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이천식천(以天食天)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창세기 1:27-31, 에베소서 2:14-18, 요한복음 6: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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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선생님, 식사는 하셨어요?" 이 한 마디에 지난 33년 동안이나 화성 연쇄살인 행각을 숨겨온 범인이 자신의 범죄를 자백했다고 합니다. 프로파일러, 즉 범죄심리분석관은 피의자들과 상호 신뢰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식사는 하셨어요"라고 묻는다고 합니다. 매우 평범한 말 한마디이지만 '밥 먹었느냐'는 말은 사람의 마음을 열어주는 이상한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영화화한 <살인의 추억>에서도 배우 송강호 씨는 이렇게 말했었지요. "너, 밥은 먹고 다니냐?" 한국인에게 밥은 이렇게 매우 중요한 어떤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성서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밥상을 차려주시는 분입니다. 그것도 푸짐한 잔칫상을 차려주시는 분입니다. 늘 가족의 밥상을 차려야 하는 대부분의 주부들은 압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이 무엇인지를. 그 답은 '남이 차려준 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밥상을 차려주신다고 합니다. 유명한 시편 23편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물가에서 놀게 하시고 또 풀밭에서 뒹굴게도 하시는데, 황송하게도 내 앞에 푸짐한 잔칫상을 차려주십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밥]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편 23:1-2, 5).

성서에서는 밥상이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평생 밥상 차리느라 수고한 여성들 중에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만약 하늘나라에서도 밥을 차려야 한다면 거기 가고 싶지 않다고. 그런데 기쁜 소식은 예수님도 하나님의 나라를 묘사하시면서 거기에 이미 커다란 잔칫상이 준비되어 있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동과 서에서 와서,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마태 8:11, 새번역).

성서에는 뚜렷한 '공동식사'의 전통이 나타납니다. 성서에서 공동식사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시는 강력한 수단입니다. 구약성서, 특히 출애굽 이야기에 등장하는 공동식사는 모두 '제바흐'(zebhah)와 관련이 있습니다. 제바흐는 '제사' 혹은 '화목제'(和睦祭)로 번역됩니다. 화목제는 희생제물 전체를 불에 태워 하나님께 드리는 '올라'(olah), 즉 번제(燔祭)와 달리 동물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간주된 지방 부분만 태워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 부분은 가족이나 확대가족이 참여하는 공동식사를 통해 소비하는 것입니다. 이 화목제의 목적은 친교입니다. 하나님과의 친교뿐만 아니라 공동식사에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의 친교입니다. 모세가 바로 왕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라'고 요구했을 때, 그의 요구는 정확히 이스라엘이 광야로 가서 하나님 앞에서 이 제바흐를 드리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출 5:3). 압제자 앞에서의 모멸적인 식사가 아니라 비록 허름한 식사라도 하나님 앞에서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함께 먹고 마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출애굽이었습니다.

이런 공동식사의 전통이 신약성서로 이어집니다. 신약에서도 공동의 식사는 하나님의 새 생명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강력한 수단입니다. 2천 년 전 유대사회는 정결법(貞潔法, purity code)에 기초한 사회였습니다. '깨끗한 자 대(對) 더러운 자,' '거룩한 자 대(對) 속된 자,' '의인 대(對) 악인'의 철저한 이분법적 구분에 기초한 사회였습니다. 이 법은 수많은 사람을 '죄인'으로 낙인찍었습니다. 당시 이른바 죄인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일주일에 하루 정도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되는 안식일(Sabbath)을 거룩하게 지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굶주린 자녀들을 먹이기 위해서 안식일에 구걸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됐습니다. 그것은 곧 유대 정결법에 의해서 '죄인'으로 낙인찍히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소위 이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보란 듯이 이들과 식탁 친교를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당시 철저히 금기시되던 행동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함께 먹고 마시면 안 된다고 여겨진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그를 가리켜 '먹보,' '술꾼,' 그리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큰 잔치'에 비유하시면서 소위 죄인이라 불린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큰길과 울타리 가로 나가서," 즉 사회의 경계선 밖에 나가서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하나님의 집을 가득채우라 하셨습니다(누가 14:16-24).

