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보시기에 좋았다"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시편 34:12-15, 고린도후서 5:17-19, 요한복음 1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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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밤에 남산타워의 기둥색깔이 그날의 공기오염도에 따라 바뀐다는 것을 아는 서울시민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늘 밤에 한번 확인해보십시오. 빨간색이면 대기질이 나쁨이고, 초록색이면 보통이며, 파란색이면 좋음입니다. 빨강은 시간당 미세먼지가 120유크론으로 야외활동을 자제하라는 표시입니다. 파랑은 45유크론으로 평상시의 제주도와 같은 좋은 공기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느 작가의 글대로, "남산타워가 파란색으로 바뀌기를 바라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김연수의 여행 산문집 『언젠가, 아마도』에서).

실로 '숨 쉬는 것이 두려운 시절'입니다. 매일 미세먼지 농도를 확인하고 마스크를 챙기는 일이 중요한 일과가 되었습니다. 제 스마트 폰은 오늘 아침 이 교회가 있는 서대문구의 미세먼지가 '보통'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오늘 많은 한국교회가 지키는 환경주일의 주제는 '미세먼지 없는 세상을 향한 교회의 사명'입니다. 올해 환경주일 공동기도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던 그 순간 세상이 어둠에 휩싸였던 것처럼, 미세먼지가 세상을 뒤덮어 하늘이 빛을 잃었습니다"라는 회개의 기도가 나옵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의하면, 세계적으로 연간 700만 명이 미세먼지를 포함한 대기오염으로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는 초미세먼지(fine particle 2.5)는 전 세계 420만 명의 목숨을 위협하는 심각한 오염물질입니다. 서울연구원의 발표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도 대기오염과 초미세먼지로 한 해 약 2만 명이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푸른 하늘이 왜 미세먼지로 가득하게 되었는지, 왜 지구가 점점 뜨거워지고 있는지 정말 심각하게 반성해야 합니다.

레이첼 카슨(Richael Carson)은 그의 명저 『침묵의 봄』(Silent Spring)에서 "인간은 미래를 예견하고 그 미래를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 지구를 파괴함으로써 그 자신도 멸망할 것이다"라고 말한 앨버트 슈바이처를 인용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스스로를 창조주 바로 다음, 아니 실은 창조주와 동급이라고 생각하지만... 지구상 모든 생물 중에서 유일하게 자신이 사는 환경을 파괴하는 '특별한' 존재"라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호모 사피엔스라는 현생 인류는 지구의 생명의 역사를 24시간으로 환산할 때 그 중 불과 5초를 살았지만, 이 짧은 시간 동안에 거대한 생태적 재앙을 일으키고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인간 문명의 생성과 몰락이라는 순환이 가능했습니다. 왜냐하면 지구 한쪽에서 문명이 몰락하더라도 다른 쪽에서는 늘 새로운 문명이 생성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이런 공식은 깨졌습니다. 오늘날 생태계 파괴는 전 지구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역사상 처음으로 인류가 '교정이 불가능한 잘못'을 저지르는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학자들이 경고합니다. 홍수가 천둥벼락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최대의 자연재앙'이 되었다고 경고합니다.

신라(新羅)의 수도 경주에 가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신라는 기원전 57년에 시작하여 서기 935년까지 약 1000년 간(정확히는 992년간) 존속했던 왕조입니다. 인간의 문명이 영원할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 땅속에 묻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원하십니다. 신라가 망한 지 천 년이 되었는데 지금도 신라 천 년의 수도였던 경주는 땅을 파기만 하면 유물이 나와 함부로 도시개발을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약 천 년 후에 우리의 후손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을 파보면 무엇이 나올까요? 경주를 파면 기와가 나오고 금관이 나오는데, 우리 시대를 덮은 땅에서는 과연 무엇이 나올까요?

지질학자들은 우리 시대의 땅을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라는 새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노벨상 수상자 폴 크루첸, 미시간대학 유진 스토머 등). 잘 아시다시피, 지구의 지질시대는 고생대, 중생대를 거쳐 신생대로 이어졌는데, 지금 우리는 약 1만 3천 년 전부터 신생대의 마지막 단계인 '홀로세'(現世, Holocene)를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질학자들은 1950년대 이후를 더 이상 홀로세가 아니라 인류세라 불러야 한다고 제안한 것입니다. 인류세란 인류가 지구의 땅에 끼친 영향이 너무나 크고 깊다는 의미에서 붙여졌습니다. 인류세는 인간이 지구의 지질을 통째로 바꾸어 놓는 시대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이 지구에 '갑질'을 하는 시대입니다.

