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기다림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시편 62:1-2, 5-6, 로마서 8:19-25, 마태복음 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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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김민부 작사, 장일남 작곡의 "기다리는 마음"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가곡일 것입니다.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 / 월출봉에 달 뜨거든 날 불러주오 /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 / 빨래 소리 물레 소리에 눈물 흘렸네." 이 노래는 제주도 망부석(望夫石) 설화와 관련이 있다고 전해집니다. 제주 청년 하나가 바다 건너 뭍에 도착했는데 그곳이 지금의 목포입니다. 거기서 청년은 고향에 두고 온 여인을 그리며 날마다 유달산의 월출봉에 올랐습니다. 제주 여인도 떠나간 그 청년을 기다리며 매일 같이 일출봉에 올랐습니다. 하염없이 육지를 바라보지만 님은 오지 않습니다. 2절입니다. "봉덕사에 종 울리면 날 불러주오 / 저 바다에 바람 불면 날 불러주오 /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 / 파도 소리 물새 소리에 눈물 흘렸네." 여인은 결국 망부석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 많은 우리 민족의 삶에서 '기다림'이란 정서가 무엇인지 이 노래는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 슬픈 결말입니다.

오늘부터 '하나님의 달력'으로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기다릴 대(待), 임할 임(臨), 글자 그대로 우리 가운데 임하실 주님을 기다리는 계절입니다. 대강절(待降節), 강림절(降臨節)이라고도 합니다. 영어로는 "Advent"입니다. '오심' 혹은 '도착'을 뜻하는 라틴어 "adventus"에서 유래했습니다. 교회의 달력은 오늘부터 한 해가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림으로 새해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어떤 기다림입니까? 우리가 기다리는 님은 정녕 오실까요? 우리는 정말 그 분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대림절은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의 '처음 오심'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초대교회에서 대림절은 예수님의 탄생, 즉 처음 오심보다는 재림, 즉 다시 오심을 고대하는 희망의 기간이었습니다. 중세교회에서 대림절은 금욕하고 속죄하는 기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는 날이 곧 심판 날이 될 것으로 생각하여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종교개혁 이후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처음 오심과 다시 오심 모두를 기다리는 기쁨과 희망의 절기로 대림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오늘 부른 찬송가의 가사처럼, 임마누엘 하나님(이사야 7:14, 마태 1:23), 곧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설렘의 절기가 바로 대림절입니다. "곧 오소서 임마누엘, 오 구하소서 이스라엘, 그 포로 생활 고달파, 메시아 기다립니다. 기뻐하라 이스라엘, 곧 오시리라 임마누엘." 메시아에 대한 이 간절한 기다림은 구약성서 이사야 제40장에 실려 있습니다. '제2 이사야'라고 불리는 이사야서 40-55장은 주님 오시기 전 6세기 바벨론의 포로생활을 그 역사적 배경으로 합니다. 때문에 이사야 40장은, 오늘 교독문을 통해 우리가 읽은 것처럼, 위로의 메시지부터 시작합니다. "너희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1절). 왜 이스라엘이 위로 받아야 합니까? 그것은 이제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기"(2절)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3절)고 외칩니다. 이 말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은 즉각 '출애굽'을 연상합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와 사막을 지나 약속의 땅에 이르렀습니다. 그와 같이 이제 바벨론의 포로생활에서 해방되어 다시 광야와 사막을 지나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것이라는 소망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이사야 40장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장차 이스라엘에게 임하실 메시아가 심판자가 아니라 '목자'로 오신다는 구절입니다. 11절입니다.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하나님의 공의에서 벗어난 이스라엘은 징계를 받아 포로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고달픈 포로생활 끝에 이스라엘을 찾아오시는 분은 이제 더 이상 심판하고 징벌하는 분이 아니라 상처 입은 백성들을 위로하고 감싸시는 목자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더 이상 두려움이나 공포가 아니라 기대와 기쁨 속에 메시아를 기다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림절은 이와 같이 '목자와 같은 임마누엘 하나님'을 기다리는 은총의 절기입니다. 눈물과 고통으로 가득한 우리의 고단한 삶 속으로 그런 하나님이 찾아오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비루한 우리의 역사 안으로 달려오신다면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한인현 작사, 이홍렬 작곡의 동요 "섬집 아기"를 모르는 분은 없을 겁니다. 어릴 적 많이 불렀지만 어른이 되어 다시 불러봐야 깊은 뜻을 느낄 수 있는 노래입니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아름다운 가사지만 슬픈 내용입니다. 무섭기도 합니다. 생계를 꾸려가야 하는 엄마는 굴 따러 섬의 그늘에 갔습니다. 어린이도 아닌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봅니다. 그러다 혼자 잠이 드는데 팔을 베고 잔답니다. 엄마 팔이 아니라 자기 팔을 베고 잡니다. 지금 같으면 이 엄마는 경찰에 잡혀갑니다. 아이 보호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동을 유기한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안다고 아기를 이렇게 방치한단 말입니까. 그런데 이 노래는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이 노래의 진수는 2절에 있습니다.

