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창세기 2:4-7, 고린도전서 6:12-13, 19-20, 요한복음 11:25-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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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얼마 전, 미국 변호사 출신의 한 유명 방송인이 마약 투약 혐의로 경찰에 긴급 체포되었습니다. 독실한 몰몬교 신자인 그가 마약을 했다는 사실에 충격은 더욱 컸습니다. 몰몬교는 술과 담배는 물론이고 커피와 홍차, 그리고 결혼한 남녀 이외의 성관계를 엄격히 금하는 대표적인 '금욕주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사회에서 심심치 않게 마약 문제가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유명 연예인들이 마약 사건으로 줄줄이 구속되고 있습니다. 유명인들뿐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삶 깊숙한 곳까지 마약이 파고든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마약을 통해 쾌락을 갈구하지만 점점 나락으로 빠져듭니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그리스도인들은 이 도덕적 혼란 속에서 무엇을 성찰해야 할까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마약'에는 확실한 기독교적인 대안이 있는데, 그것은 '구약'이고 '신약'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분명한 대안입니다. 신약성서 고린도전서 제5장과 6장에는 사도 바울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쾌락주의입니다.

쾌락주의(hedonism)의 어원은 그리스어 '헤도니코스'(hedonikos)인데, 그 뜻은 즐거움, 유쾌함, 기쁨, 만족이라는 뜻입니다. 즐거움이나 만족을 뜻하는 단어는 여러 가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영어에서 "pleasure"는 가장 넓은 의미의 즐거움과 만족입니다. "Enjoy"는 무언가를 느긋하게 즐기는 기분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delight"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즐거움이나 만족이 커서 그것이 말이나 몸짓 등으로 표출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joy"가 있습니다. 그런 큰 기쁨과 만족이 지속적일 때 사용됩니다. 행복감이 넘쳐서 가만히 있을 수 없는 크고 지속적인 기쁨, 그것이 "joy"입니다. 그래서 "joy"는 종종 종교적 기쁨과 행복감을 나타낼 때 쓰입니다. (복음성가에 "I have a joy, joy, joy, joy down in my heart!"라는 가사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쾌락주의가 말하는 기쁨은 지금까지 말한 것과는 다릅니다. 육체적 쾌락이나 방종을 영어에서는 "self-indulgence"라고 합니다.

고린도(Corinth)는 당대 최고의 상업도시였습니다. 항구도시로서 동서 문물 교환의 중심지였습니다. 교통과 문화의 핵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크게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오죽하면 "고린도화한다"라는 말은 곧 음란한 생활을 뜻할 정도였겠습니까?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도덕한 도시가 고린도였습니다.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나에게 허용되어 있다."(All things are lawful for me.) '내가 내 돈 갖고 내 맘대로 하는 데 누가 뭐래?' 쯤으로 번역하면 좋겠습니다. 또 한 가지 유행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음식은 위장을 위한 것이고, 위장은 음식을 위한 것이다."(Food is meant for the stomach and the stomach for food.) 쉽게 번역하면, '부어라, 마셔라, 이 좋은 세상 아니 먹고 마시면 얼마나 억울하랴?' 쯤 됩니다. 이러한 무절제와 쾌락의 추구가 만연했던 곳이 고린도였습니다.

이런 도시에 바울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울은 서신을 보내 음행(fornication)과 매매춘(prostitution)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합니다. 그것이 고린도전서 제5장과 6장입니다. 여기에는 도덕적 이유 이상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고린도에는 그리스 신화에서 사랑의 여신이라는 아프로디테를 숭배하는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고린도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습니다. 거기엔 무녀 1천 명이 속해 있었습니다. 이른바 '성전 창기'들입니다. 이들은 낯에는 신전에서 일하고 밤에는 몸을 팔았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행위와 문화가 고린도 안에서는 종교적 승인을 받고 떳떳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겨우 싹이 튼 고린도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여기에 휩쓸린다면 복음은 피어보지도 못하고 죽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5-6장에서 대단히 직설적인 화법으로 매매춘과 음행의 문제를 거론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의 사람들은 "모든 것이 내게 허용되어 있다"고 말하지만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음식은 위장을 위한 것이고, 위장은 음식을 위한 것이다"라고 말하지만, 바울은 "몸은... 주님을 위해 있는 것이며, 주님은 몸을 위하여 계시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두 가지가 바울의 해법입니다. 하나는 모든 것을 제 맘대로 할 수 있다 하더라도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은 아니니 제한을 두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 '몸'이 무엇인지를 근본적으로 다시 규정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의 이원론적 철학이 지배하던 세계 안에서 몸에 대해 가히 혁명적인 가르침을 설파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몸'(body)은 그리스어로 '소마'(soma)입니다. '몸' 하면 육체(flesh)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맞서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런 몸에 대한 관념이었습니다. 바울에게 '몸'(soma)은 '육체'(sarx)와 '영혼'(psyche)의 통일체입니다. 즉 몸은 영혼보다 크고 포괄적인 것이며 육체를 포함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몸은 '전인간'(全人間)입니다.

