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박애(博愛), 겸애(兼愛), 범애(汎愛)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레위기 19:1-2, 9-10, 18, 갈라디아서 5:13-15, 마가복음 12:28-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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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아이들이 커서 학교에 갈 나이가 되면 취학통지서라는 걸 받게 되는데, 독일의 취학통지서에는 이런 경고문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귀댁의 자녀가 입학하기 전에 글자를 깨치면 교육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선행교육을 경고하는 문구입니다.

뇌과학자인 서울대 의대 서유헌 교수에 의하면, 인간의 뇌는 크게 3층 구조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1층은 생명유지의 뇌, 2층은 감정과 본능의 뇌, 그리고 마지막 3층은 공부와 이성의 뇌입니다. 각각의 뇌기능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1층과 2층의 기초공사가 잘 되어야 3층의 뇌가 제 역할을 잘 할 수 있습니다. 즉 감정과 본능의 뇌가 제대로 발달해야 공부와 이성의 뇌가 제 기능을 다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감정조절 기능을 하는 뇌가 극도로 발달하는 시기는 유아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기엔 무엇보다 인성교육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세살 버릇 여든 간다"는 옛말이 딱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아이들은 그 나이에 인성교육이 아니라 인지교육을 받습니다. 때문에 아이들은 감정조절 기능을 담당하는 뇌가 발달할 기회를 빼앗깁니다. 그리고 이 기능의 뇌가 약한 아이들은 쉽게 학교폭력이나 게임중독에 빠지게 됩니다. 인간의 뇌는 태어나서 20년 동안 서서히 발달하고 시기별로 발달하는 부분이 다르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 중에서 뇌 발달단계와 맞지 않는 선행교육이 가장 나쁘다고 합니다. 교육선진국이라는 독일의 취학통지서에 왜 그런 경고문이 있는지 이해가 됩니다.

통계청이 발표한 우리나라 청소년 사망 원인의 1위는 여전히 '자살'입니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자살하는 가장 큰 원인은 성적과 진학에 대한 고민입니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주관적 행복지수가 OECD 회원국 중 꼴찌라는 것은 이미 비밀도 아닙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일생에서 가장 예민한 시기에 경쟁 위주의 입시교육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들이 무모한 입시경쟁에 장단을 맞추는 사이에 사랑하는 자녀들을 죽음의 문턱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최근 종영된 TV 드라마 <스카이 캐슬>이 그것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한동안 '월화수목금토일'이 아니라 '이화수목금토일'이었습니다. 연일 화제가 된 세 TV 드라마, 즉 JTBC의 <스카이 캐슬>과 SBS의 <황후의 품격> 그리고 tvN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모두 이화여대 동문 작가들의 작품이었기 때문입니다. <스카이 캐슬>을 쓴 유현미 작가는 불문과를 졸업했고, <황후의 품격>의 김순옥 작가는 국어국문과를 졸업했으며,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송재정 작가는 신문방송학을 전공했습니다. 이 세 드라마가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안방극장을 책임졌기 때문에, '월화-수목금토일'이 아니라 '이화(梨花)-수목금토일'이라 불렸던 것입니다. 이중 유현미 작가의 <스카이 캐슬>은 한 고급 주택단지 안에 사는 부모들이 자신의 자녀들을 서울대 의대를 비롯한 '명문대'에 보내기 위해 거액의 사교육비는 물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내용을 뼈대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상류층 부모들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블랙코미디로 역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드라마에서 '캐슬'(Castle)은 '성'(城)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배타성과 폐쇄성의 상징입니다. 사실 그것은 봉건시대의 잔재입니다.