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세기 11:1-9, 로마서 12:4-8, 마가복음 13:1-2 -
11월입니다. 한 해의 끝에서 두 번째 달, 어떤 의미의 시간일까요? 나태주 시인은 <11월>을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 버리기에는 차마 아까운 시간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돌아갈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11월, 어찌해야 할까요. 시인은 말합니다. "낮이 조금 더 짧아졌습니다 / 더욱 그대를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시인 나태주의 별명은 '나 좀 태워주세요'입니다. "운전조차 할 줄 몰라 언제나 버스만 타고 다[니는]" 시인은 "젊어서부터 분필과 함께 몽당연필과 함께 산, 시골 초등학교 선생"입니다. "시에 대한 꿈 하나만으로 염소와 노을과 풀꽃만 욕심내온 남자"라고 부인(김성혜)은 소개합니다(이정록 시인, <너무 고마워요> 중에서). 초등학교 선생을 43년이나 한 시인은 어느 날 예쁘지 않고 사랑스럽지 않은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예쁘고 사랑스럽게 볼까 생각하다 다음과 같은 시를 썼습니다. 제목은 <풀꽃 1>입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
어려운 표현 하나 없는, 단 세 줄짜리의 시는 많은 이들에게 깊고 잔잔한 울림을 선사합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고, 광화문 대형서점 글판에도 오른 이 짧은 시는 외롭고 상처받은 이들을 따뜻하게 보듬어줍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라는 말은 "자세히 안 보면 안 예쁘다는 말"이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말 안 듣고 까칠한 아이들이 있었는데, 방법이 없으니 자세히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스쳐보면 안 사랑스러운데, 오래 보면 사랑스럽다"라는 걸 시인은 깨달았습니다.
스쳐보면, 멀찍이 거리를 두고 보면 아름다운 것들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보러 갔을 때의 일입니다. 나일 강 서쪽 기자(Giza) 지구에는 세 개의 큰 피라미드가 있는데, 그중 가장 큰, 즉 스핑크스 앞에 있는 대(大)피라미드는 밑변의 평균 길이가 약 230미터, 높이가 약 150미터나 됩니다. 1개당 평균 2.5톤의 돌 230만 개가 사용됐습니다. 멀리서 보며, 저는 그 위용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굉장한 건물을 지었느냐"고 이집트 안내인에게 물었습니다. "10만 명이 30년을 지었다"고 했습니다. 궁금해서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당시 여기 인구는 얼마였습니까?" 안내인은 '10만'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10만 명이 사는데 10만 명이 모두 거대한 왕의 무덤을 짓느라 동원되었다는 겁니다. 왕족을 뺀 모두가 강제노역의 고통에 시달렸던 겁니다. '자세히 보니' 비로소 제 귀에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았다"(출 3:7)는 여호와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聖殿)에 가셨다가 그곳을 떠나가실 때의 일입니다.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선생님, 이것 좀 보십시오. 굉장하지 않습니까? 이런 돌 어디서 보신 적 있으세요? 대단하지요? 갈릴리 촌구석에만 살다가 이렇게 귀한 구경도 하게 되니 선생님 덕분에 자랑거리가 하나 더 늘었습니다. 하하하.'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막 13:2).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대는 이 거대한 건물을 유지하기 위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는가? 그 돌 하나하나 마련하기 위해 누구의 어떤 희생이 요구되었는지 생각해본 적 있는가? 그 희생 위에 군림하고 있는 사람들은 또 어떤 사람들인지 그대는 아는가 말이다!' 겉모습에 현혹당한 세대들이 결국 어떤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인지 주님은 아셨습니다. 가난한 과부를 등쳐가면서 유지되고 있던 성전의 위선과 그것을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얼빠진 세대에 대한 예수님의 한탄이셨습니다. 대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을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막 14:58).
