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사야 43:1-3a, 요한1서 4:16-19, 누가복음 9:3-4 -
미국의 철학자이자 시인이며 수필가인 헨리 데이비스 소로(Henry David Thoreau)는 노예해방운동에 헌신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노예차별법에 항의하는 뜻으로 세금불납운동을 전개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때 그의 친구이자 유명한 사상가이며 시인인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이 그를 방문하여 둘은 철장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에머슨이 위로의 뜻으로, '자네, 지금 그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라고 농담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소로가 불쑥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런 자네는 지금 밖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 이 말에 에머슨은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에머슨은 자신이 자유인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철장 안에 갇힌 소로에게 '그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소로는 에머슨이 철장 '밖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되물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지금 누가 갇혀 있습니까? 소로는 몸은 갇혀 있어도 정신은 자유로웠습니다. 아무도 그의 양심의 자유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철장 밖의 에머슨은 몸은 자유로웠는지 몰라도 편견과 차별의 제도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지금 누가 감옥 안에 갇혀 있습니까?
우리는 스스로 자유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유를 꿈꿉니다. 하지만 혹 편견과 아집과 탐욕과 죄악의 노예로 살아가는 죄수들은 아닐까요? 거리를 활보하지만 마음은 '철장 없는 감옥'에 갇힌 죄수는 아닐까요? 성경에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갈라디아서 5:13a)고 했으나, 우리는 그 자유로 육신의 탐욕을 도모하며 삽니다. 또한, 성경에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라"(베드로전서 2:16a)고 했으나, 우리는 그 자유로 우리의 악을 꼭꼭 숨기는 데 씁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정말로 '진리 안에서 자유로운'(요한 8:32) 그리스도인들입니까?
우리 몸은 신비하게도 날마다 새롭게 바뀐다고 합니다. 매분마다 우리 몸에서는 약 30억 개의 세포가 죽고 새 세포가 태어납니다. 예를 들어 우리 위의 안벽 세포는 닷새마다 완전히 새로 바뀝니다. 우리의 간은 두 달마다, 우리의 피부는 6주마다 완전히 새것으로 대체됩니다. 우리 몸 전 세포 속에 있는 핵의 98%는 일 년에 한 번씩 완전히 새로 바뀝니다. 우리 몸은 이렇게 자신을 늘 갱신하는데, 우리의 생각은 좀처럼 변화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좀처럼 성장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 "위로부터 난 지혜는... 편견과 거짓이 없다"(야고보 3:17)고 했으나, 우리가 말하는 지혜는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습니다(골로새서 2:23). '어머니가 나를 밴 순간부터 지니고 있는 죄성'(시편 51:5, 현대인의 성경)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내 몸은 어제의 그것이 아닌데, 내 생각은 10년 전, 20년 전과 동일합니다. 스스로 만든 편견과 아집과 탐욕의 노예가 되어 거기에 갇혀 삽니다. 그래서 20세기의 천재라는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나 봅니다. "상식이란 우리가 18세가 되기까지 얻은 편견들의 집합에 불과하다"(Common sense is only the collection of prejudices acquired by age 18.)
"사랑하는 자녀에게 자주 여행을 시켜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녀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자신이 만든 편견의 감옥에서 나와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신앙의 여행, 영혼의 여행을 떠나야 합니다. 여행은 자신의 영토와 경계 밖으로 나가보는 행위입니다. 낯선 곳에서 나그네가 되어보는 경험입니다.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을 읽어보셨는지요?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경직되고 편협한 공직 생활의 권태 속에 시달리다가 약 20개월의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그는 아무도 모르게 이탈리아 비밀 여행을 계획했고, 익명의 여행자로 완벽한 자유를 만끽하고 돌아온 후 수많은 걸작을 탄생시켰습니다. 그의 책 『이탈리아 기행』은 이런 괴테의 자아 성찰과 재탄생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책입니다. 1786년 11월 1일에 그가 기록한 일기를 읽어보겠습니다. "부분적으로밖에 몰랐던 전체를 두 눈으로 보게 되니 새로운 생명이 솟아나는 듯하다. 나를 내부로부터 개조하여 다시 태어나게 하는 작용이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여행을 떠나야 합니다. 신앙의 여행을 떠나야 합니다. 신앙은 하나의 긴 여행입니다. 회심은 단 한 번 일어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과정입니다. 정통 기독교신학의 기초를 놓은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집 정원에서 인생이 뒤바뀌는 회심의 순간을 경험했지만, 그의 신앙은 거기서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분투해야 했습니다. 계속해서 죄와 싸워야 했습니다. 세례를 받은 이후에도 그는 여전히 연약하고 실패하는 인간이었습니다. 신앙에 복종을 서약한 이후에도 그는 자신의 오래된 습관과 계속 씨름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그 과정을 기록한 책이 바로 『고백록』(Confessions)입니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인류의 지성사에서 인간 내면으로의 여행을 다룬 가장 첫 번째의 책이기도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당신을 향해서 저희를 만들어놓으셨으므로,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저희 마음이 안달[조급]합니다." 