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일종의 선민의식을 갖고 남들보다 자신이 우월하다 여기며 삽니다. 신분제도는 무너졌지만 신분의식은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철저히 욕망하면서 자신이 쌓은 부와 권세를 자녀들에게 대물림하기 위해 처절히 투쟁합니다. 그런데 이런 드라마가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은 이유는 이것이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은 우리 자신의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기적이며 생존의 욕구를 가진 존재들입니다. 남들보다 더 잘나고 싶고, 남들보다 더 갖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입니다. 그리고 이 드라마의 주제가인 <위 올 라이>(We All Lie)의 가사처럼, 우리는 얼마든지 자신의 욕망을 감추고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이 드라마에서 우리가 본 것은 '극단적인 자기애,' 즉 자기사랑입니다. 캐슬 안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자녀들을 끔찍이도 사랑합니다. 곧 자기 자신이기도 한 자녀들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고 모든 것을 겁니다. 하지만 바로 옆집의 아이들은 무자비한 경쟁의 대상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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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JTBC 'SKY캐슬' 홈페이지 갈무리)
▲'SKY캐슬' 포스터

심리학에서 자기 자신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고 그것에 집착하는 것을 '자기애'(自己愛)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Narcissism"이라고 합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이 '나르시시즘'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꽃 이름의 유래를 알아야 합니다. 바로 수선화(水仙花)입니다. 영어로는 "Narcissus"입니다. 그 뜻은 '망연자실'(茫然自失)입니다. '멍하니 정신이 나간 듯함'이라는 뜻입니다. 샘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연모하여 수선화가 되었다는 한 미모의 청년의 이름입니다.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따르면 나르시서스는 강의 신 케피서스와 강의 요정 레이리오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망연자실'이라는 뜻 그대로 한번 쳐다본 사람은 정신을 잃을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그 아이가 두 살 때의 일입니다. 강변에서 놀고 있던 이 아이를 보고 지나가던 웬 눈먼 여자(테이레시아스)가 '저 아이는 자신의 얼굴을 보지 않아야 오래 산다'는 이상한 말을 던졌습니다. 나르시서스의 앞날에 대한 불길한 암시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불행을 염려하여 절대로 주변에 거울을 두지 말 것과, 아들이 강에 나갈 때면 반드시 수면을 흔들어 물에 비친 제 모습을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 말을 잘 따른 요정들 덕분에 나르시서스는 열여섯 살이 될 때까지 자신의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나르시서스가 숲으로 사냥을 나갔는데 마침 숲의 요정인 에코(Echo)가 이 아름다운 소년을 보고 그만 그 자리에서 불같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불쌍하게도 에코는 남이 하는 말을 따라 하는 것 외에는 아무 말도 못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에코는 멀찍이서 자신을 숨기고 나르시서스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사냥 온 친구들을 잃어버렸는지 나르시서스가 큰 소리 외칩니다. '어이, 거기 누구 없어?' '어이, 거기 누구 없어?' 에코가 따라했습니다. (잘 아시지만, '메아리'란 뜻의 영어 "echo"는 바로 이 요정의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누구 있으면 이리 나와 봐!' '누구 있으면 이리 나와 봐!' 또 에코가 대답했습니다. '거기 나 따라 하는 거 누구야 이리 나와 봐!' '거기 나 따라 하는 거 누구야 이리 나와 봐!' 하지만 에코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만 숨어 있던 곳에서 뛰쳐나와 나르시서스의 목에 팔을 감았습니다. 그러자 기겁을 한 나르시서스가 뒤로 물러나며 이렇게 말합니다. '저리 가! 너 같은 것에 안기느니 차라리 죽고 말겠어!' 매몰찬 이 한 마디를 남기고 나르시서스는 숲을 떠나 버렸습니다.

