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리": 수구와 보수
새해 새 아침,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자"라는 덕담은 앞을 내다보고, 새해 새 희망과 새로운 꿈을 꾸고 있는 마당에 너무도 진부한데다 보수 꼰대의 말로 들리기 쉽습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리로 돌아가자는 말은 새로운 말이 아닙니다.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말이고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리자는 말이고, "비상식을 상식으로" 돌리자는 말입니다. 결코 "보수 꼰대"만이 하는 "잔소리"가 아닙니다. 물론 보수적인 말입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어른들의 교훈, 가치, 인생의 좌우명들 - 정의, 사랑, 평등, 평화, 자유, 생명, 인권, 배려, 이성, 민주, 준법, 양심, 겸손, 나눔, 근면, 절약, 등등 - 그리고 소중한 말들과 인간의 태도, 정치적 행태와 정책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것들을 되찾자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자"는 말은 "진보"진영만이 독점하는 "구호"나 "슬로건"이 아니고 "보수"진영이 못내 보수하려는 가치들만도 아닙니다. 진보와 보수를 넘어서, 이들 가치를 존중하고, 이들 가치를 되찾자는 데는 한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지난해 한 해 동안 우리는 한반도의 분단과 갈등과 대결의 역사를 되돌리고 평화와 통일의 제자리로 돌아가는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 운동은 우리 한민족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제자리" 찾기이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과업입니다. 100년 전 1919년 3월 1일 전후에 일어난 "독립운동" 역시 우리 한반도의 역사를 제자리로 돌리는 "혁명"이었습니다. 일본제국주의에 예속되는 노예상태를 청산하고 민족 자결과 자주 독립을 쟁취하자는 운동이었습니다. 나아가서 무력과 전쟁과 침략의 국제질서를 지양하고 평화와 공존, 공영의 국제 질서를 회복하자는 "국제 평화 정착"운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보수"는 제국주의적 질서를 보수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오늘의 "보수"는 전쟁과 분단과 남북 갈등을 계속 지켜나가야 한다는 "수구"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의 "보수"가 지켜야 하는 기본 가치는 "민족 자결"이고 "자주 독립"이고 "평화"입니다. 이들 가치는 "진보"의 독점물이 아닙니다.
"보수"와 "수구"는 다릅니다. "수구"는 옛날의 가치와 이상과 이념들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과 태도입니다. "옛날"이란 어느 시대 어느 시점을 말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주로 현대 이전, 프랑스 민주혁명 이전의 시대를 "옛날"이라고 생각하고, 우리나라로 말하면, 1919년 3.1혁명 이전의 가치 체계를 말합니다. 기독교 사상이 보편화되기 이전의 유교 사상, 가령, "3강 5륜"과 같은 사회질서를 지키는 것을 "수구"라고 합니다. 그래서 수구적 가치체계를 "보수"한다고 하면, 권위에 대한 복종과 순종을 강요하는 것이고, 관존민비를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고, 기업주는 노동자들을 노예정도로 취급하는 태도, 그리고 여자는 인간 취급을 안 받아도 된다는 생각들을 고집하는 사람들을 "수구" "꼴통 보수"라고 합니다. 이러한 "수구"적 생각들은 "평등," "인권," "자유"와 같은 근대적 가치와 반대되는 "낡은" 생각이고 폐기되어야 할 태도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제 자리로 돌아가자"라는 말은 100년 전 3.1혁명을 일으킨 우리 조상들이 외친 자주, 독립, 평화, 자유, 평등과 같은 근대적, "진보적" 가치와 이념을 "보수"하자는 것입니다. 3.1 자주 독립운동 100주년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2019년, 새해에는 이 운동의 이념과 가치를 되찾고 지키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1919년 3.1혁명의 이념과 이상은 바로 4.19학생운동의 이념이었습니다. 그리고 1980년 5.18광주민주민중혁명은 3.1혁명의 이념적 전통을 이어 받은 것이었습니다. 4.19를 탄압하고 5.18을 학살한 세력이야말로 "수구" 세력들이고 3.1혁명의 반동세력들이었습니다. 1919년 3.1혁명 100년을 기념하는 2019년에는 3.1혁명의 정신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주독립이고, 남북 분단의 극복이고, 이 땅에 평화를 되찾는 일입니다. 나아가서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공존, 공영을 경영하는 것입니다.
사회생활과 인간관계의 "평화"
2016년 겨울, 우리의 "촛불"혁명은 바로 이런 "보수적" 기본질서를 회복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정치적인 관계 설정에 있어서나, 개인적인 관계 설정에 있어서, 나아가서 경제적 관계, 생산자와 수요자, 노사관계 설정에 있어서, 남녀관계, 성평등, 빈부격차, 장애인 문제, 노인문제 등 촛불혁명 이후 거리로 터져 나온 누적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광범위하고 원초적인 혁명을 외치고 부르짖은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촛불혁명은 박근혜, 이명박 정권의 비리와 부패를 떠받든 "수구"세력을 추방하고 법적 처벌 등으로 감옥에 가두었지만, 그것으로 할 일을 다 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망가진 민주적 사회, 정치 질서를 회복하고 "제자리"를 찾는 데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를 실감하는 사자성어가 바로 올해 대학교수들이 정한 "중임도원(重任道遠)," 즉 책임과 할 일은 많은데 갈 길은 멀다는 말이 맞습니다.
