습니다. 그 아이를 수의에 감싸서 성령 하나님과 함께 만들어 둔 정원의 한 가운데 묻어줍니다. 그 정원은 다름 아닌 맥의 마음을 상징합니다. 목수인 성자 하나님은 손수 나무 관을 짜주었고, 성령 하나님은 그동안 맥이 흘렸던 눈물을 받아두었던 유리병을 열어 무덤 위에 붓습니다. 치유의 눈물이 땅 위에 쏟아지자 무덤 위에서 꽃이 피고 나비가 날아듭니다. 비로소 맥은 모든 자책감과 미움에서 해방됩니다. 모든 고통과 아픔에서 회복됩니다. 마음에서 하늘의 평화를 맛봅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맥에게 파파는 이렇게 당부합니다. "당신이 사랑하고 용서할 때마다, 그리고 친절한 행동을 할 때마다 우주를 낫게 변화시켜요. 특별히 큰 딸 케이트를 잘 돌봐주세요. 미시의 죽음을 자기 탓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눈을 뜨니 맥은 폐허가 된 그 오두막 바닥에 쓰러져 있습니다.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거대한 40톤 트럭에 받힙니다. 눈을 떠보니 병원입니다. 친구는 교통사고가 어젯밤이 아니라 맥이 오두막으로 가던 날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맥은 그냥 꿈을 꾼 것일까요? 사랑하는 가족이 찾아오고 맥은 큰 딸 케이트와 단 둘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요즘 우리 사이가 그다지 좋진 않았지. 내가 내 슬픔에 빠져 허우적대느라 네가 이겨내게 돕질 못했어. 정말 미안하다. 이건 너의 잘못이 아니야. 네가 짊어져온 게 얼마나 힘든 지 알아. 아빠도 이제야 털어내는 법을 배우고 있단다. 우리 함께 그걸 배워갔으면 좋겠구나. 정말 많이 사랑해." "아빠, 나도 사랑해요." 큰 딸과 아빠는 그렇게 화해했습니다. 이후 맥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누구보다 많이 사랑하고, 빨리 용서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에 용서를 구하는 일에는 더 재빠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갔습니다. 아마 어릴 때 되지 못했던 그 아이로 돌아간 것입니다. 영화 <오두막>은 누군가를 용서하고 싶지만 쉽게 그러지 못하는 분들, 그리고 오래된 마음의 상처로 깊이 괴로워하는 분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은 영화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파파는 왜 맥에게 그 오두막으로 오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맥의 아픔이 바로 그 오두막에서 비롯됐기 때문입니다. 맥은 그 오두막 안에서 스스로 짓고 부수기를 무수히 반복했던 자신의 고통과 마주했습니다. 왜 이런 비극이 죄 없는 나에게 일어나느냐고 원망하던 맥은 거기서 우리를 치유하시는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실로 성서를 보면 우리의 하나님은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시편 147:3) 분입니다. 오늘 읽은 교독문처럼, 주 여호와의 영은, 즉 성령께서는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이사야 61:103) 하시는 분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는 나만의 오두막이 있습니다. '영혼이 오두막'이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나만의 깊은 슬픔과 상처를 간직한 오두막이 하나씩 있습니다. 우리는 그곳을 기억하지도 또 대면하지도 않으려 합니다. 하지만 파파는 우리를 거기로 부르십니다. 왜 일까요? 왜 나를 다시 이 오두막으로 오게 했느냐고 묻던 맥에게 파파는 이렇게 답했었습니다. "왜냐하면 네가 이곳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맥이 갇혀 있던 그 '영혼의 감옥'에서 맥을 자유롭게 하고 싶으셨습니다. 맥이 그 오두막에 스스로를 가두고 자신의 고통만을 보라보았을 때 그는 하나님을 볼 수 없었고 사랑하는 가족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아픔의 옹이구멍'으로만 세상을 바라봤을 때 맥은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맥에게 하나님은 그가 붙들고 놓지 않고 있던 '악의 목덜미'를 놓아버림으로써 그를 그의 내면의 고통과 상처로부터 해방하고 자유와 평화를 주신 것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혹 나의 고통과 나의 상처가 너무 커서 그것만 바라보느라 내 가족이, 내 친구가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는 것을 방관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이제 털어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제 악의 목덜미를 놓아버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용서란 나를 지배하는 것에서 나를 해방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새로운 세계로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성경에서도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에베소서 4:32)고 말씀합니다. 또한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로새서 3:13-14)고 말씀합니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세상으로부터, 고통으로부터, 그리고 아픔으로부터의 도주가 아니라 그것들과 직면하게 하는 힘입니다. 두려움 없이 문제의 본질과 대면하게 하는 용기입니다. 자신감을 가지고 문제와 싸우게 하는 능력이고 승리하게 하는 힘입니다. 상처를 치유 받으려면 우리는 그것을 회피하거나 억압하지 말고 그것을 직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영혼의 오두막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세상 밖에서가 아니라 나의 끔찍한 고통의 근원에서 나를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치유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로 여행을 떠나십시오. 자기 안으로의 여행, 내면의 순례를 떠나십시오. 내 영혼의 오두막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치유를 발견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내면으로의 여행은 단순히 '자기'에게서 '자기'에게로 이르는 길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한다고 해서 우리의 참된 본연의 모습을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거울을 오래 뚫어지게 바라본다고 해서 자신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연의 모습은 우리를 창조하신 분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만 밝게, 맑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그리스도인의 내적 순례는 자기에게서 자기에게로 이르는 길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자기에서 벗어나 진정한 근원으로 나아가는 여행입니다. 자신의 머리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가슴에서 삶에 이르는 이 신앙의 여정은 자기 안에 머무르지 않고, 오직 자신을 창조하신 분, 모든 존재에게 의미를 부여하신 분, 그리고 돌봄과 치유를 통해 창조의 목적을 이루어 가시는 그 분과의 관계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며 지탱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빛 안에서 우리의 저 낡고 음침한 영혼의 오두막은 새들이 지저귀고 꽃들이 만발한 아름다운 정원으로 변할 것입니다. 오늘 읽은 공동기도문, 이해인 수녀의 <꽃밭에서>처럼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은총의 정원에서 "순결한 마음으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동그란 마음으로.... 남의 잘못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나의 잘못을 진심으로 용서받"는 치유의 기쁨을 만끽할 것입니다. (2018.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