에코는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새빨개진 얼굴을 감추느라 깊은 숲속으로 달아나버렸습니다. 이때부터 에코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동굴 깊이 숨어 살았습니다. 사랑을 거절당한 슬픔 때문에 나날이 여위어 갔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형체는 다 사라지고 목소리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가 들었습니다. 그는 가차 없는 복수를 실행에 옮겼습니다.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말입니다. 람누스라는 깊은 산 속에 아주 맑은 샘이 하나 있었습니다. 물이 어찌나 맑았던지 숲속의 짐승들도 그곳에는 가지 않았고 낙엽이나 나뭇가지도 그 샘물만은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사냥에 지친 나르시서스가 더위와 갈증에 쫓겨 그 샘가를 찾았습니다. 물을 마시려고 몸을 구부리는 순간, 그는 흠칫 놀라고 말았습니다. 빛나는 두 눈, 어깨까지 내려온 황금빛 고수머리, 통통한 장밋빛 뺨, 상아같이 길고 흰 목, 반쯤 벌어진 붉은 입술... 이 아름다운 사람의 모습에 나르시서스는 그만 넋을 잃고 말았습니다. 망연자실! 글자 그대로 넋을 잃었습니다. 그는 그것이 자기 자신의 얼굴인 줄은 까맣게 몰랐습니다. 한 번도 제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샘 속의 요정이려니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수면에 가까이 가져갔습니다. 그리고는 그 사랑스런 몸을 끌어안으려고 두 팔을 물속에 담갔습니다. 그러자 요정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당황한 나르시서스가 어쩔 줄 몰라 하는 동안 어느새 그 요정은 다시 나타나 그의 가슴에 다시 불을 질렀습니다. 나르시서스는 그곳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잊고 수면에 비친 제 모습만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습니다. 자신을 사모했던 수많은 요정들처럼 나르시서스 또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열병으로 그렇게 홀로 야위어 갔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그 샘가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애를 태우다 죽었던지 그가 죽은 자리엔 아무 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 자리엔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이 피어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Narcissus," 즉 수선화입니다. "그대는 차디찬 의지의 날개로 끝없는 고독의 위를 나는 애달픈 마음..." 김동명 작사, 김동진 작곡의 한국가곡 <수선화>입니다. 수선화의 꽃말은 '자기애'입니다.

자기애는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극단적인 자기애'는 세상과 자신을 파괴합니다. '안으로만 향한 자기사랑'은 그 에너지를 속에서 감당하지 못하고 내파(內破), 즉 안쪽으로 파열합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나르시시즘은 '남과 세상을 외면하는 닫힌 마음'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우리는 이렇게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인 극단적인 자기애를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우리가 자주 듣던 말씀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말씀은 성서를 관통하는 대주제입니다. 구약성서 레위기에서 하나님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니라"(19:18)고 말씀하십니다. 신약성서의 마태, 마가, 누가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 22:35-40, 마가 12:28-31, 누가 10:25-28). 사도 바울 역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하신 말씀 가운데 모든 계명이 다 이루어졌음을, 그래서 "사랑이 율법의 완성"임을 강조합니다(로마서 13:8-10, 갈라디아서 5:13-15).

그런데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는 예수님이 결코 '너 자신은 사랑하지 말라'고는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서는 결코 자신에 대한 사랑을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애의 정반대인 자기학대를 죄라고 꾸짖습니다. 구약성서가 말하는 죄 가운데 '아온'(ערו)이라는 개념의 죄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과의 관계가 비뚤어져 '자신을 미워하고 학대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서는 죄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너 자신을 사랑하지 않느냐. 그와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 이 말씀은 자기사랑과 이웃사랑의 적당한 균형과 배분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힘이 내 안에 갇히지 말고 이웃에게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사랑이라는 힘의 속성과 본질을 알고 계십니다. 사랑이라는 그 엄청난 에너지가 자기 안으로만 향하면 그것은 자기 자신까지도 파괴하는 악마적 힘이 될 수 있음을 아셨습니다. 주님은 사랑과 증오의 이분법을 거부하십니다. 사랑이라는 힘이 증오의 힘이 될 수도 있음을 아십니다. 