지난 정권의 부패한 권력자들을 재판에 넘기고 감옥에 가두는 것으로 촛불혁명이 끝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1919년 3.1혁명의 민주주의적 이념과 가치를 다시 선언하고 실천해야 하고, 1961년 4.19학생혁명의 가치와 이념을 구현해야 하며, 1980년 광주민주민중항쟁의 기본 정신을 계승해야 하고, 남북분단을 극복하고 군부 독재세력과 군산합의체를 청산하고 평화적 통일을 향한 새로운 질서를 확립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박정희의 고도경제성장 정책의 부작용과 제반 적폐들을 청산하는 사회 경제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혁명의 과제가 산적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헌정질서인 행정, 입법, 사법, 언론 운영의 파행, 그리고 언론과 학문과 종교 사상 등에 잠입해 있는 기본적인 인권 문제들도 있습니다. 속된 말로 동아일보사 건물에 크게 써 붙인 말대로 "엉망"입니다.
이 "엉망"을 고치려면,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질서가 잡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질서는 강제로, 무력으로, 독재로 잡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질서는 평화의 질서입니다. 평화는 전쟁에 반대되는 상태, 무기를 사용하여 서로 죽이고 죽는 전쟁, 혹은 나라를 무력으로 지킨다는 "국가 안보"를 말할 때만 쓰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 안보" -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안녕. 너와 나, 우리의 안녕과 질서를 말할 때도 평안을 말하고 평화를 말합니다. 평화란 전쟁과 반대되는 말만이 아니라, 경제와 사회체제, 인간관계에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평화의 한자인 平和를 살펴보면, 쌀, 혹은 쌀밥이 사람들 입에 골고루 들어간다는 뜻이니, 경제적 의미와 사회적인 평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평화는 경제"라는 말을 하는 겁니다. 새해에는 우리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즉 경제생활에서, 기업활동에서, 노동의 현장에서, 일상생활에서, 여행에서, 교육에서, 문화생활에서 평화를 추구해야 하겠습니다. 기업주와 노동자 사이의 관계에 평화가 있으려면, 인간을 물건 정도로, 사물화 (私物化)하고 쓰다 버릴 수 있는 소비재 정도로 생각하는 생명 경시의 버릇을 버려야 하겠습니다.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부당하게 잃고 굴뚝에 올라가 목숨을 걸고 복직을 시위를 해야 하는 일이 없어져야 하겠습니다. 공장에서 기업주가 노동법과 산업안전법을 어기고 인력을 축소한 결과로 젊은 노동자의 생명을 빼앗는 일은 "반평화"입니다. 몇 해 전 팽목항 앞바다에 침몰한 세월호에서 구조되지 못하고 어린 생명을 잃어야 했던 참사 역시, 전쟁 이상으로 반평화였습니다. 우리는 어디를 가도, 평화롭게, 평안한 마음으로 다닐 수 없게 되었습니다. 길에서는 교통사고로, 여관에서는 가스 사고와 화재의 위험으로, 배에서는 침몰 사고로, 기차는 탈선 아니면 충돌로, 하늘에서는 비행기 기계 고장과 테러로, 직장과 거리에서는 성추행과 성폭행, 여성 혐오, 집안과 밖에서 겪어야 하는 노인들의 절망... 사람들의 마음과 몸의 "안녕"과 "평안"과 "평화"가 사라졌습니다. 평화가 곧 경제일 뿐 아니라, 인권이고, 정의이고, 생명입니다.
새해에는 "인간 안보," 사회생활과 인간관계에서의 "평안"과 "평화" 그리고 "안녕"을 제도적으로, 구조적으로 일상화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하루하루의 일상생활이 인간관계에 있어서나, 사회생활에 있어서 평화롭지 못하면서 "거대담론"의 평화, 남북의 분단을 극복하고 평화 통일을 이룩하는 일이란, 사상누각(砂上樓閣), 모래위에 지은 집입니다. 한국교회는 교회 안과 밖에서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되찾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다"라는 예수의 당부를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분단 한국의 평화 회복이 목적이면, 그 방법 역시 평화여야 합니다. 정치적 평화가 목적이면, 개인과 개인 사이의 평화, 생각과 위치가 다른 사람들 사이의 평화, 인간 생명의 안녕과 평안 역시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개인의 마음의 평화, 인간과 인간 사이의 평화, "갑"과 "을" 사이의 평화 없이 한 나라의 평화, 전쟁 없는 평화는 어림도 없습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평화 역시 강압으로 되지 않습니다. 평화로운 방법 밖에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평화를 이루는 일과 책임은 무거운데 갈 길은 멀어 보이기만 합니다. 우리 정치의 궁극적인 목적, 우리 인생의 궁극적 관심은 모두 평화입니다.
2019년 새해의 인사는 "평화," "안녕하십니까?"로 나눕시다. 새해에는 평화의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