천 년 쯤 뒤 우리의 후손들이 지금 우리가 사는 땅을 파보면 크게 네 가지가 나올 거라고 합니다. 땅을 파다 삼엽충 화석이 나오면 고생대 캄브리아기이고, 공룡 화석이 나오면 중생대 쥐라기이듯이, 우리도 우리가 사는 이 땅에 화석과 흔적을 남깁니다. 지금 우리의 땅에서는 앞으로 방사성 낙진, 플라스틱, 미세먼지, 그리고 닭 뼈가 나옵니다. 첫째로, 지난 1940년대 후반 이후 수백 차례 이루어진 핵실험으로 지표면에는 인공 방사성 낙진이 수북이 쌓였는데 이것은 오직 우리의 지질시대에만 발견되는 전형적인 흔적입니다. 둘째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류가 생산한 플라스틱은 비닐 랩으로 만들었을 때 지구를 한번 싸고도 남는 양인데, 지금 미세 플라스틱이 바다생물의 몸속 깊숙이 쌓이고 있습니다. 앞으로 2050년이 되면 바다에는 물고기보다 플라스틱이 더 많아진다고 합니다. '나는 미세 플라스틱을 바닷물로 내버린 적이 없다'고 하실지 모르지만, 만약 오늘 아침 양치질을 하셨다면 많은 미세 플라스틱을 하수구로 흘려보내셨습니다. 치아의 표면을 깨끗하게 닦아주는 것은 치약 속의 미세한 플라스틱 알갱이들입니다. 그리고 지난 주간 세탁기를 돌리셨다면 현대인들이 많이 입고 있는 폴리에스터 섬유에서 무수한 미세 플라스틱 가루를 강물로 흘려보내셨습니다. 그 미세한 가루들이 바다생물의 몸속에 깊이 쌓이고 있습니다. 셋째로 산업화의 부산물인 초미세먼지가 우리의 폐를 타고 온 몸으로 침투해 몸속 깊숙이 쌓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넷째가 닭 뼈입니다. 지금 한 해 전 세계에서 도살되는 닭은 500억~600억 마리에 이릅니다. 닭의 학명은 '갈루스 갈루스 도메스티쿠스'(Gallus Gallus domesticus)이지만 우리는 '가축이 된 닭'을 줄여서 '치킨'이라 부릅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공장식 축산으로 인해서 '닭의 행성'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우리 후손들은 지금의 쓰레기매립장에서 수많은 치킨 화석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젯밤 손흥민 선수의 축구를 응원하시며 야식으로 치킨을 드셨다면 그 뼈는 썩지 않고 천 년 후 우리의 후손들에 의해 발견될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신음소리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값없이 주어진 피조물의 세계가 인간의 탐욕 앞에 상처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문제입니다. 세계교회는 이미 "자연 세계에 대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신앙적으로도] 죄"라고 선언했습니다. 실로 '아담의 죄'는 하나님이 지으신 에덴동산 안에서 다른 피조물들과 교제하며 그들을 "지키고 돌보는"(히브리어 abad - 창세기2:15) 청지기의 역할을 거부하고 "하나님과 같이 되어"(창세기3:5) 신처럼 창조세계 위에 군림하려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죄 중의 죄, '원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 죄의 결과로 "모든 피조물이 시작부터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로마서8:22) 겪고 있고,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린다"(로마서8:19)고 했던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지키고 돌보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되려면 우리는 먼저 '눈떠야' 합니다. 환경에 눈떠야 합니다. 눈을 크게 떠야 합니다. 왜 환경에 눈을 떠야 합니까? 첫째로 환경에 눈을 감았기 때문이고, 둘째로 그것은 신앙의 눈으로 볼 때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눈을 감았다'는 말은 보고도 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피카소의 작품을 보고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면 보고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작품인 우주만물을 보고도 그것에 경탄할 줄 모르면 그것 역시 보고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눈을 뜬다는 것은 그동안 못 봤던 것을 처음 본다는 말이 아닙니다. 눈을 뜬다는 것은 그동안 보아왔지만 알아보지 못했던 가치와 의미를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좁은 의미의 '환경'(環境, environment)이라는 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사람들은 보통 환경을 '배경'처럼 생각합니다. 마치 인간이 무대의 주인공이고 환경은 그 주인공을 빛나게 해주는 소품 정도로 말입니다. 하지만 자연은 하나님의 '창조세계'(創造世界, The Creation)입니다. 그것은 '자연'(自然, nature), 즉 스스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섭리와 목적 가운데 지으신 창조세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환경에 눈을 뜬다는 것은 지금까지 인간을 위한 배경이나 자원 정도로 보았던 자연을 하나님의 창조질서로 다시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피카소의 작품보다 더 위대한 하나님의 작품으로 다시 보는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 전통 안에는 자연을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책으로 보는 오랜 전통이 있습니다. 3세기 후반에 '수도생활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집트의 성(聖)안토니오스는, "내 책은 피조세계의 자연이다. 거기에서 나는 하나님의 작품들을 읽는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그는 "창조물은 자신의 창조주이자 주인을 큰 소리로 선언한다"고 했습니다.

