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가랴 9:9-10, 요한일서 4:7-11, 요한복음 15:9-10 -
<체험 삶의 현장>이라는 TV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1993년부터 2002년까지 만 10년 동안 모 방송국에서 방영되었던 인기 프로그램입니다. 연예인 등 유명인들이 공장이나 농촌 혹은 어촌 등 힘든 노동의 현장을 찾아가 일하고 거기서 받은 일당 전액을 불우한 이웃을 위해 기부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일당으로 받은 현금봉투를 뿔이 달린 말 인형을 타고 올라가 하트 모양의 모금함에 넣으면 기부 총액이 표시되는 훈훈한 장면으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거기 출연한 배우들은 '삶의 현장 체험'이 끝나면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하루 동안의 고생이 끝나면 본래 자신의 안락한 삶의 자리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들에게 '삶의 현장'은 일시적 체험 프로그램에 불과했습니다.
고난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 공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이었던 이 주간에는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성전 숙청, 성만찬 제정,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체포와 심문, 그리고 십자가 처형 등, 하나님 구원의 우주적 대사건들이 숨 막히게 전개되었습니다. 그런데 혹 예수님의 공생애와 십자가도 '체험 삶의 현장'과 같은 프로그램이었을까요? 하나님의 인간 현장 체험 프로그램과 같은 것이었을까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대속(代贖)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고 고백하기에, 그 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러 오셨고 또 부활, 승천하여 다시 하나님이 자리로 되돌아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예수님의 생애와 수난을 하나님의 인간 삶의 현장 체험 정도로 생각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대역사는 우리의 삶과 분리된 피상적인 교리가 되고, 우리는 '하나님 극본, 예수 주연, 빌라도 조연'이라는 수난 드라마의 관객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1988년에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 <예수의 마지막 유혹>("The Last Temptation of the Christ")이 개봉되었을 때 미국에서는 큰 소란이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잘 아시다시피,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에 근거한 것입니다. 예수라는 청년이 있습니다. 목수입니다. 하지만 그는 의자나 책상이 아니라 로마의 법을 어긴 사람들을 매다는 십자가를 만드는 목수였습니다. 가장 논란이 되는 장면은 아마도 영화의 마지막 30분가량일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 앞에 천사가 나타나 당신은 구세주가 아니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통의 인간으로 살라고 말합니다. 예수는 마리아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보통사람으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늙어 죽기 직전, 자신을 찾아온 베드로와 유다에 의해 그것이 사탄의 유혹이었음을 깨닫고 결국 하나님의 뜻에 따르게 됩니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했던 바는 예수님이 단지 신의 아들이었기에 예정된 순서에 따라 십자가에 못 박힌 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나약함과 죽음에 대한 공포와 싸워 이긴 후 자신의 의지로 십자가를 받아들였기에 위대한 분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보수적인 교계로부터 신성모독이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인간이었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는 이른바 '양자론'(養子論, Adoptionism)이라 비판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십자가 고난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이 성서에, 특히 '사랑의 서신'이라 불리는 요한일서에 잘 나타나 있다고 믿습니다. 신약성서 요한일서의 골자는 간단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본성은 사랑입니다. 둘째, 이 하나님이 인간을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셋째, 그 사랑의 절정이 독생자 그리스도를 내어주신 것입니다. 넷째,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 이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째, 이 사랑을 통해서만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요한일서의 메시지를 한마디로 줄이면 그것은 (오늘 설교제목처럼) '사랑하기 때문에'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끝없이 예언자들을 보내 회개를 촉구하신 것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독생자를 주신 것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체험 삶의 현장' 프로그램을 찍으러 이 세상에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었는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體恤)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 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니라"(히4:15). 실로 그 분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어 삶의 현장 한복판에서 우리와 함께 고통을 당하신 분입니다. 그 분은 배고픔을 알고, 화낼 줄 알고, 모든 종류의 유혹과 고통과 아픔을 당하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 삶의 가장 깊은 곳으로 오셨습니다.
