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르호봇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창세기 26:2-22, 히브리서 11:1-3, 8-10, 마태복음 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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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노년기에 접어든 노벨(Alfred Bernhard Nobel, 1833-1896)이 어느 날 조간신문을 펼쳐 들고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신문의 일면에 '노벨 사망하다'라는 커다란 기사가 나와 있는 것이 아닙니까! 게다가 그 기사의 내용은, '죽음의 사업가, 파괴의 발명가, 다이너마이트의 왕이 죽다'였습니다. 물론 그 보도는 프랑스의 한 기자가 동명이인의 죽음을 잘못 알고 보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노벨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가 세상을 떠나고 나면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미리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죽음의 사업가, 파괴의 발명가'로 자신의 생을 마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모은 거대한 전 재산을 바쳐 인류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노벨상'을 제정했던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죽고 난 후에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길 원하십니까? 여기 한 위대한 삶을 살았으나 사람들에게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어느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창세기 26장의 이야기를 새번역으로 다시 읽어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워 버렸다.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말하였다. '우리에게서 떠나가시오. 이제 당신은 우리보다 훨씬 강하오.' 이삭은 그 곳을 떠나서, 그랄 평원에다가 장막을 치고서, 거기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이삭은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다. 이 우물들은, 아브라함이 죽자, 블레셋 사람들이 메워 버린 것들이다... 이삭의 종들이... 우물을 파다가, 물이 솟아나는 샘줄기를 찾아냈다. 샘이 터지는 바람에, 그랄 지방 목자들이 그 샘줄기를 자기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삭의 목자들과 다투었다. 우물을 두고서 다투었다고 해서, 이삭은 이 우물을 에섹이라고 불렀다. 이삭의 종들이 또 다른 우물을 팠는데, 그랄 지방의 목자들이 또 시비를 걸었다. 그래서 이삭은 그 우물 이름을 싯나라고 하였다. 이삭이 거기에서 옮겨서, 또 다른 우물을 팠는데, 그때에는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주님께서 우리가 살 곳을 넓히셨으니, 여기에서 우리가 번성하게 되었다" 하면서, 그 우물 이름을 르호봇이라고 하였다.'"(창세기 26:15-18, 22)

창세기 26장의 이 본문은 사람들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이삭에 관한 이야기 한 토막입니다. 사실 이삭이라는 인물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나 그의 아들 야곱과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강렬한 인상을 주는 인물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히브리인들의 원조이자 구약시대 최대의 족장이며, 히브리 신앙의 중심인물이라는 막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그의 험난한 인생역정 속에서도 얍복강가에서 밤새워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며 결국 '하나님을 이겼다'는 뜻의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어내어 히브리 민족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선물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이삭의 생애를 돌아보면 특별한 점이 없어 보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식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모리아 산의 사건(창세기 22장)에서도 당사자인 이삭은 어떤 주체적이고 개성 있는 역할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저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산에 오른 한 어린아이에 불과했습니다. 이처럼 이삭은 자기 아버지와 아들의 명성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눌려 후대로 갈수록 그의 인생의 의미가 희미해져 버린 존재로 보입니다. 단지 아브라함과 야곱의 육신의 계보를 잇는 중간고리 정도밖에 안 되는, 그저 그런 인물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큰 오해입니다. 만일 이삭의 삶에서 남겨진 뚜렷한 신앙의 유산이 없다면 히브리 신앙은 존재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는 단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만 존재하는 과정적 존재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신앙의 강줄기에서 하나의 독자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는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을까요?

