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남자나 여자나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창세기 1:26-28, 이사야 49:14-16, 마태 23: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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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언젠가 한국의 공항에서 겪은 일입니다. 환전소 앞에 줄을 섰는데, 앞에서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싸움이라기보다는 한쪽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었습니다. 70쯤 되어 보이는 반백의 신사분이 50쯤 되어 보이는 여자 여행객 앞에 끼어들었습니다. 조금 전 환전을 했는데 좀 더 바꾸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반쯤은 강제적으로 양해를 구하고 끼어들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와 똑같이 시간에 쫓기고 있던 여자 승객이 한마디 했습니다. '그래도 뒤로 줄을 서셔야지요.'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신사분은 남들이 보는 앞에서 모욕을 당했다고 느낀 모양입니다. 그때부터 큰소리로 훈계를 시작하더니 여자 여행객이 순응하는 표정을 보이지 않자 결국 한 마디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이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어디 여자가!'

그때 저는 그 한 마디가 그렇게 한국 땅에서 위력이 있는 말인지 처음 알았습니다. 그 한 마디에 여자 승객은 멍하니 할 말을 잃고 결국 자리를 뺏기고 무력하게 서 있었습니다. '어디 여자가!' "How dare you, woman!"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인 여성을 일시에 무력화시킬 수 있는 핵폭탄급 위력의 강력한 말이었습니다.

영화 <닥터 지바고>에 나오는 한 대사가 생각납니다. "여자가 된다는 것은 위대한 모험이다." 이 세상에 얼마나 크고 위험한 모험들이 많겠습니까? 그런데 그중에서도 여자로 태어난 것 자체가 가장 크고 위대한 모험이라는 말입니다.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유교 가부장제 속에서 우리들의 할머니, 어머니들이 얼마나 험난한 세월을 살았겠는지 절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가톨릭을 포함하여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지 2백 년이 넘었습니다. 한국 개신교회는 이 중 1백여 년의 길지 않은 역사를 가졌지만 커다란 양적 발전을 이뤘습니다. 한국 개신교회의 숫자를 모두 합하면 8만 개가 넘습니다. 우리나라에 어디 가나 있는 편의점과 중국집을 다 합한 것보다도 많습니다. 총 교인 수도 1천 만이 넘는다고 자랑합니다. 하지만 양적 성장을 이룬 한국교회는 질적 성숙을 위해 진지한 자기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교가 한국에 전래될 때의 초기 모습을 돌아보면서 우리가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회복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기독교가 조선 땅에 처음 들어왔을 때 기독교는 당시의 사회를 개혁하고 변혁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위계적이고 가부장적인 유교적 가치관에 의해 철저히 소외되어 살아가던 이들에게, 특히 여성들에게, 기독교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또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존엄한 존재라는, 가히 혁명적인 평등사상을 소개함으로써 급속히 전파되었습니다. 이화도 바로 이 기독교의 정신이 세운 학교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6살짜리 고아 소녀 한 명을 품음으로써 이 땅에서 이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름도 없고, 인격도 없고, 교육도 받지 못하던 여성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냄으로써 이 땅에 여성 교육의 새 역사를 열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의 역사에서 이화의 역사는 단순히 이화만의 역사가 아니라 한국의 여성사요, 교육사며, 근대사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이 선교 초기에 지니고 있던 변혁적이고 인습타파적인 특성들을 한국 기독교는 점차 상실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종교가 소종파의 형태를 지니고 있을 때는 예언자적인 특성을 지니다가 그 소종파가 점차 커지고 제도화되어 한 사회에 안착하게 될 때면 초기의 특성들을 잃어버리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한국의 기독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한국의 유교와 기독교를 깊이 연구한 한 학자(Julia Ching)에 따르면,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유교적 배경과 가치관을 지닌 기독교인들입니다. 평생을 한국에서 일한 한 독일인 선교사(Lutz Drescher)의 말처럼,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보다 공자님을 더 섬기는 사람들'일지 모릅니다.