이 전통에는 강력한 성서적 근거가 있습니다. 66권에 이르는 성서의 가장 첫 번째 책인 창세기를, 그것도 맨 처음인 제1장을 보십시오. 창세기는 자연과학 교과서가 아닙니다. 창세기 1장은 시인의 마음이 되어보아야 이해되는 장입니다. 왜냐하면 그 장의 저자 자신이 시인이 되어 우리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반복되는 운율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에는 무려 7번이나 반복되는 동일한 구절이 있습니다. 4절, 10절, 12절, 18절, 21절, 25절, 그리고 31절에 창조의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반복되는 똑같은 구절입니다. 우리는 오늘 교독문에서 그것을 다 읽어보았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입니다.

하나님은 하루하루 창조를 마치시고 "좋았다"(It was good)라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장은 "좋았다"로 시작해서 이것을 6번이나 반복한 후에 "심히 좋았다"(It was very good)로 끝나는 장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별칭은 '좋았다 장'입니다. 여기서 '좋다'(good)는 '아름답다'(beautiful)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좋다'는 또한 '사랑스럽다'(lovely)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매일 창조의 수고를 마치시고 '좋다!' '아름답다!' '사랑스럽다!'고 경탄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기 1장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천지창조의 소식입니다. 성경의 맨 처음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물질로 이루어진 이 세계가, 보통 자연이라고 불리는 이 세계가 결코 악하고 추한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으로 지으시고 경탄한, 선하고 아름다운 세계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신약성서 요한1서 4장에는 기독교가 최초로 직면했던 이단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1절). 감히 하나님의 영을 '분별,' 즉 '시험'(test)하라 했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을 '시험하라'는 구절은 단 두 번 나옵니다. 하나는 구약성서의 말라기서에서인데 많은 목사님들은 이 구절만 강조하곤 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라기3:10). 하지만 요한1서는 어지러운 이단 사상의 창궐 앞에서 어떤 영이 하나님의 영인지 아니면 적그리스도의 영인지를 시험하라고 강력히 권고하면서 그 기준을 이렇게 명확히 제시합니다.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요한1서4:2). '적그리스도'(anti-Christ)라는 무서운 말이 사용됐습니다.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을 시인하면 하나님의 영을 받은 것이요, 그것을 부인하면 적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경고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영지주의(靈智主意, Gnosticism)를 신봉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주후 1~4세기에 지중해 일대에 강력히 번창했던 집단입니다 이들은 '영지'(secret knowledge), 즉 신비하고 비밀스러운 지식에 의해 구원받는다는 사상을 펼쳤습니다. 플라톤의 사상에 심취한 이들은 영은 선이고 육은 악이라는 심각한 영육이원론에 빠졌습니다. 때문에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신(神)은 영(靈)이고 선(善)입니다. 하지만 육(肉)은 물질이고 악(惡)입니다. 따라서 영이고 선인 신은 결코 물질이고 악인 육신을 입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정통' 기독교는 바로 이 영지주의 기독교인들과의 긴 싸움을 통해 만들어졌습니다. '정통' 신앙은 어느 신학자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수 백 년 동안 이단 사상과의 투쟁을 통해 정립된 것입니다. 그 흔적이 사도신경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고백할 때, 우리는 영이고 선이신 신은 육이고 악인 물질세계를 만든 적이 없다는 영지주의의 교설에 반대하고,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신' 창조주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또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다]"고 고백할 때, 우리는 예수가 인간의 몸을 입은 적이 없고 단지 인간의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났을'(appeared) 뿐이라는 영지주의의 교설에 반대하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영으로 인간 어머니를 통해 사람의 몸을 입고 '태어났다'(born)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고 고백할 때, 우리는 육신이 죽은 다음에 그 육신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던 영혼이 해방되어 나비처럼 날아가 이데아의 세계 혹은 천당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라는 영지주의 교설에 반대하고, 우리의 영혼뿐만 아니라 육신도, 즉 물질도 구원을 받는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정통' 신앙은 전인(全人)구원입니다. 전체(全體)구원입니다. 만물의 회복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육체(물질, 자연)로부터 도피하는 구원(salvation from the body)을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육체(물질, 자연)와 함께 받는 구원(salvation with the body)을 가르쳤습니다. 기독교는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의 종교입니다. 신이 육신이 되었다는 종교입니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이를 부인하는 영은 '적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단호히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영지주의 기독교인들을 닮았습니다. 심각한 영육이원론에 빠져 구원은 구령(救靈), 즉 영혼구원만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그 결과 오늘날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파괴 따위는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직 죽어서 가는 천당, 즉 육체가 소멸된 후에 영혼만 들어가는 천당만 가르치니 북극의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상승해도, 매일 하나님이 지으신 생물종 가운데 100가지가 넘는 종이 멸종해도 그것들은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열심히 출석할수록, 그리고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에 비례하여 기독교인들의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이 떨어진다는 조사결과가 이를 반증합니다. 잘못된 신학이, 잘못된 세계관이 우리의 눈을 감기고 귀를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물질세계는 악하다'는 영지주의 이단교설로부터 오늘의 교회는 전혀 자유롭지 못합니다.