창세기 26장의 본문은 이삭이 열심히 일해 잘 살다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갑자기 살던 땅에서 내쫓기는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원래 아버지가 살던 브엘라해로이 땅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흉년이 들자 기근을 피해 블레셋 왕 아비멜렉((Ǎḇîmeleḵ)이 다스리는 그랄(Gerar)이라는 땅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랄은 팔레스타인 땅의 곡창지대입니다. 이삭은 그 땅에서 농사를 지어서 그 해 무려 백배의 수확을 거두어들였습니다. 성서에서, 특히 신약성서에서 '백 배'나 받는 복은 신실함의 결과로서(마태 19:29, 마가 10:30),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응답의 결과로 주어지는 특별한 것입니다(누가 8:8). 그리고 재산이 점점 늘어 아주 부유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기근의 위기를 벗어나 새로 정착한 땅에서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때 엄청난 재앙이 한꺼번에 밀려왔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을 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삭이 이룩한 풍요의 근원을 막아버렸습니다.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 때 판 모든 우물을 흙으로 메워버린 것입니다. 세상이 워낙 그런가 봅니다. 내 일이 잘되면 모두가 기뻐할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것을 시기하고 어떻게든 잘못되기를 은연중에 혹은 발 벗고 바라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남 잘된 이야기보다는, 남 못된 이야기에 더 흥미를 느끼는 우리 자신도 예외는 아닌 듯합니다.

당시 우물은 생명줄입니다. 그것을 막고 흙으로 메웠다는 것은 이삭과 그의 가족은 물론, 그와 연결된 모든 과거의 역사와 미래의 가능성까지 송두리째 막아버리는 일이었습니다. 이삭은 이제 조상의 면목을 볼 수 없게 된 것은 물론이고 자손의 생존조차 기약할 수 없는 위기에 빠진 것입니다. 그때 그 땅을 지배하고 있던 아비멜렉이 찾아와 '이곳을 떠나라'고 말합니다. 아비멜렉의 '아비'는 아버지라는 뜻이고 '멜렉'은 왕이라는 뜻이니 '왕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다 최근 일본 아베 총리의 대한수출금지조치로 '아비'멜렉이 자꾸 '아베'멜렉으로 읽혀서 혼났습니다.) 죽이지는 않았으니 천만다행이었으나, 거역할 수 없는 퇴거명령이었습니다. 하지만 농사짓던 땅을 그대로 놓고 나가라는 말은 곧 죽으라는 소리였습니다. 하지만 이삭은 울분과 불안에 휩싸여 아무것도 못 하는 나약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메워져 버린 우물가를 툭툭 털고 일어섰습니다. 만약 그가 그때까지 자신이 일구어 놓은 것에 집착했다면 그는 거기서 무너졌을 것이고, 야곱으로 이어지는 신앙의 물줄기도 끊어졌을 것입니다. 이삭은 자신의 노력과 결실의 밑바닥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털고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빈손으로 떠났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루어놓은 것보다 하나님이 열어놓으시는 새로운 가능성과 준비를 더욱 믿었기에, 빈털터리로 떠나도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마도 소년 시절 모리아 산에서 겪었던 충격과 감동이 평생 그를 그렇게 만든 것 같습니다.

모리아 산 위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시는지요. 창세기 22장에 기록된 유명한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은 번제에 쓸 장작을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신은 불과 칼을 챙긴 다음에, 두 사람은 함께 걸었다. 이삭이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물었다. 그가 '아버지!'하고 부르자, 아브라함이 '얘야, 왜 그러느냐?'하고 대답하였다. 이삭이 물었다. '불과 장작은 여기에 있습니다마는,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얘야,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 함께 걸었다"(창세기 22:6-8).