유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서기 372년입니다. 이로부터 약 1천 년이 지난 1392년에 조선왕조가 건국되어 유교를 국교로 삼은 이후 한국인들의 삶 구석구석에 유교는 깊이 뿌리를 내렸습니다. 한국에서 기독교와 유교의 만남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연구도 있지만, 유교가 끼친 악영향도 지대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교회 내 성차별입니다. 어떤 이들은 유교를 이상적 휴머니즘으로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유교에서 말하는 '이상적 인간'이란 오직 남성, 그것도 양반만을 뜻합니다. 이런 것이 과연 진정한 휴머니즘일까요?

주중에 『임윤지당 평전』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이화인문과학원 김경미 교수 지음, 한겨레출판사). 부제로 "규방의 삶을 벗어던진 조선 최고의 여성 성리학자"라는 말이 붙어 있었습니다. 성은 임씨요 호가 윤지당인 이분은 18세기 조선을 살았던 여자 선비입니다. 성리학(性理學)에서는 사람이 천지와 나란히 하는 존재이며,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치지요. 그런데 과연 그 '사람' 안에 여자도 포함되는지 의문을 가졌던 사람이 바로 윤지당입니다. 당시 여성들에게 허락되었던 학문의 자유는 시와 그림 그리고 한문보다 상스럽다 취급받던 한글 필담만 겨우 나눌 수 있는 정도였습니다. 여성들은 철저히 교육에서 배제됐습니다. 오직 우월적인 지위를 차지한 사대부 남성들만이 성리학을 깨우친 성인이 되길 꿈꾸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순종만을 강요받던 틈바구니에서 윤지당은 낮에 할 수 없는 공부를 밤에 남몰래 이어갔습니다. 그것이 "감히 아녀자의 분수를 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그만둘 수 없었다"고 그는 말합니다. 평생 그렇게 성리학을 공부한 그가 도달한 결론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가 말합니다. "나는 비록 여자지만 부여받은 본성은 남녀의 차이가 없다." 즉 하늘에서 부여받은 남녀의 본성에는 어떤 차이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노력하면 여자도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 평생 성리학을 공부한 임윤지당의 결론이었습니다.

그가 남긴 글 가운데 「비검명(匕劍銘)」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칼에 새긴 글'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칼은 마음속의 칼날을 의미합니다. 왜 마음속의 칼날이 필요하다고 했을까요? 윤지당은 하늘이 준 남녀의 본성은 똑같고 사람의 본성은 모두 선하지만 모두가 성인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욕심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속의 욕심을 날카로운 칼날로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단호하게 베어버려야 하늘의 뜻을 분별하며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읽어보겠습니다. "찬 서리로다 그 빛이여. / 뜨거운 해로다 그 칼날이여. / 형체 없는 칼이 / 그 날카로움으로 쇠를 끊네. / 칼끝이 가리키는 곳에 / 모든 악이 사라지네. / 너의 위엄 장대하고 / 너의 공로 신기하다. / 도와다오 비검이여. / 나를 여자로 여기지 말고 / 그 날카로움 더욱 힘쓰라. / 숫돌에 새로 간 듯이." 이 글은 욕심을 버리고 천리(天理), 즉 하늘의 바른 이치에 따라 성인이 되고자 한 윤지당의 단호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스스로 여성의 한계를 넘고자 하는 의지와 한 치의 곁길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결단을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은 훨씬 이전에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라디아서 3:28). 성경에 있는 가장 유명한 말 중의 하나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 즉 대헌장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남자나 여자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 했습니다. 임윤지당의 말을 빌리면, 하늘에서 부여받은 본성에는 남녀의 차이가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오늘 설교의 제목이기도 한 '남자나 여자나'는 창세기 1장 27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 구절을 그리스어 성서로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단수형]을 만들었다.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만들었다."