하지만 영지주의에 맞서 정통 신앙을 확립한 이레네우스(Irenaeus)는 영과 육의 통전적 구원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린도후서5:17)는 바울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만물의 총괄적인 갱신'을 구원으로 제시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 할 때, 우리는 기껏해야 그 '누구든지' 안에 흑인과 백인, 여성과 남성, 소수자와 다수자 등을 생각하지만, 이 출중한 신학자는 그 안에 인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을 다 넣었습니다. 이레네우스에게 구원은 제2의 창조 사건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으로 창조하고 아름답다 경탄한 세계를 버리고 영만 빼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세계가 비록 인간의 죄에 의해 모든 피조물이 고통을 받고 있지만 그것을 새롭게 창조하여 "영광의 자유"(로마서8:21)에 이르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렇듯 '정통' 기독교 신앙은 영육이원론과 물질혐오사상을 넘어서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 안에서 신실하고 책임 있는 청지기로 살아가라고 가르칩니다. 교우 여러분,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신앙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제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해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모든 일회용품의 사용을 삼가며, 공장식 축산으로 고통 받는 동료 피조물을 기억하면서 한 주일에 하루는 완전채식을 실천하는 일 등은 '신앙의' 실천이 될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환경운동의 차원에서 이런 일들을 실천하고 있지만, 이제 그것은 시민운동이 아니라 '신앙의' 고백이요 '신앙의' 실천이 될 것입니다. 환경주일의 예배와 삶이 분리되지 않고 그 둘이 하나가 될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대규모로 파괴하는 잘못된 정책과 과학기술에 맞서 예언자적 목소리를 발하게 될 것입니다.

전 세계 3억 정교회 신자의 지도자인 바르톨로메오스 세계총대주교(Ecumenical Patriarch Bartholomew)가 작년 말 한국의 방문했을 때 그의 강연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보시기에 모든 것이 좋았다"는 제목의 기조연설에서 그는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는 생태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지구를 창조주의 선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지구를 무신론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래 세대를 위해 이 선물을 받아들이고, 유지하고, 전달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바르톨로메오스 대주교는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감사'와 '절제'를 제안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우리 개인의 소유나 재산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소중한 보물 혹은 거룩한 선물입니다. 그 선물을 받을 때의 올바른 태도가 바로 '감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자비로움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절제'여야 합니다. 세상의 자원들은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면서 공정하게 나누라고 주신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것들을 남용하거나 낭비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현재의 세대뿐만 아니라 미래의 세대에도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와 '절제'는 앞으로 올 우리의 아이들에 대한 '이타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이라고 그는 강조했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아이들과 또 그 아이들의 아이들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그 아이들을 위해 '이타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녹색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맑은 공기와 푸른 하늘을 회복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선한 청지기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참 좋다/아름답다/사랑스럽다'고 감탄하신 창조세계를 '감사'하고 '절제'하며 지키고 돌보는 것이 바로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환경에 눈떠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환경에 눈을 크게 떠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눈을 떠야 하는 이유는 단지 그 세계가 위기에 빠졌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이 너무도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너무도 귀하고 거룩한 은총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20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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