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명기 5:1-6, 16, 에베소서 6:1-4, 마태복음 15:1-9 -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한문으로 어버이는 부친(父親), 모친(母親)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어버이 친(親)'자는 우리 어머니들과 아버지들의 마음이 잘 담긴 뜻글자입니다. 옛날 시골에는 닷새 만에 장이 섭니다. 장이 서면 아들은 그동안 모은 나뭇짐을 지게에 지고 장터로 팔러 갑니다. 집에 계시는 어머니는 농사일과 집안일을 하십니다. 하지만 생각은 온통 장에 간 아들에게 가 있습니다. 오늘 갖고 간 물건은 잘 팔았는지, 누구와 시비는 붙지 않았는지, 그리고 올해는 넘기지 말고 장가를 보내야 하는데... 오로지 자식 걱정뿐입니다. 그러다 어느덧 저녁이 되어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데 아들은 돌아오질 않습니다.
저녁을 다 지어놓고 기다리다 못한 어머니는 동구 밖까지 나가봅니다. 언덕에 올라보니 장터에 갔던 사람들이 하나 둘 돌아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마침 언덕에 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위태롭게 그 나무에 올라가 멀리 장터를 향해 봅니다. 바로 이 애틋한 마음을 한자에서는 '어버이 친(親)'이라고 합니다. 이 글자는 설 립(立)자 아래 나무 목(木)자 옆에 볼 견(見)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무 위에 올라서서 하염없이 자식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 그것이 어버이의 모습입니다.
이에 못지않은 한자가 또 하나 있습니다. '효도 효(孝)'자입니다. 아들은 갖고 간 물건을 늦게까지 다 팔고서 고등어 몇 마리와 어머니께 드릴 몇 가지 물건을 사들고 옵니다. 그런데 동구 밖에서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머니, 다리 아프실 텐데 여기까지 어떻게 오셨어요. 제가 엎어드리겠습니다. 제 지게 위에 타세요.' 그래서 효도 효자는 아들 자(子) 자 위에 늙은이 노(老) 자가 올라타고 있는 모습입니다. 지게 위에 노인을 업고 오는 아들의 모습, 그것이 효입니다. 자나 깨나 자식이 걱정되어 동구 밖 언덕 위 나무 위로 오른 존재가 어버이이고, 그 어버이를 등에 업고 가는 존재가 바로 자식입니다. 그것이 부모와 자식입니다. 이것이 부모의 사랑과 자식의 효도에 대한 한자 문화권의 이해입니다.
오늘 읽은 신약서신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에베소서 6:1-3)고 했습니다. 바울은 지금 십계명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은 구약성서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 두 곳에서 나오는데,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바울의 말대로 '약속이 있는 첫 계명'입니다. 출애굽기에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고 약속합니다. 신명기는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 5:16)고 약속합니다. 부모 공경에는 장수(長壽)와 축복의 언약이 딸려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의 제5계명이 부모의 권위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라는 뜻으로만 해석되었습니다. 물론 이 계명이 부모의 '권위'(authority)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권위와 잘못된 권위주의(authoritarianism)를 혼동하진 말아야 합니다. 너무도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많은 가정 안에서 부모에 의한 자녀 학대 소식이 보도되고 있습니다. 친구들과 '소풍을 보내 달라'던 7살 여자 어린이는 어머니의 무차별 폭행으로 사망했습니다(2013년 울산 계모 사건). 10살 여자 어린이는 소금을 수북이 넣은 밥을 강제로 먹다가 나트륨 중독으로 사망했습니다(2013년 인천 소금밥 사건). 아버지와 동거녀의 폭행과 굶주림에 시달리다 못해 2년 만에 맨발로 가스배관을 타고 탈출한 11살 소녀는 온 몸의 갈비뼈가 부러져 있었고 몸무게는 16킬로그램에 지나지 않았습니다(2015년 인천 예림이 사건). 심지어 한 신학교의 겸임교수이자 교회의 목사인 한 아버지는 가출했다 돌아온 중학생 딸을 7시간이나 빗자루로 구타해 숨지게 하고 또 그 시신을 옆방에 1년이나 방치해두기도 했습니다(2016년 부천 여중생 딸 시신 방치 사건). 너무 참담해서 더 이상 예를 들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이 땅에는 부끄럽게도 부모와 자녀 간에 사랑과 공경 말고도 폭력과 학대가 존재합니다. 그 사실에 눈을 감고 자녀들에게 무작정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종교가 아동학대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부모에게 폭력과 학대를 경험한 아이들에게 무조건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치면 그것은 부모의 폭력을 정당화시키는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부모를 공경해야 하나님의 복을 받을 거라는 메시지를 들은 학대 받은 아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결국 자기 자신을 나쁜 아이로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줘야 하는 데 자칫 성경을 가지고 '모두가 네 잘못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가장 안전해야 할 가정 안에서 많은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최초의 폭력을 경험하는 오늘날 우리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중히 선포해야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사도 바울은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라고 말한 직후에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에베소서 6:4)로 경고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육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을 보고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태 12:5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십계명의 제5계명은 부모의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과는 다르게 해석되어야 합니다. 사실 그 계명은 경제학과 더 상관이 있습니다. 돌아보면 이스라엘 부모들이 자녀들 위에 누렸던 권위는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굳이 십계명에 포함된 이유가 오히려 이상할 정도입니다. 당시 주위의 다른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부모의 권위에 대한 복종은 이스라엘에게도 매우 중요했습니다. 심지어 부모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나 훼손은 사형에 처해야 하는 중죄였습니다. 신명기는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을 돌로 쳐 죽이라고까지 말합니다(신명기 21:18-21). 그렇다면 이처럼 부모의 권위에 대한 복종이 너무도 당연하고 또 그것에 대한 도전이 엄격하게 금지된 상황에서 굳이 부모를 공경하라는 조항이 십계명에 포함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서시대 팔레스타인 땅에 살던 이스라엘과 같은 유목민들에게는 우리의 고려장(高麗葬)과 비슷한 관습이 있었습니다. 늙어서 더 이상 함께 이동할 수 없거나, 더 이상 생산 활동에 참여할 수 없는 노인들을 남겨두고 떠남으로써 그들이 사막에서 죽게 만드는 관습 말입니다. 모세가 바로 이것을 금지시켰습니다. 경제적 생산 활동에 참여할 수 없는 노약자들도 존중되고 공경 받으며 보호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이 계명의 본래의 뜻입니다. 이 점은 출애굽기 21:17절에 잘 나타납니다.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는 구절인데, 여기서 자기 부모를 '저주하다'는 말의 뜻을 살펴보니 자기 부모를 '비참한 상태로 내버리다'(leave them to their misery)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부모를 버리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5계명의 본뜻입니다.