지금 어떤 상황인지 보이십니까?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모리아 산 정상을 향해 걷고 있는데, 이 동행의 목적은 아버지가 아들을 죽여 불태워 하나님께 번제(燔祭)로 바치려는 것이었습니다. 말도 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우선 하나님이 하나님다워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잡아 바치라니요. 이삭이 어떻게 해서 얻은 아들입니까? 기력이 쇠한 사라의 몸에서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 했을 때 아브라함은 엎드려 비웃었습니다. "내 나이 백살이고 사라의 나이 구십인데 이거 말이나 되는가?" 그러다가 약속대로 아들이 태어나자 아브라함은 그를 '이삭'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그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바로 '웃는다'입니다. 그런데 이 웃음을 도로 내놓으라니요. 이 기쁨을 도로 반환하라니요. 설령 이것이 하나님에게는 한 번 해보는 시험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시험을 당하는 쪽에서는 초죽음을 당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도대체 이런 명령을 내린 하나님이 하나님다워 보이지 않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도 전혀 아버지다워 보이질 않습니다. 그의 행동을 보십시오. 아들을 잡아 바치라는 하나님의 요구에 대꾸 한마디 못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 모리아 산을 향해 길을 떠납니다. 아이의 어머니에게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당연히 아내와 상의하고 또 하나님께 항거했어야 했습니다. 조카 롯(Lot)을 살리기 위해 그토록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렸던 아브라함은 왜 자기 자식의 운명 앞에서는 이다지도 무력하고 비정하단 말입니까? 하지만 그들은 길을 떠났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모리아 산까지 가는 사흘 동안 둘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성서는 전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산에 도착하자마자 아브라함은 긴 여행으로 지쳐 있을 어린 아들만 데리고 정상으로 오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이 더욱 충격적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장작더미를 직접 지고 걷게 합니다. 자신의 몸을 불태우게 될 나뭇가지들을 희생자가 직접 지고 걷게 한 것입니다. 이 비정하기 짝이 없는 아버지의 손에는 불과 칼이 들려 있습니다.

결국 아들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것 같습니다. '아버지,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지난 사흘간의 침묵이 비로소 깨졌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을 자기 손으로 직접 죽여야 하는 아버지의 고통이 겹겹이 감추어져 있던 그 순간, 이삭의 질문 한마디는 아버지의 폐부를 날카롭게 찌릅니다. 그 때 아브라함이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아들아,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순수 마련해 주실 것이다.' '얘야,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번제로 드릴 양을 스스로 준비하실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 때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선언한 것입니다. '나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하나님의 준비를 믿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잡아 번제로 바치라고 하였지만, 아브라함은 끝까지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스스로 번제물을 준비하셨다고 믿었습니다. 아들의 가슴에 내려찍으려고 번쩍이는 비수를 높이 쳐드는 그 순간까지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번제로 바칠 다른 제물을 준비해두셨음을 믿었습니다. 그 때 아들 이삭을 향한 아버지 아브라함의 비정함은 하나님을 향한 가혹한 심문이 되었습니다. '나는 최후의 이 순간까지도 이렇게 당신을 믿는데, 당신도 나를 끝까지 믿습니까?' 상황이 역전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당황한 것은 하나님 쪽이 되었습니다. 수세에 몰린 것은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그만! 그만!' 다급해진 하나님이 이삭의 심장을 향해 사정없이 떨어지는 아브라함의 팔을 움켜잡았습니다. '알았어, 제발 그만해! 너의 마음을 내가 알았어. 널 못 믿는 내가 잘못이야!'

그렇게 모리아 산꼭대기에서 하나님이 졌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이겼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하나님의 믿음보다 강했습니다. 칼을 떨군 아브라함이 고개를 들고 살펴보니, 수풀 속에 숫양 한 마리가 있는데, 그 뿔이 수풀에 걸려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숫양을 잡아다가, 아들 대신에 그것으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이후에 아브라함은 이 일을 두고 '여호와이레'라 불렀습니다. '주님의 산에서 준비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여 친히 준비하신다는 뜻입니다.