"아기는 잠을 곤히 자고 있지만 / 갈매기 울음소리 맘이 설레어 / 다 못 찬 굴 바구니 머리에 이고 /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옵니다." 사실 잠이 든 아기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일단 곤히 잠들면 모든 아기는 평화롭습니다. 하지만 엄마 맘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굴을 따면서도 집에 두고 온 아기 때문에 엄마의 마음을 불안하기만 합니다. 갈매기가 울어도 거기서 제 아기의 울음소리가 환청처럼 들립니다. 일할까, 갈까, 일할까, 갈까... 이런 망설임은 잔인하기만 합니다. 일과 육아를 동시에 해야 하는 엄마들은 압니다. 일을 안 하면 먹여 살릴 수가 없고, 일만 하면 아기를 잘 키울 수가 없습니다. 결국 엄마는 '다 못 찬 굴 바구니' 머리에 이고 황급히 집으로 달려갑니다. 굴 바구니를 다 채웠어야 했지만 엄마는 그만 멈췄습니다. 그리고 달려갑니다. 그것도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랫길을 달려갑니다. 그렇게 엄마는 집으로 달려옵니다. 제 아기를 찾아 한걸음에 달려옵니다. 그래서 2절을 들으면 왈칵 눈물이 납니다. 엄마의 마음을 알 것 같아서.

그런 엄마와 같은 메시아가 오신다는 겁니다.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는" 그런 엄마 같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 오신다는 겁니다. 자기 백성을 친히 위로하고 아픈 곳을 달래러 오신다는 겁니다. 대림절은 이렇게 좋은 계절입니다. 얼마 같은, 목자 같은 메시아가 우리를 찾아오시는 은총의 계절입니다.

기다림에는 두 가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막연한 기다림'이고 다른 하나는 '약속의 기다림'입니다. 신앙인들에게 기다림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입니다. 우리들의 기다림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입니다. 우리는 막연히 기다리지 않습니다. 근거 없이 기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약속을 믿기에 기다립니다. 구원에 대한, 부활에 대한, 새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철저히 신뢰하기에 인내로써 기다립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로마서 8:24-25).

사람들은 종종 기다림을 소극적이거나 수동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다림은 매우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행위입니다.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약속에 대한 기다림은 가장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의 행위입니다.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을 다시 한 번 읽어봅니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 너였다가 /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 다시 문이 닫힌다 / 사랑하는 이여 /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기다려본 사람은 압니다. 아니 기다려본 사람만이 아닙니다. 시인의 말[著語]대로, 기다림은 사랑이라는 것을. 기다림은 희망이라는 것을. 우리는 희망 때문에 기다리고, 절망 때문에 또 희망을 기다립니다. 그래서 기다림이 절실해지면 그 기다림은 일방적이거나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라 '너'에게로 다가가는 능동적인 행위가 됩니다. 여기서 '너'는 시인이 말하는 '민주, 자유, 평화, 숨결 더운 사랑'일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약속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메시아를 기다림은, 목자와 같은, 엄마와 같은 임마누엘 하나님을 기다림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하실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그 약속에 대한 확고한 신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소망이 있는 한, 기다린다는 것은 정녕 행복한 일입니다. 소망 안에서의 기다림은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단지 기다리는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라 그 하나님을 찾아가는 적극적인 행위가 됩니다. 그 하나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고 그 길을 평탄하게 하는 능동적인 실천이 됩니다. 진정한 희망은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사랑이 깊어지면 상호적이 됩니다. 진정한 희망과 성숙한 사랑은 주객관계가 아니라 일치의 신비로 넘어갑니다.

