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고민에 병들지 않으려면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시편 55:1-7, 빌립보서 4:4-7, 마가복음 1:1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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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한 인간이 해변의 모래밭을 걸어가면 그 옆에 나란히 고민의 발자국도 찍히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고민은 우리의 삶과 뗄 수 없이 밀접하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많은 고민을 가지고 삽니다. 청춘의 고민, 사랑의 고민, 내일의 염려, 어제의 회한...

미국 애리조나 주에 가면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만드는 독특한 인형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Worry Doll"입니다. 직역하면 '걱정의 인형'입니다. 그것은 원래 남미 원주민들, 특히 과테말라 토착민 부족 사이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것인데, 정확한 뜻은 '대신 고민해주는 인형'이라는 뜻입니다. 원주민들은 그 인형을 만들어 선물합니다. 한 개가 아니라 한꺼번에 다섯 개씩 한다고 합니다. (그만큼 인간의 걱정이 많다는 뜻이겠지요). 실제의 "Worry Doll"은 우리나라의 쌈지처럼 생긴 작은 주머니 안에 다섯 개씩 들어있습니다. 각각의 인형의 키는 겨우 1센티미터 안팎입니다. 손톱만한 크기입니다. 하지만 색실을 감아 팔다리도 만들고 눈, 코, 입도 붙인 어엿한 인형입니다.

과테말라 고산지대 토착민들에게는 이런 전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삶에서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Worry Doll"에게 말하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자신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를 이 "Worry Doll"에게 말한 뒤 그 인형들을 베개 밑에 넣고 자라, 그러면 이 '대신 고민해주는 인형들'이 그 고민들을 밤사이에 다 가져간다는 것입니다. 이제 자신은 그 문제에 대해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언뜻 보면 미신입니다. 그러나 "Worry Doll"에 담긴 원주민들의 깊은 지혜를 알고 나면 그렇게 속단하기 힘듭니다.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본래의 뜻은 아마도 이런 것일 듯합니다. 고민과 씨름하고 있으면 오히려 고민이 나를 묶어 버린다, 고민은 거리를 두고 바라볼 때 오히려 쉽게 풀린다. 고민에 묶이지 말고 그것과 거리를 두라는 말입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Worry Doll"은 그렇게 고민과 자기 자신 사이에 거리를 두게 만드는 매개체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이 고민과 걱정으로 가득 차 흙탕물처럼 혼탁하십니까? 그 흙탕물을 맑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고민과 걱정으로 휘저어 혼탁한 흙탕물을 맑게 하는 최선의 방법은 그 속에 뛰어들어 헤집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물 속에서 걸어 나와 조용히 앉아 있는 것입니다. 흙탕물을 맑게 하겠다고 거기에 뛰어들면 아무리 노력해도 물은 더 혼탁해질 따름입니다. 거기에서 걸어 나와 그것과 거리를 두고 조용히 앉아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흙탕물은 곧 맑아집니다.

걱정과 고민과 염려가 없는 인생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다가 마치 저만치 서서 나무를 바라보듯이, 얼마만큼 거리를 두고 우리의 고민을 바라보면 문득 그것이 그리 고민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슬픔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을 세우는 기둥들이 거리를 두고 서 있듯이, 어느 만큼의 간격을 두고 서서 슬픔을 바라보면 문득 그것이 그리 슬퍼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고민과 슬픔이 끊어질 때가 거의 없지만, 우리가 고민하는 일들의 상당수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일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 문제들과 씨름하느라 어처구니없이 소중한 인생의 시간들을 소진하는 적도 많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사상가 노먼 빈센트(Norman Vincent)는 이렇게 조언합니다. 자신이 고민하는 모든 사항을 낱낱이 종이에 적어라, 그런 다음 그것을 봉투에 넣고 풀칠을 하라, 그 봉투를 상자 안에 넣어 자신만이 아는 장소에 일주일 동안 넣어둔다, 단 그 동안에는 거기 적힌 고민들에 대해 절대로 고민하지 않는다, 일주일 뒤 그 상자를 가져다가 봉투를 뜯고 그 안에 적힌 고민의 목록들을 다시 읽는다, 그리고 각각의 고민거리에 대해 다음의 결정 중 하나를 선택한다. 1. 당장에 그 고민을 해결할 행동을 개시한다. 2. 그 고민에 대해서는 영원히 잊어버리기로 결정한다. 3.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그 고민에 대한 결정을 다시 일주일 뒤로 연기한다.