바로 이 정신이 예수님에 의해 다시 인용되었습니다. 오늘 읽은 마태복음 15장에 그리고 마가복음 7장에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따지는 구절이 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마태 15:2). 예수님 당시의 유대사회를 이끌어간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은 목자 없는 양 같이 방황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선이 예수님에게 향하자 이들은 예수님의 약점을 잡고자 혈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예수님의 제자들 중 몇몇이 식사하기 전에 손을 씻지 않자 이를 근거로 그들은 제자들이 '장로들의 전통'(미쉬나)을 지키지 않는다고 따진 것입니다. 여기서 '장로들의 전통'이란 모세오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율법(토라)이 아니라 이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해 장로(랍비)들이 만든 구전 율법(미쉬나)이었습니다. 사실 시비의 발단이 된 식사하기 전 손 씻기 문제도 율법에는 없는 내용입니다. 오직 제사장들이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으라고 한 것을 확대 해석하여 일반인의 생활에도 적용한 것이 바로 장로들의 전통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공격 앞에서 예수님은 즉시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고 반문하십니다. 그러면서 십계명의 부모공경 계명을 예로 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새번역으로 인용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셨다.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누구든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내게서 받으실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되었습니다' 하고 말만 하면, 그 사람은 제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이렇게 너희는 너희의 전통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폐한다"(마태 15:4-6). 여기 나오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을 마가복음은 고르반(corban)이라고 소개합니다(마가 7:11). 고르반은 히브리어 '코르반'을 음역한 것으로, 구약성서에서는 단순히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바치는 제물 혹은 예물을 가리킵니다(레위기 2:1,4,12). 그런데 바벨론 포로기 이후 외적인 의식과 규례를 강조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 단어는 하나의 맹세어가 되어 누구든 작정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모든 물건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의 진정성을 보여주기 위해 여러 사람들 앞에서 '이것이 고르반이다,' 즉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맹세하고 그 예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풍습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고르반'으로 바쳐진 물건은 이제부터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종교적인 목적 이외에는 다른 어떤 목적으로는 사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고르반'은 본래 좋은 신앙적 동기에서 출발한 풍습이지만, 장로들의 전통은 이 풍습을 종교적 규례로 강화하여 자식이 부모에게 봉양해야 할 재화도 고르반, 즉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말하기만 하면 더 이상 부모 봉양의 의무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점차 이 전통은 부모와 사이가 나쁜 자식이나 부모 봉양을 꺼리는 자식들에게 부모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좋은 종교적 변명거리를 제공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장로들의 전통으로 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노해서 말씀하십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태 15:7-9 - 이사야 29:13에서 인용).
예수님은 아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고르반, 즉 이것이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다 라고만 하면 다 되는 것이냐? 하나님께 드려야하기에 정작 부모님께 드릴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 과연 계명의 참뜻인가 말이다!' 사실 고르반 자체는 하나님께 대한 아름다운 서원이고 뜨거운 헌신입니다. 온 맘과 뜻과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무엇이 아깝단 말입니까? 하지만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예물에 목말라 하는 분이 아닙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물을 직접 쓰실 곳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이 땅 위 그 누군가에게 필요한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모든 것이 우리 가운데 곤궁한 자들에게 되돌려지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부모든 이웃이든 그들에게 사용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은 더 이상 부모의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가르치는 말씀이 아니라 경제적 생산 활동에 참여할 수 없는 노약자들도 존중되고 공경 받으며 보호되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순종에 대한 강조가 아니라 돌봄과 정의에 대한 강조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에 기초한 '공경의 경제학'이었던 것입니다.