함석헌의 기도시 "님이 오신다"를 아시는지요. 대림절에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이 읽어야 할 보석과 같은 작품입니다. 함 선생님의 종교적 신비체험의 깊이를 느낄 수 있는 기도시입니다. "님이 오신단다. / 길 닦아 예비하자 / 내 집에 오시는 님을 / 날 보러 오시는 님을, / 그저 어찌 맞느냐? // 높은 것 낮추고 / 우므러진 것 돋우고 / 굽은 길을 곧게 하고 / 지저분한 것을 다 치워 / 님이 바로 오시도록 하자." 여기까지는 이사야의 예언이 떠오르게 합니다.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이사야 40:3). 하지만 여기서 함석헌 선생은 아직 준비가 안 된 자기 자신을 발견합니다. "님을 기다린다면서 / 그저 잤고나, / 이것저것을 온 방안 / 허투루 늘어놓아 / 그저 앉으실 곳도 없이 했구나. // 어서어서 모셔야 할 님 / 더러운 길에 왜 더듬게 하며, / 맑고도 거룩하신 그의 몸을 / 헤뜨린 이 속에 어찌 맞을꼬? / 오, 내 맘이 급해." 어찌한단 말입니까. 님을 기다린다면서도 아주 준비도 안 한 자신에 마음이 황망해집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쓸자, 닦자, 고치자, / 물을 뿌리자, / 묵고묵고 앉고앉고 / 이 먼지를 다 어찌하노? / 언제 이것을 아름다이 하노? // 자리 위엔 무슨 때가 / 이리도 꼈느냐? / 천정의 거미줄은 / 누가 치느냐? / 이리도 더러운 줄을 나도 몰랐지. // 뜰에는 무엇이 저리도 많아 / 발도 옮겨 놀 곳이 없고 / 앞길에는 돌이 드러나고 / 다리가 무너졌으니, / 저거는 누가 놓아주느냐?" 청소를 해보신 분들은 압니다. 아무리 쓸고 닦아도 왜 먼지는 자꾸 끼고 쌓이기만 하는지. 아무리 치워도 왜 방안엔 손님 드릴 공간 하나 없는지. 그런데 큰 일 났습니다. 계속 읽어봅니다. "아이구 님이 오시네! / 저기 벌써 오시네! / 이를 이를 어찌노, / 어딜 들어오실랄꼬 / 이 얼굴, 이 꼴, 이 손은, 아이!" 큰 일 났습니다. 청소는커녕 아직 몰골이 말이 아닌데 님이 불쑥 나타나신 겁니다. 차라리 오시지 말지. 이를 어쩌란 말입니까. 그런데 함석헌 선생의 기도시는 여기서 대반전이 일어납니다. 대림절에 신과 인간의 관계, 무한자와 유한자 사이의 통념을 뒤집어버립니다. "님이 오신다"의 마지막 9,10,11연입니다. "이 애 이 애 걱정 말라, / 나도 같이 쓸어주마, / 나 위해 쓸자는 그 방 / 내가 쓸어 너를 주고, / 닦다가 닳아질 네 맘 내 닦아주마. // 쓸자 닦자 하던 마음 / 그것조차 맘뿐이고 / 님이 손수 쓰시고 / 나까지도 앉으라시니, / 내 자랑이라곤 없소이다, 참 없소이다. // 밝히자면서 못 밝힌 방 / 저절로 밝아지고, / 맑히자면서 못 맑힌 맘 / 나중엔 맑아졌으니 / 내라곤 없소이다, 님 곁에만 사오리." 내 남편이 저랬으면 하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교수님, 내 직장 상사가 저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폴 틸리히는 신과 인간의 관계, 무한자와 유한자의 관계에 세 가지 양태가 있다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첫째는 타율적(他律的, heteronomos) 관계입니다. 신이 인간에게 보다 강력한 권위와 힘을 가지고 임하기 때문에 인간은 신에게 압도당하지만 신을 '낯선 분'으로 느끼는 권위적인 관계입니다. 둘째로 자율적(自律的, autonomos) 관계입니다. 인간이 자신 안에 지닌 이성의 자율적 법칙에 의지하여 초월적인 것을 규정하는 관계입니다. 자유롭지만 깊이가 없는 평면적 관계가 되기 쉽다고 했습니다. 셋째로 신율적(神律的, theonomos)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신이 인간을 포용하고, 또 인간은 신에 참여하면서 역설적 일치를 경험하는 관계입니다. 신의 사랑과 인간의 자유 안에서 주객관계가 사라지고 일치를 경험하는 신비의 단계입니다.

김경재 교수는 틸리히의 이론을 인용하면서 함석헌의 "님이 오신다" 안에는 바로 그 세 번째 신율적 관계가 나타나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것을 굳게 믿는 작가는 거룩한 님을 모실만한 주체적 책임자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자신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반전은 그리고 역설은 모시려는 님이 직접 오셔서 맘의 방을 쓸어주고 닦아내주시며 도리어 "나까지도 않으라" 하신다는 것입니다. 밝히자면서 못 밝힌 마음의 방이 저절로 밝아졌습니다. 맑히자면서 못 맑힌 맘이 맑아졌습니다. 이것은 은총의 체험입니다. 은혜의 체험입니다. 신과 인간 사이의 일방적인 관계가 끝이 나고 역설적으로 자리 바뀜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성서가 말하는 은혜의 임재 체험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님이 오십니다. 목자와 같이, 엄마와 같이 우리를 싸매시고 위로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 오십니다. 그 분을 맞을 준비가 되셨습니까? 그 분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고 계십니까? "골짜기는 메우고, 산과 언덕은 평평하게 하고, 굽은 곳은 곧게 하고, 험한 길은 평탄하게"(누가 3:5) 하려 하고 계십니까? 우리는 정말 그 분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본회퍼 목사의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기다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만족하는 사람, 세상에서 온갖 좋은 것을 누린다고 느끼는 사람은 기다릴 수 없습니다.... 대림절은 오직 영혼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만이 환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가난해지고 불완전해져야 함을 압니다. 그들은 더욱 위대한 무엇이 도래하기를 고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룩한 분이 친히 우리에게 오실 때까지, 하나님이 말구유에 아기의 모습으로 오실 때까지 겸손히 두려워하며 기다립니다." (1928년 12월 2일 대림절 설교 중에서)

