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산티아고 순례기] 'Epilogue' 2. 새로운 모험이자 새로운 경험, '산티아고'

글·이재훈 목사(청파교회 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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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 임현수 작가)
▲까미노를 떠나오니 떠오르는 기억들이 너무도 많다. 여러 기억 가운데, 사진 속 장면 하나가 좋은 기억으로 되살아났다. 이른 아침, 헤어졌던 일행들과 다시 만나 좋은 기분과 맑은 공기, 맛난 스페인 음식을 먹던 때가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다.

우연이었을까 서서히 다가오는 필연이었을까? 아르주아(Arzua)에서 만난 캐나다 순례자 제이미와의 만남이 나를 새로운 곳으로 이끌었다. 만일 내 안에 있던 것들이 솟아 나오려는 것이었다면 그건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순례가 끝난 자리에서 새로운 여정이 시작됐다.

콤포스텔라를 눈앞에 둔 그 시점에 갑자기 고민이 쏟아졌다. 마음의 불안을 낮추고 내적 평화를 누리고자 이곳에 왔는데, 이상하리만큼 목적지에 다가가면 갈수록 혼란은 가중되었다. 이 무슨 하늘의 장난이란 말인가. 차분히 마음을 들여다보니 나의 마음은 또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산티아고는 최종 목적지가 아니었다.

이대로 돌아가면 안 될 것 같았다. 항공권을 연장해서라도 더 어디론가 떠나야 할 것 같았다. 순례 도중에 여행 시기가 성수기로 바뀌면서 항공권 교환에도 많은 추가비용이 드는 상황이었다. 결정을 내려야 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한국으로 돌아갈지 아니면 고민을 멈추고 티켓을 교환할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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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 임현수 작가)
▲한국으로 돌아오는 기내에서의 사진이다. 순례를 기념하는 배지를 가방에 달고 다니며 내가 이미 그 시간을 거쳐왔음을 그리고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로 돌아갈 수 없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결정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미리 항공권을 바꿔서 시간에 얽매이기보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온다면 그때 다시 예매하기로 한다. 바르셀로나에서 Out 해야 했던 날, 나는 그곳에서 한국이 아닌 독일로 날아갔다. 이것이 산티아고 순례가 나에게 준 첫 번째 선물이었다.

이 사건은 기약 없던 일이 실현되는 시간과 함께 왔다. 종로에서 일할 때 알게 된 동갑내기 친구, 그 장난기 많은 독일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4년 만이었다. 그와 어렵게 연락이 닿았고 뒤셀도르프 공항까지 마중 나온 그의 환영으로 새로운 여정이 시작됐다.

즐겁게 신혼생활을 보내고 있는 친구 정상이는 독일교회의 목사다. 그리고 그의 장모님은 얼마 전 부퍼탈(Wuppertal)에 한국 음식점을 냈다. 친구의 신혼집에 순례 짐을 푼 이 민폐남은 친구 장모님 음식점에 가 자주 식사를 대접받았고, 은혜를 갚고자 식당 마감 시간에 열심히 청소와 설거지로 도왔다. 그리고 바쁜 시간을 쪼개 쾰른과 뒤셀도르프, 본, 암스테르담을 구경시켜준 친구 덕에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하게 된다.

사소한 에피소드도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과 대학교 때 배운 독일어는 다 어딜 갔는지 현지인들이 하는 말을 단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던 것이다. 아이스크림 가게 계산대 앞에서 얼마나 벌벌 떨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식은땀이 흐른다. 그러나 그곳에 잠시 머물던 한 존재가 경험하고 느꼈던 것은 그곳에 있어 봤던 자가 고스란히 받게 될 소중한 경험의 몫임을 안다. 다시 말해 그곳에서 경험한 모든 것은 그것을 경험한 자만이 갖게 될 선물이라는 말이다.

독일을 떠나던 날, 그간의 융숭한 대접에 대한 감사의 사례마저도 마다했던 정상이와 그의 아내 환희씨. 그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산티아고가 내게 준 소중한 인연임을 잊지 않는다. 새로운 경험은 약간의 무모함 없이는 불가능했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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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 이재훈 목사)
▲4년 만에 만난 친구와 뒤셀도르프 공항에서 했던 첫 번째 짓(?)이다. 너무 반갑고 고마운 나머지, 이 순간을 잊지 말자고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떠나야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독일을 떠나서도 한국으로 바로 돌아오지 않은 채 체코와 이탈리아를 거쳤다. 이 두 나라 모두 계획에 없던 곳이었고 모두 하루 전날 정해서 오게 된 나라였다. 아름답고 낭만적인 체코에서 한없는 자유와 쓸쓸한 고독을 경험하기도 했고 또 잠깐 스치는 인연들을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 그리고 이탈리아로 향하는 공항에서 한국 여행자와 만나 조금은 덜 외로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매 순간이 낯설었고 매 순간에 심장이 뛰었다. '자유'와 같은 말이 '불안'이라고 했던가? 늘 입으로 자유를 원한다고 하지만, 몸으로 살아내는 자유는 훨씬 많은 '내면의 힘'을 필요로 하는 걸 느꼈다. 불안을 나의 속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힘 말이다.

그러나 끝은 왔다. 마지막 순간은 오기 마련이다. 독일을 포함한 세 나라에서 고독과 직면하느라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쳤던 모양이다. 언제부턴가 자꾸 집 생각이 났다. 나의 정신은 여행보다는 온전한 쉼을 원했다. 물론 지친 몸뚱이와 허전한 마음도 공항에만 가면 다시 엔도르핀이 솟아나는 걸 경험하지만 이젠 이 정도면 됐다는 마음이 더 큰 울림을 준다.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두 눈을 감은 채 두 달여 간의 시간을 돌아본다. 미지의 땅에 대한 두려움이 이미 지난 경험이 되어 나의 몸에 가득 새겨져 있었다.

7월의 어느 날 오후, 후텁지근한 고국의 날씨가 그동안 수고했다며 순례자의 온몸을 감싸주었다. 무소부재(無所不在)한 신의 숨결이 일상의 자리로 살포시 등 떠밀었다. 끝.

* 이재훈 목사의 산티아고 순례기 연재가 끝났습니다. 연재를 마치기까지 수고해주신 이재훈 목사님과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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