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편 18:1-3, 베드로후서 1:1-7, 요한복음 21:17 -
(그림1: 지오토, <성 베드로>) 베드로. 그의 본명은 '시몬'입니다. 예수님이 '게바'라고 개칭하셨습니다. 게바를 번역하면 '베드로'입니다. 바위, 혹은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살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가족과 생업을 다 버리고 주를 따라갔다가 12제자 중 첫 번째 제자가 되었습니다. 지오토의 <성 베드로>를 보고 계십니다.
그는 과감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림2: 안렉산드르 알로리, <물 위를 걷는 베드로>) 갈릴리 바다에서 한 밤중에 다른 제자들과 노를 젓고 있을 때,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모두 유령이라 벌벌 떨었지만, 서슴없이 물위에 발을 내밀어 유일하게 물위를 걸었던 제자가 베드로입니다. 그는 또한 영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림3: 페루기노, <베드로에게 천국열쇠를 주시는 그리스도>)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물으셨을 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고 대답했다가 주님으로부터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너는 베드로라, 즉 반석이라 부를 것이요, 그 위에 교회를 세울 것이니 천국의 네게 열쇠를 주겠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조급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칭찬을 받자마자 예수님을 붙잡고 십자가를 지지 마시라고 간청했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는 큰 책망만 들었습니다. (그림4: 브라운, <베드로의 발을 닦는 그리스도>) 베드로는 어린아이와 같고 질투가 많은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실 때, 그는 자기 차례가 되자 절대로 자기 발은 씻기지 못한다고 저항했습니다. 그의 얼굴을 한번 보십시오. 마치 골이 난 것 같습니다. 아마도 수제자인 자기 발을 가장 먼저 씻어주시지 않아 토라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내가 너의 발을 씻기지 아니하면 너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시자 금방 마음을 바꾸어, '그러면 내 발뿐만 아니라 온몸까지 씻어주십시오' 했다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는 예수님의 핀잔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림5: 쾨더, <그리스도의 발을 씻는 예수>) 한 현대 작가의 그림입니다. 화가는 예수님의 얼굴을 직접 그리지 않고 베드로의 발이 담겨 있는 대야의 물 위에 비치게 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제자를 섬기는 예수님의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자신을 과신하고 자기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일종의 우월감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림6: 쾨더, <베드로의 닭>) 성만찬 자리에서 '오늘 밤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리고 도망칠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을 때,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또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로 큰 소리쳤다가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사람이 바로 베드로입니다. 그는 심지어 예수님을 저주까지 하면서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베드로의 그림에 저렇게 닭이 등장하는 이유는 그가 닭이 울기 전 주님을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림7: 카라바조, <베드로의 부인>) 카라바조가 그린 <베드로의 부인>입니다. 화가의 유명한 기법인 '키아로스쿠스로'(chiaroscuro), 즉 빛과 어둠이 정확히 나뉘는 음영법(陰影法) 눈에 띕니다. (그림8: 렘브란트, <베드로의 부인>) 렘브란트가 그린 같은 주제의 그림입니다. 빛과 어두움이 명확하게 나뉜 카라바조의 그림과 달리, '빛의 화가' 렘브란트의 그림에서는 빛이 어둠 속에서 배어나와 세상을 따뜻하게 밝혀줍니다.
베드로는 이처럼 열정적이고, 투박하고, 성급하고, 단순하며, 정직한 영혼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베드로를 생각할 때마다 왠지 인간적인 친밀감을 느낍니다. (그림9: 고야, <베드로 사도의 회개>) 고야의 <베드로 사도의 회개>입니다. 전체적으로 짧은 체형, 굵고 거친 손길, 그리고 세련되지 않은 모습... 하지만 왠지 친근합니다. 바위 위에 주님이 주신 천국 열쇠를 놓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합니다. 큼지막한 눈에는 눈물이 한주먹 들어 있습니다. 확신과 의혹 사이에서, 용기와 두려움 사이에서 늘 방황했던 베드로... 그래서인지 우리에게 용기를 줍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지만 그도 연약한 한 인간이었기에 말입니다. (그림10: 그레코, <참회하는 베드로>) 그레코의 <참회하는 베드로>입니다. 가느다란 손가락과 얼굴, 훨씬 세련된 모습이지만 그의 눈에선 참회의 눈물이 흐릅니다. 멀리 하늘을 응시하는 깊은 눈 속에 슬픔과 부끄러움이 가득합니다. (그림11: 렘브란트, <무릎 꿇은 사도 베드로>) 다시 '빛의 화가' 렘브란트의 그림입니다. 베드로는 아예 천국 열쇠를 땅바닥에 내려놓았습니다. 눈물마저 말라버린 그의 수척한 얼굴엔 무기력감만 감돕니다. 더 이상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완벽한 실패자의 모습니다.