지난 주 나눠드린 대림절 묵상집에 있는 대로, 대림절은 어둠 속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절기로 시작되었습니다. 고난의 역사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절하지 않고 기다리는 사람들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자기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포기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고뇌하고 기도하는 사람들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대림절은 율법학자들과 대제사장들의 절기가 아닙니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의 절기입니다. 대림절은 헤롯의 궁전에서 지내는 축제의 절기가 아닙니다. 광야와 들판으로 쫓겨난 사람들의 절기입니다. 대림절은 아침이 환하게 밝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의 절기입니다. 어둠을 뚫고 마침내 아침이 오듯이, 이 땅에 빛으로 오실 임마누엘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은혜의 절기입니다.

그러므로 김기석 목사의 말처럼, 우리는 오늘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나는 정말 주님을 기다리는가? 우리는 정말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인가 교우 여러분, 주님께서 여러분의 안일한 삶을 돌파하여 여러분의 삶을 뒤흔들기를 원합니까? 요즘 <보헤미안 랩소디>라는 영화가 인기인데, 그룹 퀸의 노래를 패러디해본다면 "He will, he will rock you!" 그가 여러분을 흔들 것입니다. 물론 자신의 아픈 마음과 몰골을 바라보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절박함이 없다면 주님을 기다린다는 우리의 말은 허구일 것입니다. 대림절은 은총의 시간입니다. 대림절은 우리의 존재를 흔들며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이가 우리를 찾아오시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요즘 무엇을 기다리며 사십니까? 누구를 기다리며 사십니까? 무엇을 기다리기는 하십니까? 누구를 그리워하기는 하십니까? 누군가를 그리고 무엇인가를 아직도 기다린다는 것은 내게 아직도 사랑이 남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게 아직도 소망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절망이 무엇입니까? 절망이란 우리 삶에서 더 이상 '기다림이 없는 것'입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기다리는 것이 없는 것, 더 이상 아무도 기다릴 사람이 없는 것, 바로 그것이 절망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도, 이번 한 주도, 그리고 이번 한 달도 누군가를 위해 마음 한 구석에 빈 의자를 내어놓고 '기다리는 사람'으로 살아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으로 살아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두고 그를 기다리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사시지 않겠습니까?

생텍쥐베리의 『어린왕자』 속 여우는 기다리는 이가 네 시에 온다면 세 시부터 행복해질 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기다린다는 것은 "어느 하루를 다른 날과 다르게 만들고, 어느 한 시간을 다른 시간들과 다르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두고 그 분을 기다리십시오. 그 분이 오신다고 하니 지금부터 너무 행복해집니다. 그 분이 오신다고 하니 오늘은 다른 모든 날과 달라집니다. 오늘 이 시간은 다른 모든 시간과 달리 특별해집니다.

대림절에 부르는 한 외국 찬송가, J. Rutter가 지은 "이 땅에 오신 주님께"(What Sweeter Music)입니다.

"이 땅에 오신 주님께 어떤 노래 드릴까 / 이 낮은 땅에 오신 주 하늘의 왕 내 주님께 / 어두운 밤 다 지나고 영광의 새 날 오나니 / 십이월 추운 겨울도 변하여 봄이 되도다."

"우리 안에 주 오셔서 따스한 햇빛 되시니 / 얼어붙은 들판도 꽃으로 만발하도다 / 오 귀한 구주 예수 맞이할 방이 있을까 / 내 마음 열어 드리오니 오소서."

"얼어붙은 저 새벽을 미소로 맞이한다면 / 오 그것은 주의 향기가 온 세상 가득함이라 / 와서 보라 이 신비를 주님의 탄생하심이 / 하늘과 낮은 땅 위에 생명과 빛이 되심을."

"넝쿨을 엮어 화관을 주님 앞에 드리오리다 / 오 존귀하신 주 예수 만왕의 왕 또 주의 주 / 이 땅에 오신 주님께 어떤 노래 드릴까 / 이 낮은 땅에 오신 주 하늘의 왕 내 주님께."

아멘. (2018.12.2.)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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