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지금, 여기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전도서 3:11-14, 고린도후서 6:1-2, 누가복음 17:2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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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어느 날 사탄들이 모여 회의를 했습니다. 안건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들을 무너뜨릴 것인가'였습니다.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한 젊은 엘리트 사탄이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모두 죽여버립시다.' 늙은 사탄이 점잖게 막았습니다. '순교한다고 그들이 없어지던가? 순교의 피는 신앙을 더욱 자극할 뿐이다.' 다른 사탄이 말했습니다. '그러면 모두 감옥에 가둡시다!' '아니다, 시련을 당하면 믿음이 더 커지는 것을 못 봤단 말이냐?' 드디어 가장 지혜 있는 사탄이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속삭입시다. 열심히 살아라, 열심히 믿어라, 열심히 사랑해라, 그런데 내일부터 해도 늦지 않다. 오늘은 푹 쉬고, 천천히 해라.' 물론 이 안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비극적인 일은 삶을 미룬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내가 크면' 하고 미룹니다. 학생들은 '내가 졸업만 하면' 하고 미룹니다. 청년들은 '내가 결혼만 하면' 하고 미룹니다. 장년들은 '내가 무엇이 되기만 하면' 하고 미룹니다. 하지만 이렇게 다 미룬 이후에는 도대체 무엇이 올까요?

언제부턴가 우리들의 입에 붙어버린 말이 하나 있습니다. '언제 한번'입니다. 이런 인사를 나누신 적이 있으신지요? '언제 한번 저녁이나 함께 합시다.' '언제 한번 차나 한잔 합시다.' '언제 한번 만나요.' '언제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약속들 지켜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사실 '언제 한번'이란 시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늘 저녁' 약속이 있느냐고 물어야 합니다. '이번 주말' 한가한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아니 '지금' 만날 수 있겠는지 물어보아야 합니다. 진심이 담긴 말이라면 우리는 '언제 한번'이라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삶은 미루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에 성실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하나님을 형이상학적으로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혹은 '하나님은 거룩이시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가 아니라 '하나님은 사랑하는 이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였습니다. 그것도 현재 진행형 동사였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은 관찰이나 사변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은 자신의 결단과 더불어 실제로 역사하신다고 믿고 행동한 현실이었습니다. 실재였습니다. 지금 여기의 현존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도 관찰이나 사변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게 오는 것이 아니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말할 수 없다"(누가복음 17: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눈으로 보다'는 것은 객관화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중립적인 입장에서는 볼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오직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만,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나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라 역시 자신의 결단과 더불어 실제로 이뤄진다고 믿고 행동한 현실이었습니다. 실재였습니다. 지금 여기의 현존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온 것처럼 행동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옥에 갇혔을 때의 일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행적에 대한 소식을 듣고 감동하여 그분이 '오실 그이,' 즉 메시아가 아닌가 확인하러 제자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리라.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태 11:4-5, 누가 7:22-23). 질문은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였는데, 답변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권능으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에 주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지금' 보고 '지금' 들을 수 있는 자가 복 있는 자라 하셨습니다. "너희의 눈은 지금 보고 있으니 복이 있으며, 너희의 귀는 지금 듣고 있으니 복이 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보고 싶어하였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지금 듣고 있는 것을 듣고 싶어 하였으나 듣지 못하였다"(마태 13:16-17).