그러나 우리의 걱정과 고민을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명상입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 계시면서 걱정과 고민이 많으셨던 것 같습니다. 인간이 된 신은 인간의 조건과 실제에서 빗겨나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쉬지 않고, 홀로,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슬플 때나 비통할 때,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 기적과 치유를 베푸시기 전에, 그리고 베푸신 후에, 시련을 앞두고, 특히 시련의 한복판에서 주님은 늘 기도하셨습니다. 마가복음 9장에는 귀신들린 아이로부터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제자들이 예수님께 고민을 털어놓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우리는 귀신을 내쫓지 못했습니까?"(마가 9:28).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기도였습니다. "기도로 [혹은 기도와 금식으로] 내쫓지 않고는 어떤 수로도 내쫓을 수 없다"(마가 9:29).

멕시코에 가면 '평원 명상'이라는 독특한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보통 3박4일 동안 평원에 나가 하는 명상인데, 참가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고작 담요 2장과 마른 빵, 건과류의 열매 한 통, 물 세 병, 그리고 안전을 위한 몇 가지 지시사항이 전부입니다. 그것들을 들고 참가자들은 드넓은 평원으로 알아서 흩어져 3박4일을 홀로 지내다 옵니다. 기도를 하라든가, 단전호흡을 하라든가, 참선을 하라든가 하는 아무런 명상 지침도 없습니다. 특별한 호흡법이나 신체 동작을 위주로 하는 다른 명상법들과 사뭇 다릅니다. 참가자들은 그저 나흘 동안 광활한 평야에 흩어져 홀로 지내다 오는 것입니다.

처음에 이 명상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이 프로그램은 꽤나 독특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에 큰 흥미를 느낀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차츰 지루해지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들판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풀도 별로 없고, 주황색의 바위와 멀찌감치 서 있는 커다란 페요테 선인장들밖에는 눈에 띄지 않습니다. 고즈넉한 들판 한 가운데 갑자기 홀로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 명상자들은 이내 심심해지기 시작합니다. 뭔가 흥미로운 것이 없나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합니다. 심심한 나머지 담요를 머리에 뒤집어쓰기도 하고, 어깨에 두르기도 하고, 엉덩이 밑에 깔고 앉기도 합니다. 아예 땅바닥에 드러누워 이런저런 회상에 잠기거나 잠을 청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무도 없는 평원에서 3박4일을 혼자 지낸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깨달음은 바로 그 순간에 옵니다. 가장 무료한 그 시간에 참가자들은 실로 오랜만에 자신이 온전히 자기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평원은 세상의 모든 뉴스와 정보로부터 단절되어 있습니다. 적막하기만 합니다. 언뜻 보면 세상의 모든 정보와 뉴스들이 필요한 것 같지만 사실 그것들은 우리의 본질적인 삶과는 별 상관이 없는 문제들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것을 깨닫는 순간 참가자들은 갑자기 자신이 진정으로 살아있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삶의 여러 고민과 불필요한 정보의 홍수로부터 멀어지는 순간, 그들의 눈이 활짝 뜨이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안팎의 것들을 보다 자세히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유명한 선승(禪僧)의 말이 떠오릅니다. "생각에서 벗어나니 내 집 마당에 꽃이 피어 있었네."

그러고 나면 그 때까지 아무 것도 없는 빈 들판이라고 생각했던 그 평원이 사실은 무수히 많은 생명체가 살고 있는 곳임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허물을 벗는 곤충, 꼬리를 흔들며 지나가는 벌레, 눈치 빠른 도마뱀이 있는가하면 흙속에서 고개만 내밀고 노려보는 놈... 발밑을 조금만 훑어도 그 아래는 누가 뿌려놓기라도 한 듯 이름 모를 씨앗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왜 네가 아니고 나인가』라는 책에 "Standing Bear"라는 이름의 아메리카 원주민 추장이 한 말이 떠오릅니다. "원주민 부족에게 세상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곳이다. 백인 부족은 지상으로 신의 빛을 보내달라고 끊임없이 조른다. 하지만 나의 라코다 부족은 이 지상이 늘 신의 빛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안다. 새벽의 빛, 낯의 빛, 밤의 빛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안다. 우리가 고민에서 벗어나 눈꺼풀을 열기만 하면 언제든지 그 빛을 신비롭게 바라볼 수 있다."