이탈리아의 제노아(Genoa)에는 무게가 8톤이나 되는 거대한 예수 동상이 하나 서있습니다. 그런데 이 동상은 높은 언덕이 아니라 이 항구도시의 가장 낮은 곳에 세워져 있습니다. 제2차 대전 때 제노아 바다에서 큰 해전이 벌어졌습니다. 많은 군함이 침몰하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었습니다. 그들의 부모들이 바다 속 깊은 곳에 수장된 자기의 자녀들을 위해 예수상을 봉헌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높은 언덕 위에 선 예수가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 내려와 우리와 함께 울고, 함께 고통을 당하고, 그리고 함께 짐을 진 예수 그리스도 상을 만들어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 동상의 이름은 <깊은 데 계신 그리스도>("Christ in the Deep")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가장 깊은 곳에 오셨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고난주간의 시작은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종려주일로부터 시작합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을 향하여 마지막 여행을 하시면서 주님은 아셨습니다. 이 길이 죽음에 이르는 여행임을 아셨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새인 등의 종교지도자들과 로마군대가 합작하여 자신을 죽일 것을 아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추종자들은 예루살렘 행을 꺼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앞장서셨습니다. 나귀를 타고 앞장서셨습니다. '호산나'를 외치며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또한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폈던 자들이 빌라도의 법정에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칠 것을 아시며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죽는 길인 줄 알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오늘 사지(死地)로 들어오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사랑하면 약해집니다. 사랑을 하면 사랑하는 상대에게 약해집니다. 진짜 사랑을 해보셨는지요? 사랑하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한없이 약해집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모가 힘이 없어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부모가 자식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보다 부모가 자식을 더 사랑하기에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습니다. 이것은 '사랑의 역설(패러독스)'입니다. 이 역설을 잘 알았던 이가 솔로몬이었습니다. 한 아기를 두고 두 여자가 서로 자기 아기라고 다퉜습니다(왕상3:16-28). 솔로몬은 칼을 가져와 그 아기를 둘로 갈라 나눠주라고 했습니다. 가짜 엄마는 그렇게 하자고 했습니다. 진짜 엄마는 아기를 내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때 솔로몬은 누가 진짜 엄마고 누가 가짜 엄마인지 알았습니다. 진짜로 사랑하면 약해집니다. 진실로 사랑하면 집니다. 솔로몬은 그 '사랑의 역설'을 알았기에 명 판결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세상에 내어주신 것도 '사랑하기 때문에'였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진실로]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라고 성서가 말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길인 줄 알면서도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도망칠 수도 있었고, 후일을 도모할 수도 있었으며, 천군천사를 데리고 세상을 일시에 심판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랑하셨습니다. 사랑이 깊기에 약해지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목숨도 대속물로 내어주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사랑과 힘은 반비례하는 것 같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힘을 휘두르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그 힘을 놓아버립니다. 권력을 놓아버립니다. 진짜로 사랑하면 힘을 휘두르지 않고 힘을 뺍니다. 사랑하기에 나를 낮추고, 사랑하기에 내가 약해집니다. 그것은 연약해지는(weak)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상대에게 민감해지고 때문에 그로부터 상처를 받기 쉬워지는(vulnerable)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밀어붙이기보다는 물러서는 것이, 더하기보다는 빼는 것이 더 아름다울 때가 있습니다. 힘을 빼는 것이 진정으로 강해지는 길일 수 있습니다. 모든 운동의 기본이 무엇입니까? 먼저 몸에서 힘을 빼는 것입니다. 노래를 잘 하려면 무엇부터 해야 합니까? 우선 목소리에서 힘부터 빼야 합니다. 남과 소통을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화할 때 힘을 빼야 합니다. 소통의 고수는 위력으로 상대를 누르지 않습니다. 겸손함과 세심한 배려 속에서 상대를 세워주면서 이야기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힘을 빼는 것입니다. 권력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하면 그 권력을 놓아 버립니다. 진실로 사랑하면 힘을 휘두르지 않습니다. 참 사랑은 강요하지 않습니다. 강제하지 않습니다. 억지로 요구하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진실로 아끼기 때문에 자신의 힘을 뺍니다. 자신을 낮춥니다. 집니다. 아니 져줍니다. 사랑하기에 약해집니다. 