육체와 영혼을 분리해서 사고하는 이원론은 플라톤의 철학입니다. 이 철학에 따르면 '몸은 영혼의 감옥'(The body is the prison-house of the soul)입니다. 썩어 없어질 몸이 자유로운 영혼을 가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육신의 감옥에서 영혼이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영육 이원론이 서양의 문명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구원'하면 '구령'(救靈), 즉 영혼의 구원만이라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상은 사도 바울이 2천 년 전에 자신의 존재를 걸고 투쟁했던 사상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교독문 시편 103편은 이렇게 아름답게 노래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그런데 여기서 사용된 '영혼'이란 용어는 히브리어로 '네페쉬'(נֶפֶש)입니다. 우리가 애송하는 시편 23편에도 같은 말이 나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에서 사용된 '영혼'도 히브리어로 네페쉬입니다. 사실 시편의 수많은 찬양시가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노랫말을 반복하는데, 여기서 '영혼'으로 번역된 용어가 모두 네페쉬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네페쉬는 우리말의 '영혼'과 매우 다른 개념입니다.

한국인들은 영혼을 '혼백'(魂魄)이라는 말로 설명했습니다. 이 단어에 의하면 인간의 생명은 '혼'(魂)과 '백'(魄)으로 이루어집니다. 둘 다 '넋'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목숨이 다했다는 것은 혼과 백이 분리되는 것을 뜻합니다. 분리된 혼은 인간의 육체를 빠져나와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백은 육신을 떠나지 못하고 육체와 함께 땅에 묻혀 흙으로 돌아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혼비백산'(魂飛魄散)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매우 놀라거나 혼이 나서 넋을 잃는다는 뜻인데, 글자 그대로는 '혼비,' 즉 혼은 하늘로 날아가고, '백산,' 즉 백은 땅속으로 흩어진다는 말입니다. 제대로 공양을 받지 못하거나 이 세상에 미련이 남아 있는 혼과 백은 하늘로 올라가거나 땅으로 흩어지지 못하고 '귀'(鬼)가 됩니다. 그게 우리 조상들이 흔히 말하던 '귀신'(鬼神)입니다. 그런 귀신을 달래서 이 세상과 이별하게 하는 일이 바로 무당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성서가 말하는 네페쉬는 이런 의미의 영혼이 아닙니다. 즉 '육체에 깃들어 마음의 작용을 맡고 생명을 부여한다고 여겨지는 비물질적 실체'가 아닙니다. 네페쉬라는 단어를 우리말 성경은 다양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영혼'으로 번역되는 경우가 태반이지만, '마음,' '생명,' 혹은 '생물'이라고 할 때의 '물'(物)로도 번역됩니다. (영어 성경은 대체로 "soul"이라고 옮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네페쉬는 인간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기록한 창세기 1장에는 '생물'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그것은 히브리어로 '네페쉬 하야'(נֶפֶשׁ חַיָּה)입니다. 창조의 다섯 째 날에 지으신 물속의 '생물'이 네페쉬 하야입니다.(창세기 1:20, 21) 여섯 째 날에 땅 위에 지으신 '생물'이 네페쉬 하야입니다.(창세기 1:24). 창세기는 사람도 바로 이 네페쉬 하야로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세기 2:7). 불행히도 이 개역개정의 번역은 틀렸습니다. 이 구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이 '땅 표면의 먼지' 속에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그것이 '네페쉬 하야'가 되었다는 말인데, 여기서 네페쉬 하야는 개역개정처럼 '생령'(生靈, living soul), 즉 살아있는 영이 아니라 '생명체,' 혹은 '살아있는 존재'(living being)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새번역과 가톨릭역이 이미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공동번역은 이를 의역하여 '숨을 쉬게 되었다'고 옮깁니다. ("야훼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본래 네페쉬는 '목'이나 '목구멍'을 가리키는 명사였습니다. 목구멍은 숨이 들락거리는 통로입니다. 특별히 사람의 목구멍에는 하나님의 '네솨마'(נְשָׁמָה), 즉 '생기'(개역개정), 혹은 '생명의 기운'(새번역), 혹은 '입김'(공동번역), 혹은 '생명의 숨'(가톨릭역)이 들락거립니다(창세기 2:7). 하나님의 숨이 이렇게 사람의 목구멍에 들어와 흙이 네페쉬 하야, 즉 생명체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창세기가 전하는 인간의 창조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인간론은 '영혼'이란 개념과 다릅니다. 네페쉬 하야는 '육체를 뺀 영혼'이 아닙니다. 유체이탈 현상처럼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다는 이원론적인 사상은 히브리 성서 안에서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네페쉬 하야는 생명체 자체, 존재자 자체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는 시편의 찬양시를 읽을 때에는 온 몸으로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뜻으로 읽어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 성서가 말하는 네페쉬 하야를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헬레니즘 세계에 설명하고자 노력합니다. 그것으로 전혀 다른 새 생명의 공동체를 세우려 합니다. 그리스인들은 육체를 천시했습니다. 그래서 "육체는 무덤이다"는 속담도 있었습니다. 