'평원 명상'에 참가한 사람들은 대소변도 들판에서 처리하고, 등을 찔러대는 돌들을 치우느라 잠을 설치기도 하지만 자신의 삶과 본질적으로 상관없는 정보와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에 대한 고민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재발견하게 됩니다. 나아가 이 세상이 이미 신의 빛으로 가득 차 수많은 생명이 만개(滿開)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빛과 생명들에 자신을 새로 연결합니다.

현대 문명과 기술은 마치 사람의 영혼을 메마르게 하는 사막과 같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예전부터 신앙의 수도자들은 영혼을 새롭게 하기 위해 사막으로, 사막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기도와 명상으로 존재의 근원을 일깨웠습니다. 우리 인간은 사물과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마음속에서 미리 만들어낸 문장들을 통해 그것들을 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도와 명상은 그 선입견과 거짓된 진실을 깨뜨려 나와 세상을 똑바로 보게 해줍니다.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신부는 "명상은 하느님에 대한 초자연적 사랑이요 인식"이라고 했습니다. 기도와 명상은 우리 안의 생명과 존재가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이고 무한한 원천에서 나온다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명상과 기도는 하나님께서 창조적으로 우리 삶에 개입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길러주고 완성시키고자 하시는 성령의 내적 활동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나아가셨습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세례를 받으시자마자 성령이 "즉시"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냈다"고 말합니다(마가 1:12). 예수님은 거기서 사십 일 동안이나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기도하셨습니다. 사탄의 시험은 이 기도 후에 왔습니다. 왜 굳이 "몰아냈다"는 표현을 썼을까요? 세상의 모든 비본질적인 것들과 '강제로' 떼어진 시간, 그 적막한 광야의 기도를 위해서였을 겁니다. 예수님의 광야기도는 침묵이었을 것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모든 인간의 문장들과의 단절이었을 것입니다. 모든 편견과 거짓과 두려움의 끊어냄이었을 것입니다. 대신 그분의 기도는 하나님께 자신을 비추어보는 명상이었을 것입니다. 공생애를 앞둔 고민과 십자가를 지게 될 두려움을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와 생명의 은총에 비추어보는 절대고독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침묵이 없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내가 쉼 없이 말할 때 기도자는 하나님이 말씀하실 시간을 뺏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으로부터 단절이 없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나의 고민과 염려에 사로잡혀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에게 집중하지 못합니다.

영국의 윌리엄 오슬러 경(Sir William Osler)은 예일대학 학생들에게 '매일의 칸막이'라는 자신의 생활방식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은 그가 배를 타고 대서양을 여행할 때 생각해 낸 것인데, 그는 배의 선장이 스위치 하나만 누르면 칸막이들이 닫혀 배의 어느 한 부분에 물이 새더라도 배가 침몰하지 않도록 차단하는 장치를 보았습니다. 그는 이것을 인생에 적용하여 긴 항해와도 같은 인생의 여러 순간에 '매일의 칸막이'를 닫으라고 말합니다. 즉 스위치를 눌러서 과거의 일들이 오늘을 어지럽히지 않게 막고, 또 다른 스위치를 눌러서 미래의 일들도 오늘을 어지럽히지 않게 막아버리라고 말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과거의 짐과 미래의 걱정이 오늘 우리는 짓누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미래를 미리 계획하지도, 준비하지도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주의 깊게 생각하고 철저하게 내일을 준비해야 합니다. 하지만 내일을 '염려'해서는 안 됩니다. 성서에서 '염려'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메림 나오'입니다. 이 말은 두 단어, 즉 '메리조'와 '누스'가 결합된 것입니다. '메리조'는 나누다는 뜻이고 '누스'는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염려라는 단어의 성서적 본뜻은 '마음이 나뉘다'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나뉘면 우리는 집중할 수 없게 됩니다. 마음의 중심이 흔들리면 우리는 방향감을 잃고 큰 불안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래서 근심은 마치 계속해서 머리에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과 같다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반인륜적인 일이지만 과거에 죄수를 고문할 때 이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머리 위에 물통을 달아 놓고 물방울이 한 방울씩, 한 방울씩 똑 똑 계속해서 머리에 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그 물방울 소리가 마치 망치로 머리를 내리치는 것 같은 충격을 주어 사람을 미치게 한다고 합니다. 근심이란 그와 같습니다. 내 머리 위에 계속해서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과 같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인간은 결국 미치거나 치명적인 질병에 걸립니다. 큰 근심이 아니라 작은 근심들을 그렇게 방심하고 방치하다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가 있습니다. 미국 콜로라도에는 '롱의 봉우리'라는 한 거대한 나무가 있었습니다. 4백 년 이상 온갖 비바람에도 굳건히 서 있던 나무입니다. 14번이나 벼락을 맞았고 헤아릴 수 없는 눈사태와 폭풍우도 다 이겨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나무가 순식간에 쓰러졌습니다. 알고보니 딱정벌레 떼의 공격을 받은 것입니다. 작은 벌레들이 매일 조금씩 나무의 속을 파먹었습니다. 결국 그 나무는 버티는 힘을 잃고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오랜 세월 큰 시련을 버텨온 나무는 손가락으로 문지르면 죽일 수도 있는 작은 벌레들에 의해 쓰러지고 만 것입니다. 근심과 염려는 이처럼 작은 벌레와 같습니다. 한 방울씩 머리 위에 떨어지는 물방울과 같습니다. 그것을 매일 차단하지 않고는 인생이라는 우리 배는 아무리 타이타닉 같아도 이내 침몰하고 말 것입니다.