이 구절은 오랫동안 논쟁이 되었습니다. 일부 유대교는 이 구절을 양성구유적(兩性具有的, androgyny)으로 해석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신 본래의 인간은 남성과 여성 양성을 다 가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론(Philon)이라는 유대교 학자는 창세기 1장을 원인(原人)의 창조로, 창세기 2장은 지상의 인간 창조 이야기로 보기도 했습니다. 이 본래의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지상의 인간인 남녀로 분열했다는 것입니다. 성서를 이렇게 해석하면 구원이란 남녀로 분열된 지상의 인간이 원래의 인간으로 복귀한 것, 즉 남녀귀일(男女歸一)이 되고 맙니다. 비슷한 생각이 외경(外經, Apocrypha)인 <이집트 복음서>에 나옵니다. "살로메가 자신이 들은 바를 사람들이 언제 알 수 있게 될 것인지 주께 묻자 주님이 말했다. 너희들이 '수치의 옷'을 발로 밟고 두 사람이 한 사람이 되고 남자와 여자가 남자도 여자도 아닌 것으로 되었을 때다."

바울은 바로 이런 사상을 거부했습니다. 창세기 1장 27절을 놓고 벌어진 이런 식의 해석과 구원론을 거부했습니다. 대신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고 했습니다. 유대인-헬라인, 종-자유인이라는 '사회적 맥락' 안에 남-녀를 넣은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바울은 남자와 여자라는 성을 초월한 개인적 구원 사상을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베푸시는 구원을 사회적으로 재해석한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는 민족적, 사회적 차별이 없다는 맥락 안에 남녀의 차별도 있을 수 없다고 못 박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선포한 기독교 신앙의 대헌장, 즉 마그나 카르타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여성은 잘못 태어난 남성이다. 열등한 여성이 우월한 남성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이 우주의 순리다." 정통 기독교 신학의 기초를 놓았다는 아우구스티누스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성은 자체만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다. 오직 남성만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때문에 여성은 남편과 있을 때만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이라 말할 수 있다." 또 다른 위대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여성은 불완전한 남성"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교부(敎父)는 아예 '예수님이 여성의 형상을 취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여성을 구원하지 않으셨다'는 궤변을 늘어놓기도 했습니다. 불행히도 이런 가르침이 오늘날 여전히 교회 안에 횡횡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을 근거로 여성을 차별하고 여성에 대한 안수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초한 가르침일까요?