예수님의 가르침의 초점이 이렇듯 '현재'에 있다는 것은 그분의 종말관, 즉 세상의 끝에 관한 가르침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종말관은 무서운 심판이 아니라 용서와 은혜를 더 강조하셨습니다. 이는 세례 요한의 종말관과 비교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예수님도 세례 요한처럼 즉각적인 회개를 요구하셨으나, 그것을 하나님의 진노나 심판 앞에서의 공포나 경고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희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회개는 언제나 잔칫집에의 초대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풍성한 음식이 차려진 파티에 초대되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즐겁습니까?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니 오라"(누가 14:17)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처럼 금욕을 요구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먹고 마시고 사귀는 일을 좋아하셨습니다. 오죽하면 예수님의 적대자들이 그분께 붙인 별명이 '먹보'에, '술꾼'에, '세리와 죄인의 친구'였겠습니까(마태 11:19, 누가 7:34)? 이런 성서의 보도는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잘 맞습니다. 예수님에게 '현재'는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무서워 벌벌 떨며 죄를 참회해야 하는 공포의 시기가 아니라 마치, 성경을 인용하면, "신랑과 함께 있을 때"(마가 2:19, 마태 9:15)처럼 기쁨과 소망의 때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읽은 복음서의 말씀처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아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말할 수도 없다.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누가 17:20b-21, 새번역). 이 구절은 퍽 난해해서 그동안 수많은 해석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고대로부터 루터에 이르기까지 '너희 가운데에 있다'(among you)는 구절은 '너희 안에'(within you), 즉 '너희 마음 가운데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단지 마음의 평화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랬더라면 '안에'라는 그리스어 전치사 "entos"가 아니라 "en"을 사용했을 겁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없다고 하신 다음에 '그러나 보아라!'라고 하심으로써 이중 부정으로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강하게 긍정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극적으로 강조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이렇게 철저하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앞으로가 아니라 지금, 저 멀리서가 아니라 여기 이 땅 위에서 이뤄지는 것임을 강조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신앙의 신비는 그리스도의 영원성을 강조하는 제4복음서, 즉 요한복음의 저자에 의해 밝히 드러납니다. 요한복음 8장에는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의 유명한 논쟁 하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에 크게 논쟁이 붙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 8:32)고 하시자 유대인들이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요한 8:33)고 따졌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기대하며 즐거워하였고, 마침내 보고 기뻐하였다"(요한 8:56, 새번역)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유대 사람들이 기가 막힌 얼굴로 다시 따졌습니다. "당신은 아직 나이가 쉰도 안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요한 8:57). 그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으니라."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I was)'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I am)"고 하셨습니다. 시제가 현재형입니다. 여기 '나는 있다'는 그리스어 원문으로 '에고 에이미'입니다. 이 말은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들은 하나님의 이름인 '에흐예' 즉 '야웨'와 같은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시는 영원입니다. 그분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시작이요 끝입니다.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그 영원은 존재하셨고, 존재하며, 존재하실 분입니다. 히브리서의 말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히 13:8). 그러므로 그분은 저명한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말처럼 '영원한 지금'(The Eternal Now)입니다.

틸리히는 '일시적인 것 가운데 현존하는 영원'을 '영원한 지금'이라 불렀습니다. 그는 원래 이 말을 '성령의 임재'(Spiritual Presence)라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성령에 대한 워낙 많은 오해가 있어 '영원한 지금'이라는 조금 철학적인 개념을 사용했습니다. 성령이 누구십니까? 성령은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성령은 어떤 신비로운 물질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부가 아닙니다. 그분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우리 가운데 임재하셔서 우리를 사로잡으시고 영감을 불어넣으시고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분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매일의 삶의 불경건과 맞서서 숭고함을 향해 나아가게 하시는 분입니다. 아무에게도 관심을 가지지 않은 우리로 하여금 누군가를 거룩한 사랑으로 사랑하게 만드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영원한 하나님입니다. 그분이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는' 분입니다. 그분이 예수께서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요한 14:16) 하겠다고 약속하신 보혜사(保惠師)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구) 찬송가 495장의 가사처럼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합니다. "주의 얼굴 뵙기 전에 멀리 뵈던 하늘나라[가] 내 맘속에 이뤄지니 날로날로 가깝"습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주 예수와 동행하[는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지금 여기'의 삶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삶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 한 때일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아야 합니다. 내일을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이미 오늘을 제대로 살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은 생에 집착하고 삶을 소유로 여기고 있다는 뜻입니다. 만일 우리가 불안과 슬픔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이미 지난 과거의 시간에 아직도 매달려 있다는 증거입니다. 만일 미래를 두려워하며 잠 못 이룬다면 아직 오지도 않은 시간을 가불해 쓰고 있는 말입니다. 과거나 미래에 한눈을 팔면 현재의 삶은 소멸해 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다면 그곳에는 삶과 죽음의 두려움이 발붙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순간들이 쌓여 한 생애를 이룹니다. 그 순간이 영원으로 이어집니다.

오래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드라마 <대장금>을 기억하시는지요. 지금도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감동과 꿈을 주고 있습니다. 드라마 속의 한 장면이 생각납니다. 중종 임금이 의녀 장금을 임금의 주치의로 임명하려 하자 대신들은 물론 내의원에 있는 의관, 의녀들까지 모두 반대합니다. 오직 장금의 스승인 의관 한 사람만 빼고서 말입니다. 임금이 '이렇게 모두가 반대하는데 왜 당신만 찬성하느냐'고 묻자 장금의 스승은 이렇게 답합니다. "장금이는 단순하게 보기 때문입니다." 이 한 마디 안에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장금은 수라간 궁녀로 있을 때는 그저 단순하게 음식을 만들었고, 내의원 의녀로 일할 때 역시 그저 단순하게 아픈 이들을 치료했습니다. 오직 거기에만 집중했습니다. 그 외 다른 어떤 복잡한 사정도 이 단순한 일을 막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장금의 반대편에 서 있던 사람들은 음식이든 의술이든 모두 정치적 권력이나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장금의 삶은 이들과 완전 딴판이었습니다.