놀라운 사실은 성서처럼 한국의 역사에서도 강력한 공동식사 전통이 이어져왔다는 사실입니다. 한국인들의 삶은 무엇보다 한국인들에게 가장 일상적인 음식인 쌀/밥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쌀/밥은 한국인들의 삶에 필수적인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벼는 다른 곡물보다 단위 면적 당 많은 생산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국은 벼농사에 적합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지리적으로 한반도는 벼농사의 북방한계선에 위치해 있습니다. 때문에 벼를 수확할 때까지 매우 각별한 관심과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여야만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쌀을 뜻하는 한자 '미'(米)는 여덟 팔(八)자 두 개와 열 십(十)자 하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팔십팔'(八十八)이라는 숫자가 나옵니다. 즉 쌀은 좋은 수확을 거두기 위해서는 88번이나 되는 큰 노력과 관심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품이 많이 들어가는 한국의 벼농사를 가리켜 서구에서는 "한국의 농사는 원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중국 사람들은 꼼꼼하고 주의 깊게 일하는 사람을 가리켜 "조선사람 벼농사하듯 일한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한국인들에게 가장 큰 소망은 풍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흉년은 곧 배고픔이었고, 가난이었으며, 노비가 되는 길이었고,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국 민중에게 쌀/밥은 곧 생명이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의 농민들은 벼농사를 위한 독특한 노동공동체인 '두레 공동체'를 만들게 됩니다. '두레'라는 단어는 벼농사를 하는 '들'(논)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입니다. 다양한 두레 공동체들이 특히 한국의 중부와 남부지방 대부분의 농촌 마을에 존재했고 지금도 몇몇 지역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두레 안에서 한국의 농부들은 함께 일하고 생활했습니다. 이 두레 공동체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공동식사입니다.

농번기 동안 공동체는 함께 식사를 나누었는데, 하루 다섯 차례나 공동식사를 했습니다. 밥은 한솥밥을 나누어 먹었으며, 반찬을 담는 그릇들 역시 공동으로 사용했습니다. 이 공동식사는 고된 노동을 축제의 분위기 속에서 수행할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또한 공동체를 한 식구로 묶어주었습니다. '식구'라는 말은 먹을 식(食)에 입 구(口) 자로 이루어져있는데, '먹는 입'이라는 뜻입니다. 한국인들은 '가족'(家族)이라는 말보다 식구라는 말에 더욱 친근감을 느낍니다. 가족은 '같은 집안에 속한 사람'이지만, 식구는 '함께 밥을 먹는 사람' 또는 '한솥밥을 먹는 사람'을 뜻합니다. 유교의 강한 지배를 받았지만, 한국의 백성들은 피로 맺어진 관계보다 밥으로 맺어진 관계를 더욱 소중히 여긴 것입니다. 이런 한국인들의 공동식사는 평등주의적인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함께 둥글게 둘러앉아 밥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양반들은 대개 네모난 상을 받아 '혼자' 먹었습니다. 그들의 사회적 신분은 결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밥상 한 귀퉁이도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두레 공동체가 동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얼마 전 한 방송사에서 <녹두꽃>이라는 드라마를 방영하기도 했지요.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역사 속에서 농민군과 토벌대로 갈라져 싸워야했던 이복형제의 파란만장한 휴먼 스토리를 그린 사극 드라마였습니다. 이 동학의 중심적 가르침은 인내천(人乃天), 즉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사상입니다. 모든 인간이 고귀하고 평등하다는 인간존중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 사상은 시천주(侍天主), 양천주(養天主), 그리고 체천주(體天主)로 발전되었습니다.

먼저 시천주란 천주, 즉 하늘을 몸 안에 모시는 것[侍]을 말합니다. 한국인들은 쌀/밥을 먹음으로써 하늘을 자기 안에 모십니다. 쌀은 하늘이 만들고, 하늘은 쌀 안에 거합니다. 그러므로 하늘과 같이 존귀한 존재인 사람이 밥을 먹는 행위는 바로 하늘(한울)이 하늘(한울)을 먹는 행위, 즉 이천식천(以天食天)이 됩니다. 두 번째로 양천주란, 내 몸 안에 받아들인 하늘을 가만두지 않고 양육하는 것[養]을 말합니다. 하늘을 몸 안에 가두지 않고 기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쌀을 독점하지 않고 이웃과 나누는 것으로 가능합니다. 일본 식민지하에서 동학의 영향을 받은 농민들은 매 식사 때마다 각 사람 당 한 숟가락의 쌀을 모으는 '좀도리운동'을 벌였는데, 이것이 훗날 3.1운동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체천주란, 하늘을 체화시키는 것[體], 즉 하늘나라를 이 땅에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늘과 같이 존엄한 사람이 하늘을 먹을 때 사람은 하늘을 자기 안에 모시고 또 양육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 땅에 하늘나라를 만드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그렇게 한국인들의 공동식사 전통은 시천주-양천주-체천주를 하는 일이었습니다. 즉 하늘의 뜻을 받고, 하늘의 뜻을 키우며, 하늘의 뜻을 실천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한국인들의 공동식사 전통을 가장 명료한 한국어로 형상화한 이는 김지하 시인입니다. 그는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밥은 하늘입니다. /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 밥은 하늘입니다. /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 /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 하늘을 몸 속에 모시는 것 / 밥은 하늘입니다. / 아아 밥은 / 모두 서로 나눠 먹는 것."

