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공의 좌우명 10가지
좌우명(座右銘)이란 늘 가까이 적어 두고, 일상의 경계(警戒)로 삼는 말이나 글을 일컫는다. 보통은 한 두마디 가장 중요시하는 단어를 책상 앞이나 벽에 써두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 기독교사에서 진보적 대표신학자로 손꼽는 장공 김재준목사(1901-1987)에게도 죄우명이 있었는데 10가지였다. 하나, 아는 분은 알지만 아직 널리알려지지 않는 내용이라 여겨지기 때문에 참고로 그의 죄우명 10가지를 다음에 다시 적어본다.
하나, 말을 많이 하지않는다. 둘, 대인관계에서 의리와 약속을 지킨다. 셋, 최저 생활비 이외에는 소유하지 않는다. 넷, 버린 물건, 버려진 인간에게서 쓸모를 찾는다. 다섯, 그리스도의 교훈을 기준으로 '예'와 '아니오'를 똑똑하게 말한다. 그 다음에 생기는 일은 하나님께 맡긴다. 여섯, 평생 학도로서 지낸다. 일곱, 시작한 일은 좀처럼 중단하지 않는다. 여덟, 사건처리에는 건설적 민주적 질서를 밟는다. 아홉, 산하(山河)의 모든 생명을 존중하여 다룬다. 열, 모든 피조물을 사랑으로 배려한다.
아직 자기 사상과 인생관이 완전하게 정립되지 않는 젊은 시절, 흔히 자기를 스스로 경계하고 연단하려는 맘으로 죄우명을 써놓고 지내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런데 장공은 87세나이로 타계하기 직전까지도 그의 서재에 작은 붓글씨로 쓴 좌우명 10가지를 액자에 담아 책상앞에 세워놓고 자기를 늘 스스로 경계하여 깨어있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요즘 한일관계나 남북관계 특히 기독교 교계의 여러가지 상황을 겪으면서 장공의 좌우명 5번째 의미를 다시 곰곰이 음미하게 된다.
왜 사람은 '예와 아니오'를 똑똑하게 말하기 어려운가?
인생을 살아가노라면 어떤 경우에 "예와 아니오"를 똑똑하게 말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우물쭈물 하거나 양비론이나 양시론을 펴면서 본질을 빗겨가거나 한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5:37). 예할 것은 '예,'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똑똑하게 말 하라는 예수님의 교훈이시다. 그것에서 지나는 것은 악에서 혹은 악한자로부터 난 것이라는 경고를 하셨다.
어떤 사태나 사건에 직면하여 결단적 태도 표명을 해야하는데 왜 그것이 어려운가? 몇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첫째는 논쟁이나 사태의 본질과 진의를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이런 경우는 판단보류 하거나 "잘모르겠음"이라고 앙케이트 설문조사에서도 표시하는 기회를 준다. 둘째는 판단하고 예와 아니오를 분명하게 말해야 하지만 본인과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서 우물쭈물하는 경우이다. 경제적 이해관계, 절친한 인간관계, 한쪽 편을 들때 자기의 지도자로서 포용적 입지가 손상을 입을지 염려하는 경우다. 셋째는 노골적으로 돈으로나 출세 등 보장해주겠다는 악한자의 유혹에 탐심이 발동하여 유혹 당해 맘이 흔들리는 경우다. 그런 경우에도 악한자는 충분한 명분과 비밀을 보장해주기 때문에 가장 강한 유혹이다.
가장 큰 이유는 양시론, 양비론, 그리고 결단이후를 염려한다는 유혹
'예와 아니오'를 똑똑하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 몇가지를 위에서 가정해 보았다. 오늘날 교계안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분쟁의 과정에서 파사현정(破邪顯正)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수많은 맘 착한 신도들의 맘을 아프게 하고, 사회여론의 지탄을 받는 이유가 무엇일가? 특히 노회 그리고 총회 재판국 담당자들이 진실과 정의로운 판단을 몰라서가 아니라, 이해관계로 진실과 사실을 왜곡하고 눈감는다면 하나님의 심판과 역사의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므로 그런 경우라면 사실은 고려 할 가치도 없다.
'예와 아니오'를 똑똑하게 말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거나 판단을 그르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두가지 경우이다. 첫째는 서로 자기 입장을 주장하는 다투는 두 집단 혹은 두 진영이 부분적으로는 보면 옳은 점도 있고 부분적으로 양편 모두 틀린점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소위 양시론과 양비론이다. 이런 경우 지도자 입장에 있거나 재판국 등 판단책임이 있는 경우 두루뭉실하게 ''화해하라'는 원론적 권고만을 하고 파사현정, 진실판단에 실패하게 된다.
가장 어려운 둘째이유는 '예와 아니오'를 분명하게 말한 후에 벌어질 잠정적 혼란과 공동체의 분렬이 염려스러워서 '예, 아니오'를 똑바르게 말하지 못하고 만다. 어느정도 공동체를 아끼고 사랑하는 지도자라면 당연히 염려되는 점일 것이다. 그런데, 이 글 서두에서 소개한 장공의 좌우명 5번째를 자세하게 보면 "그리스도의 교훈을 기준으로 '예'와 '아니오'를 똑똑하게 말한다. 그 다음에 생기는 일은 하나님께 맡긴다"였다. 문장의 앞부분과 뒷부분에 주목해야 한다.
요즘 국가적으로는 한일관계와 남북관계에서, 교계에서는 대형교회의 교단재판국 판결과정에서, 우리는 같은 문제와 유혹에 봉착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훈을 기준으로' 하고 '결단후 벌어질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예와 아니오를 분명하게 하는 책임적 결단이 중요한 것이다. 필자는 회상한다. 그리고 지금 후회하고 회개한다. 1960년 이후 거의 60년동안 결단을 요청하는 위기의 국면에서 필자가 경험한 가장 큰 유혹을 회상한다.
1965년 한일관계 정상화를 명분으로 36년 식민통치 책임에 사죄받음도 없이 헐값으로 면죄부를 주는 권력집단에 대하여 영락교회에서 모였던 '한일굴욕외교 반대운동', 1970년대초 한국 근대화 완성을 성취해야한다는 군부집단의 삼선개헌안에 결사항쟁한 민주화 운동, 대학 학사일정을 정보부가 완전 지배하는 폭력에 대한 대학자율화 쟁취운동, 1980년대 민주화와 인간화를 희생하더라도 멸공반공 보루를 탄탄히 해야한다는 반공 멸공 절대주의에 대안으로서 남북 화해 평화협력 운동 등에서 한국 기독교는 '예와 아니오'를 똑똑하게 말해야 할 때에 늘 실패한 역사였다. 오늘날은 어떠한가?
※ 숨밭 김경재 박사의 에세이 '옹달샘과 초점'을 연재합니다. '옹달샘과 초점'은 물처럼 순수한 종교적 영성과 불처럼 예리한 선지자적 비판과 성찰이 씨줄과 날줄로 엮어진 신학자 김경재의 신앙 에세이 글입니다.- 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