이삭은 모리아 산의 사건을 통해서, 삶과 죽음의 경계선 위에서 '여호와이레'를 온몸으로 체험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는 것이 우리에게는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이고 언약입니다. 이삭은 자기가 힘써 이루어놓은 것보다 하나님이 새로 열어젖히시는 복된 미래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이 우물을 메워버리자 주저 없이 그곳을 떠나 새 우물을 팠습니다. 물론 시련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새 우물을 탐낸 사람들이 또다시 몰려들어 그것을 자기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이삭은 또 떠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새 우물을 팠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을 탐낸 사람들이 차지해버렸습니다. 조금 살만하면 역경이 그치지 않는 것이 우리 생인가 봅니다. 하지만 이삭의 우물 파기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다툼'이라는 뜻의 '에섹'(Esek)이라는 우물이 막히고, '대적함'이라는 뜻의 '싯나'(Sitnah)라는 우물이 막히자, 이삭은 또다시 새 우물을 팠습니다. 그러자 비로소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이삭은 "이제 주님께서 우리가 살 곳을 넓히셨으니, 여기에서 우리가 번성하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그 우물을 '르호봇'(Rehobot)이라고 이름지었습니다(창세기 26:22). 오늘 설교의 제목이기도 한 '르호봇'이라는 말의 뜻은 '넓음' 혹은 '넓은 곳'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공간을 넓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숨 쉴 공간'을 터주셨다는 뜻입니다. 공동번역 성서의 번역처럼 '마침내 하나님께서 우리의 앞을 활짝 열어주셨다'라는 의미입니다. 구석으로 쫓기고 쫓기던 이삭에게 그와 그 후손들이 살아갈 광활한 생명의 터전을 열어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창세기 26장에 기록된 이삭의 삶은 오늘의 교독문 시편 37편이 말하는 '복 있는 사람'의 모습을 생각나게 합니다. 새번역으로 다시 읽어봅니다. "주님만 의지하고, 선을 행하여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성실히 살아라. 기쁨은 오직 주님에게서 찾아라. 주님께서 네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신다.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가는 길이 언제나 평탄하다고 자랑하는 자들과 악한 계획도 언제나 이룰 수 있다는 자들 때문에 마음 상해 하지 말아라... 진실로 악한 자들은 뿌리째 뽑히고 말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반드시 땅을 물려받을 것이다... 겸손한 사람들이 오히려 땅을 차지할 것이며, 그들이 크게 기뻐하면서 평화를 누릴 것이다"(시편 37:1-11).

이삭은 하나님만 의지하고 선을 행하며 이 땅을 성실히 산 사람입니다. 가는 길이 조금도 평탄하지 않았으나 자신을 해하려는 자들 때문에 마음에 상처받지 않으며 잠잠히 주님을 바라고 간절히 주님만 찾은 사람입니다. 생명줄과 같은 우물을 메워버리는 불한당 같은 자들에게 격분할 수 있었으나 그 노여움이 자신마저 파괴할 뿐임을 알고 자신의 길을 온전히 주님께만 의지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온유하고 겸손한 이삭이 오히려 땅을 차지하여 큰 복을 받으면서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고 성서가 말합니다. 이삭은 '화평의 사람'(시편 37:37)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읽은 복음서의 말씀과 같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마태 5:5)이라 하셨습니다. 이삭은 양보하고 밀려나며 불이익을 당하면서도 이웃과 평화를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그런 평화의 사람 이삭에게 하나님이 활짝 트인 생명의 공간을 열어주셨습니다. 이를 지켜본 아비멜렉은 결국 이삭을 찾아와 "우리는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심을 똑똑히 보았다"고 말하면서 평화의 조약을 맺자고 제안합니다. (아베 총리가 우리나라에 와서 이렇게 하게 되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이삭은 자신을 박해했던 그를 맞아 잔치를 베풀고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이 평안한 마음으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바로 그 날 이삭의 종들이 판 새 우물에서 물이 터져나왔다고 성서가 말합니다. 이삭은 그 우물을 '세바'라 불렀고, 오늘날까지 그 우물이 있는 성읍을 '브엘세바'(Beer-Sheva)라 일컫게 되었습니다. '맹세의 우물' 혹은 '일곱의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이삭은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를 해하려는 사람들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끝까지 평화를 도모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환난이 다가와도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준비하심을 철저히 믿고 어디서든지 자신의 선 자리에서 새 우물을 파고 또 판 사람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어떤 상황에도 나의 신실한 동반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또한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로마서 8:28)입니다. 오늘 공동기도문으로 읽은 김소엽 님의 기도시처럼, "... 믿음이란 기실 / 수영 연습 같사오만 / 늘 죽을 것만 같아서 믿지를 못하고 / 한 세상 그렇게 염려만 하다가 / 그리는 님 하나 가지지 못한 세상 // 너를 한번쯤 던져볼 일이다. / 눈 딱 감고 맡겨볼 일이다..."(<믿음은>)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단지 신뢰와 확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브리서 11:1)라고 했습니다. '실상'(實狀)이 무엇입니까? '실제의 상황'입니다. 믿음은 앞으로 그리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지금 내 앞에서 벌어지는 실제의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수동적인 희망이 아니라 매우 능동적인 희망입니다. 희망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이라기보다 우리가 '행하는' 어떤 것입니다.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믿음은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고 계심을 끝까지 신뢰하는 것이지만, 나아가 하나님께서 나의 앞길을 활짝 열어주심을 믿고 그 믿음이 실제의 상황이 되도록 지금 여기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 능동적인 실천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브리서 11:6).

