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대를 막 통과하고 있는 젊은이와 정말 우연히 마주 앉았다. 어느 때부터인지 젊은이들이 묻기 전에는 말하지 않겠다고 작정하고 있는 터였다. 무슨 일을 해도 헤덤비는 일이 없지만, 댕돌처럼 단단한 인식의 기초 위에서 처신하던 그가 비스듬한 미소를 띤 채 나를 바라보다가 무심한 듯 툭 질문을 던졌다. "목사님은 젊은 날을 어떻게 견디셨어요?" '견딤'이라는 단어 속에 그가 앙버티고 있는 삶의 무게가 느껴졌다.
그래서 소환된 나의 젊은 날은 방황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었다. 치열한 인식욕과 시대의 어둠에 맞서야 한다는 책임감 사이에서 난 늘 흔들렸다. 흔연하게 어느 한쪽에 치우칠 수 없었던 회색인의 초상이 떠올랐다. 현실의 나와 되고 싶은 나 사이의 틈 혹은 불일치가 버거웠다. 그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것은 뜻밖에도 허무감이었다. 모두가 확신의 언어로 말하는 곳에서 허무감에 사로잡힌 채 허둥거린다는 게 죄스럽기만 했다. 그러나 허무감은 집요했고 좀처럼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사람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게 마련'이라는 말을 변명 삼아 그 시절을 견뎠다.
삼십 대 중반의 어느 날 문득 허무감이 사라졌음을 느꼈다. 한 번도 싸워 이겨보지 못한 상대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지내고 있음을 자각한 것이다. 방황의 시간이 그친 것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익숙한 세계에 안주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많은 세월이 흘렀다. 방황하던 젊은 날은 아련한 꿈처럼 저 먼 곳에 있고, 더 깊은 인식을 위한 모험에 나서지 못하는 굼뜬 존재가 여기에 있다. 타락이다. 한때 하구에 밀려온 썩은 생선을 두고 경쟁하는 삶에 등을 돌린 채 높이 그리고 빨리 나는 일에 몰두하던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을 꿈꾸기도 했다. 외롭고 쓸쓸한 길, 몸과 마음이 여윌 수밖에 없는 그 길에서 언제 벗어났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위험을 무릅쓰고 높은 산에 오르는 산악인들이나 극지를 찾아나서는 이들에게 '왜 위험한 일을 자초하느냐?'고 묻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행위는 무용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유용성을 모든 가치의 기준으로 삼는 이들에게 무용한 일에 몰두하는 이들은 무책임해 보인다. 그러나 인간의 책무는 자기를 초월하는 데 있다지 않던가? 유용성에만 매달리면 영혼은 납작해지게 마련이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세계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세상을 넓게 만든 사람은 고향의 지리학자처럼 느긋한 인식가가 아니라, 미지의 대서양을 거쳐 새로운 인도를 건너간 무법자들이며, 현대인의 영혼의 심층을 인식한 사람들은 심리학자나 학자들이 아니라, 시인들 중 무절제한 자들, 즉 한계 초월자들이다." 인간이 얼마나 놀라운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위대한 전령들이 없다면 삶은 얼마나 삭막할까.
성경은 경계선을 가로지른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인종, 피부색, 종교, 빈부귀천을 가르고 차별과 배제를 통해 자기 계급의 이익을 공교히 하려는 이들은 경계선 만들기에 몰두한다. 경계선은 '내 편'과 '네 편'을 가름으로 경계선 저 너머의 세상을 적으로 돌려세운다. 아브라함은 익숙한 세계를 벗어나 낯선 세상을 떠돌았다. 그렇게 함으로 복의 매개자가 되었다. 출애굽 공동체는 애굽을 떠나 광야로 들어감으로 새로운 역사의 비전을 내면화했다. 예수는 당신의 몸으로 이방인과 유대인을 가르는 분리의 장벽을 허무셨다. 폭력에 기반한 로마의 평화가 허구임을 폭로하고, 자기희생을 통해 이룩되는 그리스도의 평화를 몸으로 입증했다. 한계 초월자들은 기득권자들에게 불편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안일한 평화를 깨뜨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믿음의 사람은 땅의 인력에 이끌려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의 뜻에 따라 자기 삶을 조율하는 사람이다. 전우익 선생은 참 삶이란 부단히 버리는 것과 든든히 붙잡는 것의 통일이라 말했다. 버릴 것을 버릴 때 삶이 가벼워진다. 붙잡아야 할 것을 든든하게 붙잡을 때 삶이 부유하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철 들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순례자로 산다는 것은 바로 그런 뜻이 아닐까? 순례를 그치는 순간 영혼은 낡아지기 시작한다.
※ 이 글은 청파김리교회 홈페이지의 칼럼란에 게재된 글임을 알려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