만약 사랑이라는 힘이 내 안에 갇히고, 사랑의 길이 막힌다면, 그 힘은 안에서 폭발하여 자신과 이웃을 죽이는 악마적 힘이 될 수 있음을 보고 계십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는 예외 없이 자신을 사랑하는 엄청난 에너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삼풍백화점 붕괴 당시 철근 더미 속에서도 수십일 만에 구조되어 나온 사람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모두에게는 자신의 생명에 대한 사랑의 깊고 푸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힘이 없었다면 인류는 험한 자연환경 속에서 오늘날까지 생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힘은 다름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 생명력의 원천은 하나님입니다. 문제는 그 힘의 방향입니다. 그 힘의 범위입니다. 그에 따라 그 힘은 생명의 힘이 되기도 하고 죽음의 힘이 되기도 합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은 단순한 도덕률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나 안에 갇힌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는 자기 자신을 사랑합니다. 자신의 분신인 자녀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사랑은 거기서 멈추면 안 됩니다. 사랑은 거기에 갇히면 안 됩니다. 자신과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선 사랑, 경계를 넘어선 사랑, 그래서 차별이 없는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1894년에 미국의 한 원주민 추장이 자신의 부족이 살고 있는 땅을 팔라는 백인 정부에 대해 보낸 유명한 글입니다.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대지의 온기를 사고 팔 수 있는가? ... 대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것들을 팔라는 말인가? 우리는 대지의 한 부분이고 대지는 우리의 한 부분이다. 향기로운 꽃은 우리의 자매다. 사슴, 말, 큰 독수리, 이들은 모두 우리의 형제들이다. 만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만물은 마치 한 가족을 맺어 주는 피와 같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당신들도 이 공동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결국 당신들도 우리 모두가 한 형제자매임을 알게 될 것이다." 교우 여러분,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이처럼 모든 것이 '나의 일부'입니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서 한 몸입니다. 이렇게 열린 눈으로 세상을 보면 천지에 내가 가득하건만 오늘도 우리는 내가 어디 있는지 몰라 헛되이 나누고, 가르고, 배척하며 삽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글입니다. "모든 잎사귀를 사랑하라. / 모든 동물과 풀, / 모든 것을 사랑하라. / 네 앞에 떨어지는 빗줄기 하나까지도 / 만일 네가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다면 / 모든 것 속에 담긴 신비를 보게 되리라. / 만일 네가 모든 것 속에 담긴 신비를 본다면 / 날마다 더 많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 네 자신과 세상 전체를 사랑하게 되리라." 그렇습니다. 마음을 열면, 존재를 열면 우리는 고립된 자아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서로 연결된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열린 사랑'만이, 나와 내 가족의 경계를 넘어선 사랑만이 존재의 신비를 보게 하고, 이 신비가 다시 더 큰 사랑을 꽃피우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약 5백 년 전에 중국에 묵자(墨子)라는 사상가가 있었습니다. 일찍이 유학(儒學)을 배웠지만 곧 거기서 떠났습니다. 공자(孔子)는 먼저 자신의 어버이를 사랑하고 나서 다른 사람의 어버이를 사랑하라 했습니다. 먼저 자신의 아이를 사랑하고 나서 다른 사람의 아이를 사랑하라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묵자는 생각했습니다. 세상이 어지러워진 까닭은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랑이 차별적으로 베풀어지기 때문이 아닌가! 결국 그는 공자가 말한 인애(仁愛)라는 사랑이 '차별적인 사랑'이라고 비판하면서 '차별 없는 사랑'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지러운 세상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인애라는 '좁은 사랑'을 넘어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하는 '넓은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묵자는 이 차별 없는 사랑을 '겸애'(兼愛)라 불렀습니다. 세상에 왜 다툼과 갈등이 있습니까? 묵자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랑을 고르게 베풀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은 오직 자기의 나라만 사랑하고 남의 나라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제 나라의 백성을 강제로 동원하여 다른 나라를 공격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직 자신의 집안만을 사랑하고 남의 집안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온 집안사람을 동원하여 다른 집안을 공격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만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온 힘을 다해 다른 사람을 해칩니다. 하지만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이처럼 자신만을 사랑한다면, 반드시 강자가 약자를 공격하고, 부자가 빈자를 억압하며, 귀한 자가 천한 자를 업신여기게 될 것이라고 묵자는 보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이 바로 겸애(兼愛)입니다. 