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생명적 이어라!"
1920년대 한국교회사에서 작지만 조용한 신앙혁명의 운동이 일어났었는데 지금 대한기독교복음교단의 발족이 그것이다. 최태용 목사를 중심으로 한 이들 신앙동지들은 세 가지 모토를 표방하고 신앙의 새 물결 운동에 온 생명을 바쳤다. 흔히 복음교단의 '3대 모토'라 일컫는 표어 3가지는 다음 같다: 첫째, 신앙은 복음적이고 생명적 이어라! 둘째, 신학은 충분히 학문적 이어라! 셋째, 교회는 조선인 자신의 교회이어라.
위 세 가지 3대 표어 배경은 오늘의 우리모습을 성찰하는데 도움이 된다. "신앙은 복음적이고 생명적"이라야 한다는 결의는 당시 정통주의신학 교리와 교권주의에 노예가 되어 생명력을 잃어버린 채 박제화 된 교회 모습을 뼈아프게 반성한 것이다. "신학은 충분히 학문적"이라야 한다는 결의는 반지성적이고 맹신적인 당시 열광주의적 광신주의에 빠진 신도들의 신앙행태와 당시 목사의 자질이 학문적으로 너무 저질의 수준임을 통탄한 것이다. 셋째 모토는 당시교회가 서양선교사들의 수중에 들어가 있고, 선교사들이 덜 성숙한 조선교회의 영원한 후견인처럼 행세함으로써 조선교인의 주체성 상실과 신앙적 사대주의에 반성과 저항이다.
대한기독교복음교단은 흔히 순복음 교단이라 칭하는 기독교하나님의 성회와 혼동되곤 하는데, 원인은 두 교단이 모두 복음을 강조하고 성령운동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100년 가까운 역사가 흐르는 동안 두 교단의 모습은 확연히 달라져 보인다. 무엇이 다른가? 최태용 목사가 이끌었던 복음교단은 교세 면에서 조용기 목사가 이끌었던 순복음교단과 비교가 안될 만큼 교회 숫자도 교인 총수도 작다. 작은 것이 자랑은 아니지만 큰 것이 자랑도 아니다. 교회의 교회됨은 양에 있지 않고 질에 있기 때문이다.
최태용 목사의 복음교단은 탈도 많고 말도 많은 소위 '한기총'에 가입하지 않은 교단인데 반하여 조용기 목사의 순복음 교단은 '한기총' 역사의 중심에 늘 있었고 오늘의 '한기총'에 공헌과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최태용의 복음교단은 교단역사 100년 사이에 비록 작은 교단이지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정회원 교단으로서 인권과 민주화와 평화통일운동에서 골리앗 앞에 선 소년 다윗 모습으로 용감하게 맞서 많은 성직자와 교인이 감옥을 가고 고난을 받았다. 조용기 목사의 순복음 교단은 양적으로 큰 성장을 이루었고 한국교회 양적 성장을 견인해 갔지만 인권 민주화 평화통일에 앞장선 일 때문에 고난 받거나 감옥 갔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도리어 교회에 돈이 너무 많아서 세상 재판정에서 불법탈법 죄로 목사가 판결을 받았다는 낯 뜨거운 소리를 듣는다.
동굴에 갇힌 기독교는 동굴밖 세상 모른다
앞에서 필자는 뜬금없이 대한복음교단의 3대 신앙 표어 이야기를 하면서 '복음교단'이라면 교인들마저도 흔히 혼동하는 최태용의 대한복음교단과 조용기의 순복음교단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잠깐 언급했다. "신앙은 복음적이고 생명적이어라!"고 하는 제1표어에서 '복음적'이라는 어휘는 아주 중요한 어휘이지만 너무 오염되고 온갖 사이비 기독교목사와 부흥사들이 마치 전매특허처럼 사유화하기 때문에 그 어휘를 생략하고 "신앙은 생명적이어라!"라고 하면 시시비비를 가리는데, 복음적 신앙의 진짜와 가짜를 가리는데, 도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민낯으로 계급장 떼고 말해보자. 오늘날 한국 개신교 총 숫자는 진짜와 가짜, 사이비 신앙과 순복음 신앙, 정통신앙과 비정통 신앙 모두를 합쳐도 약 900만명 미만이다. 남한 국민 총수의 20% 미만이란 말인데, 국민 열사람 모이면 2사람은 필히 기독교인 이지만 8사람은 종교가 없든지 다른 종교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국사회에서 제일 큰소리 치고, 대한민국이 기독교제국이나 된 듯이 착각하고, 중세시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 듯이 교만하고, 자기 과대망상증에 빠지고, 돈키호테 같은 언행을 남발함으로써 생각하는 국민들의 비웃음과 조롱을 받는 목사들이 너무나 많다. 결과적으로 기독교 선교의 길을 가로막고, 예수 얼굴에 먹칠하고, 신앙 선배들의 사랑과 헌신의 땀으로 얼룩진 복음의 배낭 속에 구린내 나는 지폐뭉치와 권력에 아부하는 정치선전 전단지만 가득히 들어있는 꼴이다.
오늘날 한기총 총회장이라는 사람의 허장성세 기고만장 교만심이 상식의 도를 넘고, 배가 불룩한 여름날 왕 두꺼비나 토끼 한 마리 통채로 삼켜 배가 불룩한 채 늙은 감나무에 오르는 구렁이모양 요지부동이다.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 재판을 보고나서 지적한 '악의 평범성' 증상이 그들의 산앙 집단에서 드러나며 스스로 생각하는 힘은 없어 보인다. 습관에 젖은 기계적 <아멘 할레루야>가 남발 된다. 신성한 태극기가 당파적으로 오남용 된다. 그 목사와 그 목사의 집회에 모인 기독교인이라는 신도들에게 감히 묻는다.
"그대들의 신앙이 정말 생명적인가? 생명을 살리고 치유하기 위해서 고난 받은 '그리스도의 상흔'이 있는가? 동굴에 갇혀 평생을 노예로 산 사람들 모양으로 정말 동굴 밖 세상을 모르는가? 제발 종교집단의 왕초가 되어 중세기 신성로마제국의 분봉왕이나 된 것처럼 웃기지도 않는 착각에 빠진 배우 역을 중단하고 복음 전도자의 정 위치로 돌아가시라. 지금은 21세기요 동굴 밖의 세상은 넓고 할 일도 많기 때문이다!"
초경을 경험하여 두렵고 놀래지만 위생적 생리대 살돈이 없어 눈물 흘리는 가난한 지구촌 소녀들의 한숨과 슬픔이 "예수 믿고 부자 되어 축복받고 천국보장 받았다"는 한국 교회를 깨진 유리병처럼 아프게 하나님께 고발한다. "신앙은 생명적 이어라!". 지당한 표어이다. 다시 말하면 "생명적이 아니면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결단코 신앙일 수 없다!!"
※ 숨밭 김경재 박사의 에세이 '옹달샘과 초점'을 연재합니다. '옹달샘과 초점'은 물처럼 순수한 종교적 영성과 불처럼 예리한 선지자적 비판과 성찰이 씨줄과 날줄로 엮어진 신학자 김경재의 신앙 에세이 글입니다.- 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