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나이 80고개를 넘어가면서 달라지는 게 있다. 복잡한 것이 싫어지고 단순한 것을 좋아하게 된다. 가급적 간결한 말과 글과 삶이 그리워진다. 시력과 청력이 약해지고 정신의 집중력도 떨어지기 때문일 수 있지만, 어느 정도 산전수전 다 겪고 경험하였기에 세상 이치와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심정을 비유적으로 말하면 신앙 면에서는 옹달샘을 찾게 되고 신학적으로 말하면 본론의 초점만을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옹달샘은 맑은 물이 고여 생기는 것이지만, 가만히 보면 물이 고이기만 한 것은 아니고 어디에선가 조금씩 흘러 들어오는 가느다란 물줄기가 있고 흘러나가는 곳이 있다. 그래서 좋은 옹달샘은 항상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다. 맑은 옹달샘 물 표면과 속엔 하늘이 보이고 달도 보이고 날아가는 기러기와 들여다보는 어린아이의 얼굴도 보인다. "마음이 깨끗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하나님을 뵐 것임이요"라고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말씀했다.
비약해서 은유적으로 말하자면 옹달샘은 물이요, 초점은 불이다. 집광렌즈에 의해 초점에서는 열과 빛이 집중되어 종이를 태우므로 초점은 불의 상징이다. 고대 헬라인과 동양인 옛사람들의 단순화시킨 우주론에 의하면 물과 불은 서로 상극이다. 그 두 가지는 흙, 바람과 더불어 우주만물을 존재 가능케 하는 4원소(地水火風)이다. 그런데 매우 역설적이게도 성경의 종교는 '반대의 일치'를 경험하라고 말하는 종교다.
중국인들 자연주의 사상의 백미라고 일컫는 노자 도덕경에는 가장 좋고 성숙한 삶의 경지는 물의 덕성에서 배우라고 말한다. 이른바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온갖 망상과 잡념과 미망과 탐욕적 실존존재 현실을 "불타고 있는 집"에 비유한다. 해탈은 불꽃을 꺼버리는데 있고 불타고 있는 집에서 빨리 뛰쳐나오는데 있다. 이른바 '니르바나'라는 산스크리트어의 원래의미는 "불꽃을 불어서 꺼버린다"는 뜻이다. 더운 여름밤 모깃불과 방안의 기름 등잔불마저 꺼버리면 고요한 달빛만 방안에 가득하다. 청량한 바람이라도 조용히 불면 부채나 선풍기가 필요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경에서는 물과 불이 공존한다. 성령의 사람은 생수가 그 배속에서 흘러나오는 듯하다. 성령 체험한 사람은 거룩한 불이 마음 속 쌓이고 숨겨진 온갖 죄를 불태워 버린다. 바알사제들과 대결에서 엘리야의 야훼 하나님은 제단의 제물을 불로 살라버리고 불 수레에 태워 엘리야를 승천시킨다. 예수는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던 사람의 눈에 흙을 침에 이겨 가지고 발라 1차 치유하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한다. 시각장애인은 보게 되었는데 요한복음 9장은 그 이야기를 마감하면서 세상에서 자기가 잘보고 가장 바르게 본다고 자처하는 소위 눈을 떴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 신학자, 목사, 신부 같은 사람들을 시각장애인이라고 결론 내린다. 그래서 성경은 참 이상한 경전이다, 일상 생활경험에서는 상극인 물과 불을 '반대의 일치'라는 역설의 논리로서 하나 되게 하기 때문이다.
오늘 에세이의 제목을 거창하게 산상수훈과 수타니파타(suttnipata)라고 어울리지 않는 제목을 붙였다. 산상수훈과 수타니파타(經集)의 공통점 곧 군살이 없이 단도직입적이고 간결하고 단순하지만 영원히 넘어설 수 없는 진실, 기독교와 불교의 진수를 나타내 보여주는 짧은 경전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수타니파타'(sutta-nipata)는 고대인의 팔리어로 쓰인 초기불교 경전의 하나인데 초기불교의 가르침 곧 고다마 싯다르타의 가르침의 순수한 형태를 반영한다고 전문가들이 평가하는 경전이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중에서도 마태복음 제5장 처음에 나오는 '여덟 가지 복있는 사람'에 관련된 성구는 온갖 덤불숲으로 길을 잃은 오늘의 기독교인에게 신앙의 오솔길에서 만나는 신선한 옹달샘과 같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虛心者)은 복 있다. 천국이 그의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淸心者)이 복 있다. 그가 하나님을 뵐 것이다." 두 말 할 것 없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모든 문제는, 필자를 포함해서, 특히 교회를 이끌어 간다는 목회자들 신학자들 그리고 신도들을 대표한다는 장로들의 마음이 가난하지 않고 깨끗하지 않는데 원인이 있다.
널리 잘 알려진 초기 불교 경전중 하나인 '수타니파타'의 어느 구절에 실린 다음 같은 명구가 떠오른다. 붓다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나선 제자들에게 붓다가 일러주는 말로 되어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 걸어가라!"
백수의 왕이라는 아프리카 초원의 사자는 뇌성벽력이 울려도 초원에 그대로 엎드려 소나기를 맞으면서 소리에 놀라지도 않고 비를 피하지도 않는다. 바람은 그물을 걷어차거나 돌아가지 않고 그물사이를 걸리지 않고 빠져 흐른다. 불교 사문(沙門)들의 최고 경지인 절대 무애인(無涯人)의 표상이다. 연꽃은 연못 바닥에 고여 쌓인 오물 진흙 속에 뿌리내리고, 바람에 흔들리는 줄기 끝에 피어서 세류 속에 시달리지만 연꽃은 오염되지 않고 항상 청조하다. 무소는 코뿔소를 말하는 듯하다. 혼자서 우직하게 앞으로 돌진하는 용기를 상징한다.
'옹달샘과 불꽃'이라는 흰백지 종이 50장을 주면서 늦게 철나는 늙은 신학도 목사에게 맘대로 수필 같은 글을 써보라고 권한다. 수필은 생각 가는 데로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다. 격식도 없고 제약도 없다. 그래서 첫 번째 글 제목 산상수훈과 수타니파타 나가는 말을 이렇게 마감하고 싶다. 거의 소음과 다름없는 오늘날 교계의 온갖 뉴스 신문들을 보라. 그 옛날 사두개인들과 서기관 무리들처럼 경전과 전통의 해석 특권을 움켜쥐고서 교회를 살리는 생수는커녕 권력 투쟁장과 같은 신학교들을 보라. 정치권력 경제권력 문화권력에 아부하고 기웃거리는 지도자라고 자처하는 자들의 온갖 추태를 보라.
"온갖 세상 시끄러운 큰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호렙산 동굴 속의 엘리야 처럼, 형제를 옭아매고 정죄하는 번잡한 신학 교리에 걸리지 않는 앗시시 프란시스처럼, 역사의 고뇌 속에 참여하고 삶의 복판에서 교수형당해도 연꽃 같던 본회퍼처럼, 갈릴리 예수처럼 민중과 함께, 씨알들과 더불어, 그러나 결국 혼자서 걸어가라!"
※ 숨밭 김경재 박사의 '옹달샘과 초점'을 오늘부터 연재합니다. '옹달샘과 초점'은 물처럼 순수한 종교적 영성과 불처럼 예리한 선지자적 비판과 성찰이 씨줄과 날줄로 엮어진 신학자 김경재의 신앙 에세이 글입니다.- 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