기도하십시오. 명상하십시오. 세상의 모든 언어와 단절하고, 자기 자신이 만든 문장과도 단절하고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인간은 어떤 사건 자체로 상처를 받기보다 그 사건에 대한 자신의 견해 때문에 더 상처를 입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근심과 염려를 낳는 마음의 상처는 어떤 사건 자체에서 오기보다 그것에 대한 자신의 '견해' 때문에 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고 명상하십시오. 그것은 영혼의 쉼입니다. 우리의 몸만 안식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이 평원에서, 광야에서 심심하게, 무료하게 아무 것도 안 할 수 있는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크게 잘못 알고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인간의 심장은 잠시도 쉬지 않고 죽을 때까지 일만 한다는 생각입니다. 실제 심장은 근면합니다. 하루에 석유 수송 열차 1대분의 피를 펌프질합니다. 그 에너지 방출량은 하루 24시간 석탄 20톤을 1미터 높이에 삽질해서 퍼 올리는 정도입니다. 이렇게 심장은 쉬지 않고 일하는 것 같지만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심장은 매번 수축할 때마다 잠깐씩 쉰다는 사실입니다. 모르셨지요? 심장은 '주인'의 눈을 피해 잠깐씩 쉽니다. 그런데 그 쉬는 시간이 일하는 시간보다 깁니다. 1분에 약 70회를 뛰는 심장은 하루에 실제로 9시간을 일하고 15시간을 쉽니다. 저는 우리가 의학적으로 건강하게 살려면 이 심장의 원리를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루 9시간만 일하고 15시간을 쉬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심장이 이렇게 하듯이 우리의 영혼도 하루 24시간 고민하고 번민하고 염려하고 걱정하는 일에서 쉼을 얻어야 합니다. '매일의 칸막이'을 쳐야 합니다. 딱정벌레의 공격을 막아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내가 당한 자존심의 상처보다 더 큰 아픔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 견해로부터 오는 근심,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온갖 상상으로 만들어낸 근심, 거기에서 오늘 내 영혼이 구원받아야 합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삶이 고민과 걱정의 흙탕물로 혼탁해져 있습니까? 어제의 상처와 내일의 염려와 오늘의 미련으로 흐려져 있습니까? 그 흙탕물 속에 두 발을 담그고 그 물을 깨끗하게 하려고 자꾸 휘젓지 말고 거기에서 걸어 나와 조용히 앉아 침묵하십시오. 그것과 거리를 두십시오. 여러분의 소중한 시간을 실제 있지도 않았고 실제 일어나지 않을 일들의 고민과 싸우느라 허비하지 마십시오. 내 언어와 단절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내 견해로 나를 괴롭히지 말고 나에 대한 하나님의 견해를 경청하십시오. 그렇게 조용히 앉아 침묵함으로써 내 마음을 열 때, 비로소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 가득 차 있는 하나님의 밝은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내 삶 안에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의 위로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 탄식하시며 대신 기도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습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립보서 4:4-7)했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볼보심이라"(베드로전서 5:7)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조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 14:27). 아멘. (2019.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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