이러한 장금의 삶은 현재를 단순하게 살지 못하고 과거나 미래에 얽매어있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장금이처럼 현재를 순일(純一)하게 살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있는 바로 여기, 영원한 지금입니다. 지금 행복해야 합니다. 지금 충만해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 계시는 영원 안에 살아 숨쉬어야 합니다. "너의 일상이 초라해 보인다고 탓하지 말라. 풍요를 불러낼 만한 힘이 없는 너 자신을 탓하라"고 릴케(Rainer Maria Rilke)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주어진 일상(日常)을 살아야 합니다. 매일의 삶을 거룩하고 풍성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맞이하는 하루하루는 '아직 열어보지 않은 선물'과 같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씩 그것을 열어봅니다. 무엇이 담겨 있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에게 8만6천400초의 시간을 주십니다. 선물로 주신 이 통장의 잔고는 쓰지 않으면 이월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루하루, 매순간 매순간, 우리는 이 선물을 어떻게 사용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미래가 좋은 것은 그것이 하루하루씩 다가오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하루하루는 사랑과 기쁨의 선물이 되어야 합니다.

칼 라너(Karl Rahner)라는 신학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일상을 살라고 권고합니다. "일상을 일상으로 두십시오. 신앙의 드높은 생각이나 영원의 지혜로도 일상을 축일로 바꿔놓을 수 없거니와 또 바꿔놓아서도 안 됩니다. 일상은 꿀도 타지 않고 미화하지도 않은 채 견디어 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일상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야 할 그대로 있게 됩니다. 즉 믿음의 터전, 인내의 단련, 호언장담과 거짓된 이상의 건전한 폭로, 그리고 참되이 사랑하고 성실할 수 있는 차분한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담박(澹泊)하고 성실하게 일상을 사십시오. 그 안에 우리가 보통 하나님의 은혜라고 부르는 저 영원한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일상의 작은 것들도 끝이 없는 깊이를 지니고 있습니다. 일상은 영원의 전조(前兆)입니다. 참으로 작은 것은 큰 것의 약속입니다. 우리는 과거와 미래라는 두 개의 영원한 시간이 만나는 현재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시간은 오직 현재일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뿐입니다. 미래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미래라고 하는 것도 다가오고 나면 모두 오늘입니다. 그러므로 내일을 가장 잘 준비하는 것은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인생은 재빨리 미끄러져 지나갑니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에게는 하루하루가 새날"인 것입니다. 오늘이 자기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복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을 강조하셨습니다. 오늘 읽은 교독문처럼, "지금 주린 자"가 복이 있다 하셨습니다. "지금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누가 6장). 반대로 "지금 배부른 자"가 화가 있다 하셨습니다. "지금 웃는 자"도 화가 있다 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를 충분하고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 읽은 구약성서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고 하셨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살게 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그를]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습니다(전도서 3:10-14).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이렇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린도후서 6:1-2).

신앙은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만 믿으면 그분이 모든 것을 다 알아서 처리해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아닙니다. 앞으로 세상의 끝날에 저 먼 곳에서 이루어질 어떤 일에 관한 공상도 아닙니다. 신앙은 문제를 직시하게 하는 힘입니다. 신앙은 두려움 없이 오늘을 살게 하는 용기입니다. 그리고 신앙은 자신감을 가지고 문제와 싸우게 하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나약하고 소심한 현실도피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구름 위에 붕 떠서 헤매는 신앙인들이 아니라, 자신의 두 다리를 땅에 굳건히 딛고 반짝이는 두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따라가는 적극적이고 용감한 신앙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을 사십시오. 현재를 충만하게 하십시오. 지금 행복해야 합니다. 여기서 충만해야 합니다. 지금 여기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 나라,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그 영원을 만끽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해인 님의 시 <여름일기 - 여름>처럼 "우울과 나태로 풀기 없던 나의 일상(日常)을 희망으로 풀먹여 다림질해야겠"습니다. 그의 기도처럼 이 뜨거운 여름은 "잘 익은 수박을 쪼개어 이웃과 나누어 먹는 초록의 기쁨"을 누리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지구 위에도 수박처럼 둥글고 시원한 자유와 평화 가득한 여름이면 좋겠습니다." (20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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