창세기 1장 27절로 돌아가 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여기서 '사람'은 히브리어로 '아담'입니다. 그런데 이 아담 앞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아담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입니다. 즉 이 아담은 아담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인류'(the humankind)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인류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인류를]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고 이 구절이 말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5장 2절도 이와 동일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아담]이라 하셨다." 지금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이라는 존재가 그 기원에서부터 복수형으로, 즉 남자와 여자로 지어졌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위계질서나 차별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남성의 지배가 절대적이던 고대시대에 여자를 특정하여 사람이라 명명함으로써, 여자도 인간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엄한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가히 혁명적인 선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말과 달리 성서는 여성이 자체만으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복수형인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최초의 명령이 무엇이었습니까? 유명한 창세기 1장 28절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나님의 '형상,' 즉 히브리어 '첼렘'은 고대세계에서 왕의 조각상을 지시하곤 했습니다. 왕이 직접 통치할 수 없는 먼 지역에 대리자를 보내면서 왕의 권위를 상기시키기 위해 조각상을 세우고 그것을 '첼렘,' 즉 왕의 형상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그 목적은 간단합니다. 그 대리자가 비록 왕은 아니지만 왕을 대신하여 왕의 권위와 통치 그리고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남자와 여자로 이루어진 인류에게 바로 이런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대리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정복하고 다스리는 왕과 같은 역할을 하라고 남자와 여자로 이루어진 인류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정복과 통치는 착취나 남용이 결코 아닙니다. 고대의 왕들이 백성의 안녕과 행복을 책임지고 통치했던 것처럼, 남자와 여자로 이루어진 사람이 하나님의 대리자로 모든 생물의 안녕과 행복을 책임지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창세기 2장의 창조 이야기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언뜻 보면 창세기 2장의 인간 창조 이야기는 1장과 달라 보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먼저 아담을 지으시고 그 다음에 아담의 갈비뼈에서 하와를 지으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두 장 모두 동일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2장에서 먼저 '아담'을 지으신 다음에 그의 '돕는 배필' 혹은 '알맞은 짝'을 지으십니다. 물론 여기서 먼저 지으신 아담 앞에는 모두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즉 '남자'가 아니라 '인류'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아담을 지으시고 그의 '돕는 배필,' 히브리어로 '에제르 크네그도'를 지으셨습니다. '에제르'라는 단어는 특별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돕는 자'라고 선포할 때 여러 번 사용됐습니다(출 18:4 신 33:7, 시 33:20, 시 89:18-19 등), 이 도움은 절대적인 도움, 즉 그 도움 없이는 존재가 완성되지 못하는 도움을 의미합니다. 동사로 쓰일 때는 더욱이 '위험과 죽음으로부터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에제르'를 보조적인 의미로 해석해선 안 됩니다. 여성이 남성의 '에제르'로 창조되었다라는 말은 여성이 남성의 생명을 위한 절대적 도움으로 존재하는 짝, 혹은 배필로 지어졌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알맞다'는 의미의 '크네그도'는 '어깨를 겨룬다'는 어근에서 나왔습니다. 남녀가 서로 대등하고 동등한 짝이라는 말입니다. 상호적인 도움의 관계 안에 있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창세기 2장이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창세기 3장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 내 성차별주의의 뿌리를 모두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소위 '실낙원 이야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창조의 아름다운 순간이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타락하여 고통과 죽음이 시작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 범죄가 여성에서 비롯되었다는 오래된 오해가 전통이 되어 여전히 우리 안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와는 꼬임에 넘어간 첫 번째 사람이며 남성을 속인 책임이 있다. 하와는 자기가 꼬임에 넘어간 사실을 알면서도 남편을 악에 빠뜨렸다." 과연 그는 성경을 제대로 읽었을까요?

성경을 잘 보시면, 먼저 뱀은 여자하고만 이야기하질 않습니다. 선악과나무 위에서 뱀이 상대방을 부를 때 모두 '너희'라는 2인칭 복수형을 사용합니다. (예: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들]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 창 3:1). 그리고 여자의 대답도 '우리'라는 1인칭 복수형입니다. (예: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 창 3:2). 언뜻 보기에는 뱀과 여자의 대화로 보이지만 이 대화에는 남자와 여자 모두가 참여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열매를 따 먹는 장면을 보아도 여자 혼자가 아닙니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쓰인 히브리어 전치사 '임'은 같은 시간과 공간에 실제로 함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록 남편은 한 마디도 하고 있지 않지만 뱀과의 대화 전 과정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소심하게 숨어 있기에 우리는 그동안 이 인류 최초의 범죄의 현장에서 그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잘 읽으면 드디어 오랫동안 은닉되어 있던 한 공범이 드러납니다. 남자는 선악과를 따 먹은 불순종의 죄의 '공범'입니다. 이 죄는 여자 혼자 짓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실낙원의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하여 여성이 스스로 죄의식을 갖게 하고 또 여성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것은 결코 성서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사람의 불순종에 대해 하나님은 심판하셨습니다. 뱀과 여자와 남자에게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 3:1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18)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성에게 주어진 첫 번째 징벌은 생명을 잉태하는 기쁨이 죽음과 같은 고통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남성의 삶에도 역시 고통이 주어졌습니다. 땅을 힘들게 개간하는 노동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본래 복된 노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심판의 결과 노동은 고통으로 변질됩니다.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저주받은 땅은 더 이상 인간을 위한 먹거리를 쉽게 내주지 않습니다. 수고하고 애쓰는 고통이 있어야만 겨우 생명을 이어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창조를 통해 주어진 생명과 노동의 기쁨이 고통으로 바뀌는 것, 바로 그것이 남자와 여자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첫 번째 징벌이었습니다.