창조자가 우리를 지으실 때 창조자를 향하도록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에 그분 안에서 쉬기까지 우리는 만족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거룩한 불만족'(divine discontent)이라고 합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불만족이 있습니다. 음식이 만족스럽지 못할 때가 있고, 어떤 일의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불만족은 이런 불만족이 아닙니다. 거룩한 불만족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향해서 계속해서 성장하고 움직이고 변화하여 하나님에 이르기까지 안식하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쉬기까지 쉬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영원한 도성'에 이르기까지 안주하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본향으로 가는 중인, 여전히 순례자인 우리는 아직 안식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길 위에 있어 본향에 이르지 못했으며, 이를 향해 나아갈 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마음이 오직 하나님으로만 온전히 채워질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날마다 스스로를 속이고 헛된 것을 찾습니다. 내 안의 공허감을 감추기 위해 쇼핑을 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맛난 음식을 먹거나, 일에 몰두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언제나 우리 안에 있는 근원적인 갈망을 피해 도망갑니다. 하지만 이런 숨바꼭질로는 우리 내면에 자리한 근원적인 갈망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갈망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갈망,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 한 분만이 온전히 채울 수 있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말씀처럼, 실로 "이 땅 위에서 우리가 차지할 영원한 도성은 없"습니다(히브리서 13:14). 그러므로 우리는 너무 쉽게, 너무 빨리 안주하려 해서는 안 딥니다. 너무 쉽게, 너무 빨리 만족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평생 '거룩한 불만족' 안에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한 여정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의 순례를 다 마칠 즈음인 인생의 늦은 나이에 매우 중요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고백록』의 한 구절입니다. "또 보십시오, 당신께서는 안에 계셨고 저는 밖에 있었는데, 저는 거기서 당신을 찾고 있었고, 당신께서는 저와 함께 계셨건만, 저는 당신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평생을 '밖에' 갇혀 살았습니다. 평생을 하나님을 찾아 여행하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사실 하나님이 평생 그를 찾아 헤매고 계셨음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아담처럼 하나님을 피해 숨으려 했음을 깨달았습니다. 고집스레 우리를 찾아 헤매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당신이 계시던 자리를 스스로 떠나 우리에게 오셨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성육신하신 하나님께서 기꺼이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하나님은 평생 나를 찾고 계셨고 나와 함께 계셨건만 우리는 이 하나님을 피해 숨기 바빴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내가 내 마음의 빗장을 열 때, 그분은 그 틈으로 한걸음에 성큼 들어와 우리 안에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주십니다. 그렇게 되면 갑자기 설명할 수 없는 눈물이 터져 내 영혼이 새로 태어납니다.
요즘 많이 여행하시는데, 최근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어떤 분('멀리곰 부부')의 글을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산티아고는 성야고보라는 뜻이지요. 세배대의 아들, 요한의 형, 12사도 중 최초의 순교자 말입니다. 이번 여름, 그분이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메세타라 불리는 지역을 걸을 때의 일입니다. 스페인의 여름 햇살은 매우 강합니다. 그래서 건조한 고원지대인 메세타를 지나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이곳은 그림자가 없어 마땅히 쉴 곳도 없습니다. 그리고 지루한 길이라 많은 순례자들이 버스를 타고 이곳을 지나칩니다. 그런데 그곳을 홀로 걷는 순례자를 만난 것입니다. 그는 항암치료를 받다 휴직하고 순례에 오른 사람이었습니다. 앞만 보고 살아오다 죽음을 마주한 뒤에 이곳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어릴 적에 아버지를 여의고 모든 선택을 스스로 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세상에 기댈 곳이 하나 없다는 것을 일찍이 알아 늘 혼자 고민하고 결정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의 삶은 평생 외로웠습니다. 어느 날 순례자의 숙소인 '알베르게'에 머물 때 십자가 목걸이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다음 날 다시 메세타 길을 걷는데 수 킬로미터를 걷는 동안 순례자 한 명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문득 마음이 더욱 외로워져 자신의 삶을 더욱 연민하는데 갑자기 그 십자가 목걸이가 눈에 띄었습니다. 자신은 아버지를 여의고 나서 평생 혼자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지난 그 모든 순간에 함께한 분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 그는 어른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아이처럼 울었다고 합니다. 펑펑 소리를 내어 울었다고 합니다. 신기하게도 울고 나니 더 이상 외롭지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이제 남은 길은 감사함으로 걷겠다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이번 여름, 휴가를 갈 시간이 없어 휴가를 다녀온 분들의 책을 읽는 것으로 휴가를 대신했습니다. 그중 건축가 승효상 씨가 쓴 『묵상』(默想, 돌베개, 2019)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이 책은 작년 여름, 로마에서 파리까지의 수도원 기행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제가 아는 우리 학교 건축과 교수님도 함께 하셨고, 매우 가까운 친구 목사 한 명도 동행했더군요. 부러웠습니다. 앞으로 여행은 이렇게 한 가지 분명한 주제를 가지고 생각을 나눌 수 있는 분들과 함께 떠나야 하겠다 생각했습니다.