그것이 참 사랑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초라한 마구간에서, 연약한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보무당당하게 천군천사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지 않으시고 초라한 나귀를 타셨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낮아지셨습니다. 힘을 빼셨습니다. 대신 징계를 받고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우리가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아야 하나 그가 그리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교독문의 말씀처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습니다(사53:5). 십자가는 하나님의 약함을 드러낸 사건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독일의 순교자 본회퍼 목사의 말처럼 '인간의 약함' 위가 아니라 바로 이 '하나님의 약함' 위에 세운 종교입니다. 히틀러 암살음모에 가담했다가 사형수가 되어 언제 처형될지 모르는 불안에 시달리던 본회퍼 목사는 그런 인간 실존의 약함 위가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 위에 계시된 '하나님의 약함' 위에 우리의 소망과 믿음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3장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여기 '약하심'을 '사랑하심'으로 바꾸어 읽어보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사랑 때문에]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이것이 그리스도의 수난의 신비요 은총입니다. 사랑은 참으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다 내어주고도 더 주지 못해 미안해하는 것이 참 사랑입니다. 그 신비로운 사랑 때문에 주님은 죽는 길인 줄 알면서도 오늘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죽음의 여정을 떠나셨습니다.
'아마추어'(amateur)라는 말이 있습니다. 보통 '비전문가'를 뜻하는 다소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지만, 원래는 운동경기에서 돈을 받고 직업적으로 하는 소위 프로 선수가 아닌 자를 가리킵니다. 이 말의 어원은 라틴어 '아모르'(amour)입니다. 그 뜻이 무엇일까요? '사랑하다'입니다. 그러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행동하는 자가 아마추어입니다. 돈 때문이 아니라, 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경기를, 그 일을, 그 사람을 정말로 사랑하기에 행동하는 자가 바로 아마추어입니다. '사랑의 서신'인 요한일서는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아마추어라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마추어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도 수난을 당하시는 하나님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은 아마추어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이 아마추어 사랑을 나누면서 살라고 촉구합니다.
신구약성서는 그리스도를 도살장으로 묵묵히 끌려가는 어린양으로 표현합니다(행8:32, 사53:7-8). 예수님은 사랑하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향하여 걸어가셨습니다. 각본대로 연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 삶의 현장 체험 프로그램을 찍으신 것이 아닙니다. 진실로 사랑하기에 세상에 오셨습니다. 깊이 사랑하기에 배반을 감수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손과 발에 못을 치는 무지한 자들을 용서하였습니다. 그렇게 그는 사랑이 깊으셨기에 약해지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약한 자를 강하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면 강한 자는 약해집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약한 자가 강해집니다. 주님은 이 사랑의 신비로 우리를 강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함이 우리의 강함입니다. 이것이 수난의 신비입니다.
오늘 공동의 기도문으로 읽은 김소엽 시인의 <하나님의 편지>를 다시 한 번 살펴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수난의 의미가 무엇인지 깊이 성찰한 시입니다. "하나님이 / 나에게 보내주신 / 단 한번의 연서[戀書] / 연애편지 받고서도 / 그 뜻도 몰랐던 / 늦된 아이여 // 사랑은 떠나가고 / 홀로 있을 때 / 문득 / 당신의 생애가 / 하나님이 보내신 / 한 장의 / 연애편지였음을 // 답신을 보내려니 / 주소를 몰라 / 천상 내가 / 지니고 가야 할 / 편지 // 뒤늦게 / 하늘을 보며 / 남은 여생으로 / 답신을 쓰고 있네 // 당신은 / 하나님이 내게 주신 / 하늘의 / 편지."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여러분 앞으로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연애편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서신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입니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사랑의 현현(顯現)입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오늘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우주적 드라마가 시시각각 전개됩니다. 이 드라마는 하나님의 '체험 삶의 현장'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관객으로 참여하지 마십시오. 그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하루하루 걸으며 하나님의 사랑과 수난의 신비를 깊이 체험하는 주인공들이 모두 되시길 바랍니다. (2019.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