즉 차별 없는 사랑, 넓은 사랑, 평등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으로 서로를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슬퍼하는 자가 위로를 받고, 아픈 자가 치료를 받으며, 수고롭게 일한 자가 쉴 수 있다고 묵자는 말했습니다. 이러한 묵자의 사상을 보고 조선의 주체적인 사상가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이 범애(汎愛)를 이야기했습니다. 이 역시 '차별 없이 널리 사랑함'을 뜻하지만, 묵자의 겸애와 달리 인간 사이의 차별 없는 사랑을 넘어서 자연 만물 사이의 차별 없는 사랑까지 나아갔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이 단순해 보이는 명제가 성서와 기독교의 모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가장 믿기 어려워진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바로 이 명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을 길에서 만나 세워놓고 한번 물어보십시오. 그들이 받은 인상으로는, 하나님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들이 우리로부터 받은 인상은 기독교의 하나님은 누군가를 정죄하고, 배제하고, 혐오하고, 벌주는 신입니다. 그 하나님은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품어주고 용서하던 어머니나 할머니보다 못하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누가 기독교를 박애(博愛)의 종교라 했습니까? 박애 역시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함'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가 보여주는 사랑은 협애(狹愛)입니다. 즉 좁은 사랑입니다. 차별적인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은 바리새인도 했습니다. 나 자신만 사랑하는 것, 내 자식만 사랑하는 것, 내 혈육만 사랑하는 것, 내 동향(同鄕)만 사랑하는 것,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없어서 세상이 이렇게 어지러운 것은 아닙니다. 내 사랑이 거기에 머물러 있기에, 내 사랑이 거기에 갇혀 있기에 그 사랑은 이웃에 대한 증오와 혐오와 배제와 멸시의 힘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요한 3:16)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은 '세상'입니다. 성서 원어로 '코스모스'(Cosmos)입니다. 즉 우주만물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 만물을 가슴에 품으셨습니다. 차별 없이 모든 존재를 사랑하셨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서로에 대한 완전한 사랑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계를 넘어 온 세상을 완전한 사랑으로 끌어안으셨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는 자기애에 목말라하는 존재들입니다. 자기사랑에 목마른 나약한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더 넓고 깊은 사랑의 세계로 초대하십니다. 십자가 위에서 모두를 위해 피를 흘리신 그 숭고한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경쟁에서 '탈락'(脫落)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칩니다. <스카이 캐슬>이 그걸 보여줍니다. 그런데 아십니까? '탈락'이라는 용어는 원래 불가의 용어인데, 세상에서는 '낙오'의 의미로 쓰이지만 원래 그 뜻은 '벗어 버린다'는 뜻입니다. 즉 집착에서 벗어나 몸과 마음이 해탈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불가에서는 그렇게 탈락한 사람을 '주인공'(主人公)이라고 부릅니다. 득도한 인물이라는 뜻입니다. 외부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참된 자아를 의미합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이 극심한 경쟁사회에서 그렇게 '탈락한 주인공'이 되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남들의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참 자아를 찾아보시기 않겠습니까. 그 길이 박애(博愛)의 길입니다. 겸애(兼愛)의 길입니다. 그리고 범애(汎愛)의 길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만물의 근본원리 안에 계시된 참된 사랑의 길입니다. 그 차별 없는 사랑, 넓은 사랑의 길로 나아가십시오. 그 길이 바로 오늘날 모두가 '스카이 캐슬'이라는 모래성을 쌓고 그 안에 갇혀 사랑이라는 긍정의 힘으로 오히려 자신을 파괴하고 자녀를 학대하고 이웃 죽이는 우리 모두를 구원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그 넓은 사랑, 자신의 손과 발에 못을 치는 사람들까지도 용서하신 그 깊고 푸른 사랑, 우주만물과 온 생명을 가슴에 품은 그 하나님의 참 사랑의 힘으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세상을 살리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형제[자매]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라디아서 5:13-15). 아멘. (2019.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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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봉사를 개교회 성장 도구로 삼아온 경우 많았다"

이승열 목사가 「기독교사상」 최근호(3월)에 기고한 '사회복지선교와 디아코니아'란 제목의 글에서 대부분의 교단 총회 직영 신학대학교의 교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