십계명에서 흥미로운 것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의 제5계명이 십계명 전체에서 연결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십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수직적인 제1~4계명과 이웃에 대한 수평적인 제6~10계명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둘을 연결하는 것이 바로 제5계명입니다. 즉 '하나님 사랑'이라는 첫 번째 큰 계명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번째 큰 계명을 서로 같은 것으로 만드는 연결고리("alike-maker")가 바로 이 계명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로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한1서 3:17-18)고 말합니다. 부모와 이웃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별개가 아님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마태 22:36-40, 마가 12:28-34, 누가 10:25-2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교독문에서 읽은 것처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이는 거짓말하는 자"입니다. "[눈에] 보는 바 그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눈에]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요한1서 4:20). 교우 여러분, 우리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녀들이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 처음 접하는 이웃'입니다. 우리 삶에 '가장 가까운 이웃'으로 주어진 분들이 바로 우리의 부모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하나님과 이웃을 이어주는 존재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하나의 사랑이 되게 하는 연결자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그래서 "부모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어버이주일에는 효도 못하는 자를 책망하기 보다는 우리에게 이런 부모님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그 분들의 수고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주일이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공동기도문에서 고 고(故) 윤춘병 목사님의 시 '어머님 은혜'를 함께 읽었습니다. 이 시에 박재훈 목사님이 곡을 붙인 것이 바로 어버이날이 되면 자주 들을 수 있는 국민 애창곡 '어머님 은혜'입니다. 그런데 3절 가사가 낯섭니다. "산이라도 바다라도 따를 수 없는 / 어머님의 그 사랑 거룩한 사랑 / 날마다 주님 앞에 감사드리자 / 사랑의 어머님을 주신 은혜를." 우리는 이 노래가 2절까지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으로 시작되는 1절과 "넓고 넓은 바다라고 말들 하지만"으로 시작되는 2절까지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오래전 3절 가사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사라진 가사에는 '사랑의 어머님을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리자'는 기독교 신앙이 담겨 있습니다. 원래 이 곡은 교회에서 불리던 찬송가였습니다.
작사자 윤춘병 목사님(1918-2010)이 이 곡의 가사가 된 시를 쓰게 된 것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습니다. 평안남도 중화군이 고향인 그는 1945년 해방 직후 월남했고, 이후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병을 얻어 사경을 헤매던 윤목사는 북에 있는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더욱 커졌습니다. 그 때 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 때 어머니에 대한 진한 그리움을 한 숨에 써 내려간 시가 바로 '어머님 은혜'입니다. 작곡자 박재훈 목사님은 작년 어버이주일에 소개드린 대로 유명한 동요 작곡가입니다. "엄마 엄마 이리와 요것 보세요," "산골짝의 다람쥐 아기 다람쥐," "송이 송이 눈꽃송이 하얀 꽃송이" 등의 동요를 지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박재훈 목사님은 우리가 아는 주옥같은 찬송가도 많이 지으셨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 보라"(구 256장), "어서 돌아 오오"(구 317장), "산마다 불이 탄다"(구 311장), 그리고 "지금까지 지내온 것"(구 460장) 등입니다. 박재훈 목사님의 작곡으로 날개를 단 윤충병 목사님의 시는 1948년에 출판된 동요집 <산난초>에 실렸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감사를 담은 이 곡은 1953년 <어린이찬송가> 제99장에 실려 드디어 찬송가의 지위를 얻었습니다. 어린이들이 즐겨 부르자 인기를 끌던 이 찬송은 장년들에게도 사랑을 받았고, 뛰어난 가사와 작곡 때문에 초등학교 음악교과서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때 작가자의 신앙고백을 담은 3절은 '종교적'이라며 삭제되고 말았습니다.
작년 어버이주일에 약속했었습니다. 올해는 이 찬송을 3절까지 다 불러보자고요. 기억하시는지요. 작사자 윤춘병 목사님은 생전 인터뷰에서 "고향을 떠나던 날 어머니가 우시면서 '이제 가면 언제 오냐'고 하셨던 기억이 아른거렸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생각 속에 창밖을 떠가는 구름을 보며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을 하지만 '나는 나는 높은 게 또 하나 있지'라는 시를 써 주님께 감사하는 내용을 담았다"고 회상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누구입니까? 우리의 모친(母親)과 부친(父親)이 누구입니까? 윤춘병 목사님의 말처럼 집을 떠난 자식이 언제 오나 그리워 동구 밖 언덕 위 나무 위에 올라 하염없이 자녀들을 바라보는 존재입니다. 그 분들은 '하나님의 대리자'이며 우리가 세상에서 '제일 처음 접하는 이웃'이자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이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한 사랑으로 이어주시는 은총의 존재입니다. 우리에게 이 귀한 존재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시다. 그리고 오늘은 우리의 어머님과 아버님을 등에 업고 가십시다. 돌아가신 부모님은 마음으로 업어드립시다. 그렇게 사랑과 돌봄과 공경의 효(孝)를 다하는 거룩한 어버이주일이 되시길 바랍니다. (2019.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