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터 윙크, 『예수와 비폭력 저항』, 김준우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2003)
나는 '정의'를 말하지 않는 구원 이야기가 싫다. 세상의 불의함이야 어떠하든 나중에 천국에 간다는 식의 그 구원 이야기가 지금 바로 이곳에서 '불의함의 지옥'을 맛보고 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실제적인 도움과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구원 이야기로도 충분한 도움과 위로를 받았다는 고백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의식을 가진 이들에게 무엇보다 한 가지 권면을 해야 할 것이다. 어서 그 '종교적 마약'을 끊으라고 말이다. 마약을 투여해 참되고 지속적인 기쁨을 얻은 자가 누가 있으랴. 착각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월터 윙크(Walter Wink)는 본인의 작지만 무거운 책을 통해, 그리스도교는 결코 이 세상의 불의함과 분리된 종교가 아님을 천명하고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본래의 사회적 맥락 속에서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역사상 이제까지의 어떤 발언보다도 가장 혁명적인 정치적 선언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할 수 있다"(28). 하지만 정의로운 세상을 위한 바로 그 '정치적 선언'으로서의 복음이 정치와 한없이 무관한 담론이 되고만 것은 예수의 '비폭력 저항'에 대한 오해, 특별히 성서적 오해에 기초하고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21-26). 가령 마태복음 5장 38-41절과 같은 성서의 유명한 한 대목이 오역됨으로써 예수의 비폭력 저항이란 그저 불의를 방조하고, 악에 굴종하고, 구조적 변화를 도모하지 못하게 하는 근거로 전락하였다는 것이다(27).
하지만 윙크는 분명히 말한다. 예수의 비폭력 저항은 '전투적인 비폭력'(militant nonviolence)이라고 말이다(30). 다시 말해 그리스도교는 철저히 저항의 종교라는 것이다. 단지 그 자세가 '비폭력'일 뿐인 것이다(30). "예수님은 악에 대해 반(反)로마 투사들 못지않게 대항했다"(29-30). 그런데 많은 경우, 예수의 비폭력 저항의 방점이 '부드러움과 감상'(43)에 찍힘으로써 불의한 세상을 변혁하는 정치담론과 무관한 종교가 탄생되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비겁함을 가리기 위한 핑계'(52)로 예수의 비폭력 이야기를 부드럽고 감상적인 이야기로 만들어버렸다. 당연히 그것은 불의한 권력을 흐뭇하게 할 뿐이었다(31). 따라서 방점을 '전투'에 찍어야 오해가 없다. 다시 말해 예수의 비폭력 저항은 불의를 변혁하는 정의로움에 관한 것이다. 비폭력이, 죽어서 천국 갈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잠시 시도해줘야 할 착한 행동과 자비로움 따위로 오해되어선 곤란하다.
그런데 내가 이 책을 선정하여 서평을 쓰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윙크가 예수의 저항 이야기를 '하나님의 사랑'의 맥락에서 풀어낸 것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윙크에게 이해된 예수의 저항은 불의한 세상의 원수들을 경멸하는 것과도, 박멸하려는 것과도 무관했다.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라고 여기는 사람들(89)이 사용하는 하나의 테크닉(61)으로서 비폭력이 이해되는 것도 예수와 무관했다. 윙크의 눈에 비친 예수의 비폭력 저항은 "원수 역시 하나님의 자녀임을 인정"(72)하는 것과 관련되었던 것이다. 예수가 불의한 세상에 비폭력적으로 저항했던 것은 단순한 방법론이 아니라, 불의한 세상을 조장하는 원수들도 하나님의 형상임을 인지했기 때문이다(80). 아무리 수준 낮은 인간이라도 말이다(81). 그래서 윙크는 예수의 비폭력 저항을 두고, "그 원수조차도 정의로운 사람이 될 가능성을 끝까지 열어놓은 채 원수에 대항하는 정의로운 수단"(61)이라고 말했다. 물론 우리는 원수를 사랑할 능력이 없고, 그래서 은혜가 필요하다(74). 자, 이게 단순한 이야기일까? 나는 가슴이 뛴다. (아프다.)
이른바 세월호 이후, 많은 이들이 그랬듯 나 역시 신학도로서 그전보다 정의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나의 신앙이 반드시 공적인 담론에 연루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더 깊이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알게 되었다. 그런데 종종 고민이 되는 일도 생겼다. 정의를 위해 헌신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무자비함 혹은 엘리트 의식이 발견될 때, 무척 당황하곤 했던 것이다. 특정 이슈 자체에 대해 '논리적 공감대'는 충분히 형성되지만, 그들에게서 '원수'를 향한 증오와 적대감을 발견할 때 나는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정확히 말하면, 본인이 그러한 적대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발설할 때 나의 마음이 복잡해지곤 했다. 그런데 그 헤아리기 어려운 마음을 윙크의 도움을 통해 이해하게 되었다. 정의를 향한 노력만으로는 이 세상을 정의롭게 할 수 없다고 말이다(72). 우리는 불의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맥락에서 정의를 말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것이 극단적 불의함 속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서운한 말로 들릴 것인가?(74) 물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를 생각해본다. 그는 고상한 상황에서 세련된 가르침을 주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안다. 십자가 처형의 길을 예견하면서도 우리에게 비폭력을 말했다. 가장 악하고 가슴 아픈 상황을 몸으로 겪어낸 예수에게서 이 가르침이 나왔다. 우리는 정의를 말하기에 앞서, 예수의 이러한 모습을 충분히 숙고하는 작업을 생략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이 정의를 말하지 않는 구원 이야기를 붙잡고 사는 소위 보수적 신앙인들에게 좋은 도전이 되길 바란다. 그러나 무엇보다, 정의를 말하나 동시에 증오심(75)에 사로잡혀 있는 소위 진보적 신앙인들에게 더 좋은 도움이 되길 빈다. 정의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원수사랑'으로 그 일을 행할 때, 그 정의 이야기가 세상을 정말 살릴 것이라 믿는다. 불의함에 대해 탁월한 통찰력을 지닌 멋진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응원의 마음을 담아 서평을 마친다. 부디 그들의 통찰력이 또 다른 불의함의 재료가 되지 않길 빌며.
"우리는 우리의 압제자들을 미워하는 것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사랑해서 그들이 변화되도록 해야만 합니다."(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