어떤 그리스의 철학자는 "나는 시체에 얽매인 불쌍한 영혼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스어로 영혼은 '푸쉬케'(ψυχή)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이 푸쉬케, 즉 영혼이 육신과 분리되는 것이 죽음이라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약을 받고도 침착할 수 있었습니다. 푸쉬케는 불멸한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의 수제자 플라톤은 마침내 '영혼불멸 사상'의 가장 열렬한 주창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논집(論集)인 <파에돈 Paedon>은 영혼불멸 사상의 교과서가 되었습니다. 그는 푸쉬케를 '불멸하는 영혼'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진 영혼불멸 사상을 아우구스티누스가 기독교 신앙으로 채용했습니다. 이로써 중세 교회는 육체와 분리된 영혼이라는 개념을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승인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도 영혼불멸 사상이 설파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상은 성경에는 없으며 그것은 그리스 철학에서 따온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집트인들이 수많은 미라를 만든 것도 육신과 분리된 영혼이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영혼불멸 사상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떠나간 영혼이 되돌아와 다시 살아난 미라가 있다는 이야기는 - 영화를 빼놓곤 - 한 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영혼불멸 사상은 힌두교에도 있습니다. 힌두교도들은 육체와 독립된 영혼의 존재를 믿으며, 죽음 이후에도 영혼이 존속한다고 믿습니다. 원래 불교는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색(色) ·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의 다섯 가지 범주요소인 '오온'(五蘊)이 화합한 존재이며 영혼은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후대에 이르러 정토신앙과 같은 분파에서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한국불교는 민속종교를 흡수하면서 영혼신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한국의 기독교도 서구교회의 영혼불멸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민간의 영혼사상과 기묘하게 결합된 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있다고 믿는 신앙은 성경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救援)은 육체를 제외한 영혼만의 구원, 즉 구령(救靈)이 아닙니다. 성서는 전인간의 구원을 가르칩니다. 구약성서나 신약성서에 '생기,' '호흡,' '영,' '영혼,' '생명,' '목숨,' '생물,' '마음' 등 여러 가지 용어로 번역된 히브리어 '루아흐'나 '네페쉬'나 '네솨마,' 그리고 그리스어 '프뉴마'나 '푸쉬케'는 모두 1,658회 나오지만 몸과 분리되어 불멸하는 존재로서 영혼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우리말 성경에 '영혼'이라는 말은 언제나 마음과 몸을 포함한 사람 전체를 가리킬 때 쓰인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영혼불멸설이 지배하는 헬레니즘 사회에 바로 이러한 성서의 인간관과 구원관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쾌락주의와 도덕폐지론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 진정한 기쁨과 생명의 공동체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대안사회로 세웠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로마서 12:1-2)고 말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몸'은 '육체'와 '영혼'을 합한 통일체입니다. 육신과 영혼으로 나뉠 수 없는 온전한 한 인간입니다. 그 전존재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예배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와 같은 바울의 몸 이해는 어떻게 쾌락주의가 난무하던 헬레니즘 세계에서 새로운 삶의 길이 된다는 말입니까?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영과 영의 세계만 중시하고 물질로 이루어진 이 세상과 인간의 육신을 경시하는 영육 이원론에서 극단적인 두 다른 윤리가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금욕주의'와 '쾌락주의'가 바로 그것입니다. 언뜻 보면 서로 반대되거나 어긋나는 것 같지만 둘은 똑같은 뿌리에서 나온 일란성 쌍둥이입니다. 금욕주의(asceticism)가 무엇입니까? '영혼은 존귀한 것이고, 육체는 비천한 것이며, 육체란 영혼을 가두고 있는 감옥이니 이 감옥을 깨뜨려야 존귀한 영혼이 살아난다'고 보아 스스로 육체를 괴롭히는 것이 금욕주의입니다. 쾌락주의(hedonism)는 무엇입니까? '육신과 영혼은 별개이므로 육신을 아무렇게 써도 영혼만 구원받으면 된다. 어차피 썩어 없어질 육신이니까 살아있을 때 마음껏 즐기며 살자'는 생각입니다. 여기서 '도덕폐기론'(antinominalism)이 나옵니다. 2천 년 전 고린도라는 타락의 도시에서 유행했던 말, 즉 "모든 것이 나에게 허용되어 있다"나 "음식은 위장을 위한 것이고, 위장은 음식을 위한 것이다"라는 말은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보십시오. 금욕주의와 쾌락주의는 완전히 상반되는 사상들 같지만 사실은 둘 다 영혼만 중시하고 육체는 경시하는 생각에서 나왔습니다. 영혼과 육체, 정신과 물질을 대립적인 것으로 보는 형이상학적 이원론에서 나왔습니다. 이러한 철학은 인생을 영혼과 육체의 싸움터로 봅니다. 정신과 물질의 싸움터로 봅니다. 그래서 육체와 물질을 누르고 영혼과 정신의 승리를 목표로 합니다. 이런 세계관이 육체적 쾌락과 방종을 허용합니다.