그런데 둘째로 주어진 징벌이 여성차별의 근거가 되어왔습니다. 둘째로 여자에게 주어진 또 다른 고통은 남편과의 뒤틀린 관계입니다.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다스리다'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말 성경의 창세기 1장 28절과 3장 16절에는 동일하게 '다스리다'로 번역된 동사가 나오지만, 히브리어 원문에는 전혀 다른 단어로 나옵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남자와 여자에게 주어진 '다스리다'는 동사는 히브리어 '라다'가 쓰였습니다. 하지만 창세기 3:16에서 여성에게 징벌로 주어진 '다스리다'는 동사는 히브리어 '마샬'이 쓰였습니다. '라다'는 돌봄의 청지기 역할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마샬'은 폭력과 통제, 억압이 수반되는 지배를 의미합니다. (계엄령을 뜻하는 "Marshall Law"도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벗어도 서로 부끄러운 줄 몰랐던 친밀함, 서로 하나 되어 기쁨을 누리던 창조의 본래 질서가 이제 인간의 불순종으로 뒤틀리고 변질된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왜 그럴까요? 남편과 아버지의 권위가 절대적이었던 고대 가부장 시대에 여성에 대한 남편의 '마샬,' 즉 억압과 지배의 다스림이 창조의 본래 질서가 아니라 타락에 대한 심판의 결과라고 지금 성경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창세기 3장 16절에 근거하여 남편이 아내를 다스리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창조의 질서라고 주장하지만, 성경은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이 본래 의도하신 아름다운 창조질서가 무너진 결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물론 성경에 나오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대한 모든 구절이 다 해방적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창조와 타락의 이야기는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동반자이며,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현실은 불순종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로 말한다는 점을 오늘은 분명히 인식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창세기 기자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창세기 기자는 인간의 존엄성을 깨뜨리는 모든 폭력과 억압과 차별과 배제가 본래의 창조질서가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아름답게 지으시고 서로 평등하게 돕고 협력하며 살라고 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회복하라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성경적'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을 우리는 잘 지키고 있습니까?

<접시꽃 당신>의 도종환 시인이 <그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라는 수필집을 낸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한 도마뱀 '부부'의 사랑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년에 도쿄 올림픽이 열린다는데 1964년 도쿄 올림픽 때의 이야기입니다. "도쿄 올림픽 때, 스터디움 확장을 위해 지은 지 3년 되는 집을 헐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도마뱀 한 마리가 꼬리에 못이 박힌 채 몸부림치고 있었다. 인부들은 그 도마뱀이 못 박힌 벽에서 3년이나 살아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 공사를 중단하고 사흘 동안 지켜보았다. 곧 그 비밀이 풀렸다. 다른 도마뱀이 어두운 지붕 밑에서 먹이를 물어다주는 것이 아닌가. 어두운 지붕 밑에서 함께 고통을 나누고 사랑했던 두 도마뱀은, 그들의 사랑에 감동한 인부들에 의해, 3년 만에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이 도마뱀 부부 만큼 진정한 사랑의 관계 안에 살고 있습니까? 그렇게 평등하게 서로 돕고 섬기며 사랑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2019.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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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과 선에 쏠려 있는 개신교 전통에서 미(美)는 간과돼"

「기독교사상」 최신호의 '이달의 추천글'에 신사빈 박사(이화여대)의 글이 소개돼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어와 리쾨르를 거쳐 찾아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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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봉사를 개교회 성장 도구로 삼아온 경우 많았다"

이승열 목사가 「기독교사상」 최근호(3월)에 기고한 '사회복지선교와 디아코니아'란 제목의 글에서 대부분의 교단 총회 직영 신학대학교의 교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