그렇게 베드로는 갈릴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림12: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는 사진) 주님을 부인하고 십자가 사건의 현장에서 멀리 도망친 이후 좌절하고 낙심하여 낙향했습니다. 부끄러워 숨었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는 다시 물고기를 잡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밤새도록 잡은 물고기로 함께 조반을 드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천천히 말을 건네셨습니다. 베드로가 가장 두려워하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은 같은 질문은 세 번 물으셨습니다.
(그림13: 작자 미상, 베드로를 찾아온 예수님) 주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과거형이 아닙니다. 우리는 헤어진 연인에게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나를 사랑하긴 했니?' 과거형입니다. 원망이 가득 묻어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현재형입니다. 현재 어떠하냐고 물으셨습니다. 지금을 물으셨습니다. 둘째로 주님은 그를 '베드로야'라고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직접 지어준 그 이름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시몬의 신앙고백이 견고한 바위와 같아서 그에게 베드로, 즉 반석이라고 친히 붙여주신 그 이름을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세 번 부르셨습니다. 이 이름은 베드로가 제자가 되기 전 그의 본래 이름입니다.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 시절의 이름입니다(요한 1:42). 주님을 만나 첫 사랑에 빠졌을 때 그 처음 사랑의 풋풋한 열정을 아련하게 떠오르게 하는 이름입니다.
아마추어(amateur)라는 말이 있습니다. 원래 운동경기에서 돈을 받고 직업적으로 하는, 소위 '프로' 선수가 아닌 자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말의 어원을 아시는지요? 라틴어 '아모르'(amour)입니다. 그 뜻은 '사랑하다'입니다. 그러니까 아마추어란 '사랑하기 때문에' 행동하는 자입니다. 돈 때문이 아니라, 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경기를, 그 일을, 그 사람을 정말로 사랑하기에 행동하는 자가 바로 아마추어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이 말은 베드로의 '아마추어 사랑'을 환기시키시는 이름이었습니다. 제자가 되기 전, 예수님을 부인하기 전, 베드로의 풋풋하고 성실했던 첫 사랑을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사랑도 아마추어 사랑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시고 십자가 위에서 수난을 당하신 예수님의 사랑은 바보 같고, 순수하고, 그래서 아름다운 아마추어 사랑입니다.
어떤 아내가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 나 사랑해?' 남편이 대답합니다. '그럼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다시 아내가 묻습니다. '당신 나 사랑해?' 남편이 대답합니다. '그럼 사랑하지, 사랑한다니까.' 다시 아내가 세 번째로 묻습니다. '당신 나 사랑하지?' 뭔가 큰일 났습니다! 당황한 남편이 대답합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내가 당신을 정말로 사랑한다니까!' 이때 만약 남편의 눈초리가 오른쪽으로 올라갔다면, 그러니까 보시기에 왼쪽 위로 올라갔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입은 거짓을 말해도 몸은 거짓말을 못합니다. 눈동자가 오른쪽으로 올라갔다는 말은 지금 남편이 왼쪽 뇌를 사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성과 논리의 뇌, 변명과 자기합리화의 뇌, 좌뇌(左腦)말입니다.
예수님이 세 번째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셨을 때 베드로는 "근심했다"고 했습니다. '근심하다'라는 말은 '고통을 느끼다, 서운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누가 같은 질문을 자꾸 물어오면 '나를 믿지 못해서 그런가' 서운하기도 하고, 혹은 내 행동에 뭔가 잘못이 있었나 근심하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가 근심할 만큼 철저하게 베드로의 마음을 확인하려 하셨습니다. 그가 아직도 주님을 사랑하는지 알고 싶으셨습니다. 왜 이렇게 예수님은 베드로의 사랑을 집요하게 확인하려 하시는 걸까요?
"내 양을 먹이라." 그것이었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주님은 이 말씀을 세 번이나 하셨습니다. 나에게 사랑하는 양이 있습니다. 나는 잠시 떠나있어야 합니다. 누구에게 맡겨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면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내 양을 사랑해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무엇을 바래서가 아니라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진심으로 내 양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있는 사랑의 마음을 확인한 주님은 그에게 세 번 "내 양을 먹이라" 당부하면서 새 소명을 주셨습니다. 사랑의 소명을 주셨습니다.