쾌락주의와 금욕주의는 둘 다 '육신에 대한 학대'라는 점에서 형제지간입니다. 몸을 귀히 여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의 첫 열매로 고백하는 교회는 영혼의 불멸이나 회귀 혹은 윤회가 아니라 '몸의 부활'(resurrection of the body)을 가르칩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의 육신이 부활한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만이 가지고 있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이론이 아닙니다. 추상적인 교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신앙고백은 인간의 불의한 역사 안에서 언제나 약하고 힘없는 존재들이 소망을 가지고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게 만들었습니다.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받은 미국의 흑인여성 작가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의 소설 <비러브드 Beloved>가 생각납니다. 영화로도 만들어져 미국의 인종차별주의로 고통 받는 흑인들의 아픔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아직 흑인들의 교회당도 없고 주일도 제대로 지킬 수 없던 시절, 흑인노예들은 숲 속에 모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하나님께 예배했습니다. 변변한 설교자도 없던 시절, 나이 많은 할머니가 남녀노소 흑인 노예들 앞에서 유창하지 않지만 마음을 울리는 설교를 합니다. 검은 색 피부를 가진 몸 때문에 학대당하고 살해당하는 흑인들에게 자신의 손을 만져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백인들을 여러분의 그 검은 손을 사랑하지 않아요. 하지만 하나님은 그 손을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손을 사랑하세요!(Love your hands!) 백인들은 여러분의 검은 몸둥아리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러분의 몸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사랑하세요!(Love your flesh!)'

이제 우리는 왜 사도 바울이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의 마지막 단락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몸은 음행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있는 것이며, 주님은 몸을 위하여 계십니다... 여러분의 몸은 성령의 전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서 여러분 안에 모시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스스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여러분을 사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 참으로 놀라운 선포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성령을 주실 수 있도록 너희 몸을 거룩하게 만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성령께서 이미 너희 안에 거하시므로 너희 몸을 음행으로부터 지키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니"(19절) 지키라고 말합니다. 주께서 우리는 값으로 사셨으니 우리 몸을 잘 지키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값을 치른 존귀한 존재입니다. 성령께서 그 존재 안에 거하십니다. 우리의 숨결보다 더 가까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숨이 우리의 목구멍 안으로 불어와 땅 위의 먼지인 우리가 네페쉬 하야, 즉 살아있는 생명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의 몸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여러분의 손을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의 육신을 사랑하십시오. 짓밟히고 무시당하고 상처 입은 자신의 몸을 위로하십시오. 우리의 몸은 앞으로 올 내세의 삶을 위해 버리고 갈 빈 껍데기가 아닙니다. 몸을 학대하고 오용하고 경시하는 것은 창조주를 무시하고 거스르는 것입니다. 음행의 죄는 자기의 몸에 대한 죄입니다. 마약과 음행과 신체에 대한 폭력은 성령께서 거주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파괴하는 중죄입니다. 성적 타락은 곧 영적 타락입니다. 육체에 대한 폭력은 곧 영혼의 파괴입니다. 몸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값으로 사신 여러분의 귀한 몸을 거룩하게 보존하십시오. 그리고 성령께서 거하시는 몸을 쾌락의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잘 사용하십시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세상은 쾌락을 갈구하며 마약에 탐닉하며 도덕의 나락으로 빠져가고 있습니다. 마치 2천 년 전 고린도라는 도시를 보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의 그리스도교 신앙은 고린도처럼 되어 가는 이 세상을 깨끗이 정화할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까? 쾌락과 방종이 아니라 진정한 기쁨과 감사와 행복을 선사할 수 있습니까? 이원론적인 신앙은 힘이 없습니다. 영혼만 귀하고 육신은 천하다 가르치는 신학은 쾌락주의의 공범입니다. 오늘 우리는 '몸의 부활'을 가르친 사도들의 신앙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아무리 경건하고 진지하다 하더라도, 우리는 고린도처럼 되어가는 세상 속에서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의 일부로 남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을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의 몸을 거룩하게 지키십시오. 주께서 몸 버려 여러분의 몸을 사셨습니다. (2019.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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