교우 여러분, 우리가 가진 어떤 것도, 우리가 이루어놓은 어떤 것도 결코 최종적으로 우리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오직 한 가지, 우리를 진정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일을 당해도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준비하심을 믿고 어디서든지 내 삶의 자리에서 새 우물을 파고 또 파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부단히 변화하는 것들 사이로 영원한 열정을 몰아가는 자는 행복하다"고 앙드레 지드는 말했습니다. 그런 믿음과 열정으로 우물 파기를 중단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넓은 곳에 이르러 생명의 우물을 얻게 될 것입니다. 마침내 여호와께서 우리 앞을 활짝 열어주셔서 '르호봇의 우물'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어려움이 닥쳐왔다고 우물 파는 일을 중단해서는 안 됩니다. 애써 판 우물을 누군가가 막고 흙으로 메워 버렸다고 분노하며 주저앉아 있어서도 안 됩니다. 길이 끊겼다 주저앉았을 때 새 길을 열어주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한쪽 문이 닫히면 언제나 다른 문을 열어주시는 게 하나님이십니다.

모리아 산 위에서 하나님의 준비하심을 뼛속 깊이 깨달은 이삭은 그래서 어떤 시련과 역경이 다가와도 다시 시작하는 믿음과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이 믿음이 바로 아버지 아브라함의 신앙을 야곱과 그의 자손들에게 전하여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단지 아브라함과 야곱의 사이에 낀 과정적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여호와이레의 신앙을 우리에게 확증하여 전해준 당당한 한 주인공(主人公)입니다.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본래 불가(佛家)에서 '득도한 인물'을 가리키는 주인공이라는 용어는 '외부의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참된 자아'를 의미합니다. 이삭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밖에서 어떤 위협과 시련이 다가와도 내면의 깊은 의지와 믿음으로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삭을 우리는 더 이상 조연(엑스트라)처럼 취급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늘 이후 이삭은 여호와를 경외하고 신뢰하며 쉼 없이 우물을 파고 또 파서 자신과 후손에게 광활한 생명의 터전을 열어젖힌 믿음의 주인공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런 이삭과 같은 사람으로, 자기 삶과 믿음의 주인공이 되어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앞에 하나님께서 '넓은 생명의 터전,' 르호봇을 활짝 열어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2019.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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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열 목사가 「기독교사상」 최근호(3월)에 기고한 '사회복지선교와 디아코니아'란 제목의 글에서 대부분의 교단 총회 직영 신학대학교의 교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