(그림14: 베드로 수위권 교회 사진) 갈릴리 호숫가에는 '베드로 수위권 교회'라는 이름의 작은 교회가 하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나타나 "내 양을 먹이라"고 당부하신 바로 그 곳에 세운 기념교회입니다. 4세기 후반에 세워진 비잔틴 교회의 벽면을 보존하면서 1933년에 다시 세워진 이 교회 안에는 (그림15: 교회 안 사진) 보시다시피 주님이 베드로와 함께 잡은 생선을 구워 드시며 대화를 나누시던 바위 '멘사 크리스티'(Mensa Christi), 즉 '그리스도의 식탁'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정원에는 (그림16: 석상) "내 양을 먹이라"며 베드로에게 새 소명을 부여하시는 형상의 석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저도 이 앞에서 사진을 많이 찍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림17: 석상) 주님은 베드로에게 당신이 쓰시던 목자의 지팡이를 건네주십니다. 넘어졌던 베드로를 다시 일으켜 세우신 것입니다. (그림18: 석상) 사실 누군가 넘어졌을 때 일으켜주고 위로하는 사람이 참 친구입니다. 누구든 살면서 한번은 넘어집니다. 베드로는 보기 좋게 넘어졌었습니다. 죽어도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하더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 베드로를 찾아오신 주님은 그를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실패를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의 본래의 이름을 부르시며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만 물으셨습니다. 그렇게 주님은 베드로가 상처와 부끄러움에서 벗어날 용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새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여러분, 사실 주님은 우리가 넘어진 그 사실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주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주님을 사랑하는가에만 관심이 있으십니다. '네가 나를 지금도 사랑하느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주님에게는 그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그 마음만 있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베드로는 이제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림19: 베네치아노, <베드로 사도의 강론>)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꽁꽁 숨어있던 베드로는 자신의 골방 문을 박차고 나와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부활의 소망을 일깨웠습니다. 성서를 보니, 베드로의 말씀을 듣고 하루에 삼천 명이나 세례를 받기도 했습니다(사도행전 2:41). 성전 미문 앞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 걸인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사도행전 3:6)고 외치며 기적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림20: 마사초, <그림자로 병자를 치유하는 베드로>) 마사초의 <그림자로 병자를 치유하는 베드로>라는 그림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림을 가르쳤다는 미켈란젤로는 유일하게 자신이 마사초에게 배웠다고 말했습니다. 마사초는 이 그림에서 당시로는 파격적으로 서민을 성화의 소재로 삼았고, 또한 파격적으로 그림에 사물의 그림자를 표현하였습니다. 베드로 옆의 앉은뱅이 걸인은 베드로의 그림자만 닿아도 나을 거라는 기대와 믿음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용감한 사자(使者)가 된 베드로는 순교할 때, (그림21: 마사초, <베드로의 십자가형>) 자신은 감히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똑바로 매달릴 자격이 없다며 십자가를 거꾸로 뒤집어서 매달아줄 것을 간청해서 보시는 것처럼 역(逆)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마사초의 그림 <베드로의 십자가형>입니다. (그림22: 미켈란젤로, <베드로의 순교>) 미켈란젤로가 그린 <베드로의 순교>입니다. 미켈란젤로의 베드로는 두 눈을 부릅뜨고 이 그림을 보는 우리를 노려봅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마치 '나는 주님의 양을 잘 돌봤는데 너는 뭐하고 있는가?' 하고 묻는 것만 같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은 우리의 목자입니다. (그림23: 석상) 이사야서는 메시아이신 주님이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에 모아 품에 안으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이사야 40:11). 그 분은 갈릴리 온 마을을 다니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실 때 그에게 몰려온 가난하고 병든 무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을 보고 긍휼히 여기셨다 했습니다(마태 9:35-36). 이렇게 선한 목자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베드로에게 물으셨던 바로 그 질문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지금도]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이 모든 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교우 여러분, 우리의 사랑, 주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 아직도 아마추어 사랑입니까? 풋풋하고 순수하고 바보 같은 그 첫 사랑입니까? 오늘 읽은 시편 기자의 기도처럼,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편 18:1)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이 여러분의 힘이길 바랍니다. 아무리 작은 불꽃이라도 여러분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살아있다면 주님은 그것으로 온 세상을 환하게 밝히실 것입니다. 이렇게 여호와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오늘 읽은 교독문 시편 91편입니다.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은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2019.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