저자는 여행이 '현장'으로 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왜 현장으로 가야합니까? 우리가 일상의 삶을 살다 보면 알게 모르게 환상이 축적되는데 그것은 거짓이기 쉬워 힘이 없습니다. 하지만 "힘은 진실로부터 나오며 진실은 늘 현장에 있다"고 저자는 확신합니다. 그래서 그가 찾은 신앙의 현장이 수도원이었습니다. 진리를 찾고자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추방하여 극한 현장에서 기도와 노동과 찬양의 삶을 산 이들의 공간 말입니다. 그가 방문한 수도원들은 대부분 험준한 지형의 '세상 끝'에 위치했습니다. 왜 거기로 나아갔을까요? 세상은 불화로 가득하여 그 속에서는 평화를 구할 수 없어, 수도사들은 모든 것이 정지된 '세상 끝'으로 나아가 하나님을 만나 평화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거기서 그들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에게 완전히 굴복하여, 그분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얻어지는 평화를 누렸습니다. 이 평화가 참된 평화입니다. 참된 안식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진정한 자유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수도원 전통 중에서 <베네딕토 규칙서>라는 유명한 규칙서가 있습니다. 여기서 제시하는 삶의 기준은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청빈이고, 둘째는 동정이며, 셋째는 순종입니다. 셋 다 자유의 결과입니다. '청빈'은 물질에 대한 집착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동정'은 육신의 욕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순종'은 번뇌와 무지 그리고 편견으로부터의 정신적 자유입니다. 수도사들은 이 자유가 진정한 평화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 자유와 평화를 얻기 위해 그들은 이 땅에서 '거룩한 불만족'을 가지고 날마다 영혼의 여행을 떠나며 살았던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순례자입니다.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성경의 말씀처럼, 우리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시편 39:12)입니다. 실로 우리는 이 땅에서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베드로전서 2:11)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향을 찾는 자," 즉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히브리서 11:14, 16)하는 나그네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례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 쉬기까지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 안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불러 자주 여행을 보내셨습니다. 오늘 읽은 복음서의 말씀처럼, 예수님은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머물다가 거기서 떠나라"(누가복음 9:2-3)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신앙의 여정을 떠나십시오. 회심은 단 한 번에 끝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신앙은 평생 이루어지는 성장과 성숙과 변화의 과정입니다. 자기 자신이 만든 편견과 이기심의 감옥에서 나와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나아가십시오. 이미 이룩한 업적이나 획득한 소유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 쉬기까지 우리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읽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문처럼, "마침내 당신께서 새로운 피조물로 나를 변화시키시기까지" 우리는 우리의 여정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시편의 말씀처럼, "주님께서 주시는 힘을 얻고,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시편 84:5, 공동번역).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하지요. 내가 가는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불안하십니까? 두려우십니까? 차라리 하나님을 피해 숨는 게 낫겠다 싶으십니까?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다시 인용합니다.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면 하나님께로 가게 될 것입니다. 다른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마십시오. 그분이 몸소 길이 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언제든 길을 잃고 넘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께 하나님을 향해 가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향해 오셨으며 몸소 길이 되셨고 그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일어나십시오. 이 길을 걸어가십시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장막이나 성전에 정주(定住)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나그네들과 함께 움직이는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의 저 넓은 은총의 세계로 나아가십시오. 길손들을 축복하시는 순례자의 하나님께서 오늘 모교 대학교회의 예배에 함께 하신 이대 남가주동창회 순례자들과 또 대학교회 모든 교우들의 인생길에 항상 동행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2019.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