놀랍게도, 한국인들의 이 공동식사 전통이 오늘 우리가 나눌 '주의 식사' 혹 성찬(聖餐)의 의미가 무엇인지 밝혀줍니다. 앞서 하나님은 밥상을 차려주시는 분임을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큰 잔칫상이 차려진 곳임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성서를 보면 드디어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을 밥상 위에 제물(祭物)로 올려놓으십니다. 먹는다는 것은 생명이 생명을 취하는 일인데,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우리의 생명을 위해 밥상 위에 내어주십니다. 그러면서 그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며, 그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잘 아는 구절입니다.

"그들이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말씀하셨다. '받아서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또 잔을 들어서 감사 기도를 드리신 다음에, 그들에게 주시고 말씀하셨다. '모두 돌려가며 이 잔을 마셔라. 이것은 죄를 사하여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마태 26:26-28, 새번역)

드디어 인간의 일상인 먹는 행위가 거룩함의 극치에 이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엄한 존재인 우리가 거룩한 하늘을 몸 안에 받아들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주님은 우리의 밥상에 자기 자신을 올려놓으시고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와 한 몸이 되려 하십니다. 그럼으로써 내 안에 주가, 주 안에 내가 있게 하십니다. 주님은 이 신비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본문에서 '떡' 혹은 '빵'이라고 된 말을 한국인들의 정서에 맞게 '밥'으로 바꾸어 읽어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밥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밥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밥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나는 생명의 밥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밥이니 사람이 이 밥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밥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요한 6:32-33, 35, 51)

주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밥'입니다. 이 밥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주님]의 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찬을 받을 때 우리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밥'을 감사함으로 받아야 하겠습니다. 내 안에 하늘을 모셔 들여야 하겠습니다. 내 안에서 그 하늘의 거룩한 뜻을 키우며 그 뜻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오늘 우리는 성서의 공동식사 전통과 한국의 공동식사 전통이 만나는 경험을 해야 하겠습니다. 두 전통이 합류(合流)하여 하나의 강을 이루어 하나님의 풍성하고 충만한 생명의 바다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교우 여러분, 한국 개신교회는 '성만찬이 없는 교회'라는 부끄러운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 년에 서너 번 이루어지는 성만찬을 교인들은 지루한 예식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주님의 살과 피를 받을 때 그것을 단지 교회의 의례적인 예식 행위로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구약성서의 화목제로부터 신약성서의 하나님 나라로 이어지는 거룩한 공동식사의 전통 안에서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최후의 만찬'도 유월절 공동식사의 자리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님의 식사'인 성찬은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시고 또한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시려 자신을 희생한 하나님의 은총의 사건입니다. 오늘 읽은 신약서신의 말씀처럼,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입니다. 그 분은...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는 분입니다. 즉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분입니다(에베소서 2:14-16, 새번역). '자기 몸'으로 모든 담을 허무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갈라져 있는 것, 원수 된 것을 하나로 만드신다 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며 주님은 온 몸이 찢기고 부서지는 고통을 감내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말이 아니라 온 몸으로 자신을 부수어 우리의 영생과 우리의 일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오늘은 '세계성찬주일'입니다. 개신교회와 정교회 그리고 가톨릭교회 등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가 한 분이신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날입니다. 또한 오늘은 교회만이 아니라 민족과 인종과 성별과 빈부와 종교로 갈리어 서로 다투는 전 인류도 하나님 안에서 하나임을 선포하는 날입니다. 나아가 남과 북, 그것도 모자라 동과 서, 그리고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싸우는 이 민족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날입니다. 오늘, 세상의 생명을 위한 '하나님의 밥'을 내 안에 모시면서 내가 하늘이 되고 세상이 하나가 되는 신앙의 신비를 모두 경험하실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019.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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