창세기 11장에는 유명한 '바벨탑 사건' 이야기가 나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이야기를 원래 하나였던 인류의 언어가 어떻게 지금처럼 다양하게 분화되었는지 그 기원을 설명하는 이야기로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바벨탑 이후 '언어의 혼란'을 부정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즉 질서에서 혼란으로, 그리고 통일에서 분열로 가는, 부정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대신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이 바벨탑 사건에서 분열된 인간의 언어가 신비한 황홀경의 경험 속에서 다시 하나로 통합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저는 이 전통적인 해석에 이의(異議)를 달려 합니다. 두 사건은 서로 상반되는 사건이 아니라, 둘 다 동일한 메시지를 주고 있는 사건이라는 주장입니다. 즉 바벨탑 사건은 하나였던 언어를 다양하게 해체해 다양성을 긍정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요, 오순절 사건은 그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여서 서로 소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둘 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겁니다.
바벨탑 사건의 시작은 창세기 11장 2절입니다. "사람들이 동쪽으로 이동하여 오다가 시날 땅 한 들판에 이르러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구체적인 것이라곤 '시날'(Shinar)이라는 평야 이름뿐입니다. 시날은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오늘의 이라크 지역에 해당합니다. 거기에 어떤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한 일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도시'를 세우고, 둘째 그 안에 '탑'을 쌓고, 셋째 (이를 통해 자기들이)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누군지가 해석의 열쇠입니다.
바로 앞 창세기 10장에는 노아의 아들들의 족보가 나옵니다. 노아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셈과 함과 야벳입니다. 먼저 셋째 아들인 야벳의 자손에게서 "바닷가 백성들이 지역과 언어와 종족과 부족을 따라 저마다 갈라져 나갔다"고 했습니다. 둘째 아들인 함의 자손에게서는 "구스와 이집트와 리비아와 가나안" 족속이 갈라져 나갔습니다. 그리고 첫째인 셈의 자손은 "에벨의 모든 자손의 조상"이 되었다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둘째인 함의 자손들과 관련하여 시날 평야 이야기가 나옵니다. 창세기 10:8-10절입니다. "[함의 자손인] 구스는 또 니므롯을 낳았다. 니므롯은 세상에 처음 나타난 장사이다. 그는 주께서 보시기에도, 힘이 센 사냥꾼이었다.... 그가 다스린 나라의 처음 중심지는, 시날 지방 안에 있는 바빌론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이다."
니므롯(Nimrod)은 '장사'(mighty warrior)이며 '힘이 센 사냥꾼'(mighty warrior of beasts)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둘은 같은 말입니다. 히브리어로 장사는 '기보르'(gibbor)이고, 힘이 센 사냥꾼은 '기보르 사이드'(gibbor sayid)입니다. 힘이 센 장사는 인간을 지배하고 힘이 센 사냥꾼은 동물을 지배합니다. 즉 니므롯은 인간과 짐승 모두를 지배하는 자입니다. 다름 아니라 바빌론 제국의 창시자를 가리킵니다.
바벨탑은 바로 이 제국이 건설한 도시 안에 있는 '지구라트'(Ziggurat)였습니다. 지구라트란 구운 벽돌로 높이 쌓아 올린 피라미드 구조의 층계식 건물을 가리키는데, 높이가 무려 91.5미터에 달했습니다.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2층 건물도 없던 그 옛날, 약 100미터의 높은 탑이 대지에 우뚝 서 있는 모습을! 바빌론의 제왕은 그 꼭대기에 신전(神殿)이나 제단을 짓고 그들의 신을 예배했습니다. 그리고 거대한 건물을 통해 제국의 위용을 자랑했습니다. 사실 이 탑은 첨단기술을 결정체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돌 대신 벽돌을 쓰고 흙 대신 역정을 썼다"고 했습니다. 큰 돌이 아니라 진흙을 구워 만든 작은 벽돌들은 마치 레고 블록처럼 다양하고 유연한 모양의 건축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 벽돌의 틈을 진흙, 즉 회반죽 대신에 역청(瀝靑), 즉 아스팔트로 메꿨다 했는데, 이렇게 하면 건물은 놀랄 만큼 견고해지고 수 천 년을 지탱할 수 있습니다. 바빌론 건축에서 벽돌과 역청은 오늘로 따지면 5G나 AI와 같은 최첨단 과학기술이었습니다. 사실 인간은 언제나 신기술로 문명을 이루고 번영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성경의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바벨탑 이야기의 화자(話者)는 높이가 100미터에 이르는 이 높은 탑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려고 '내려오셨다'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창 11:5). 창세기 기자(記者)는 이걸 한 번 더 강조합니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창 11:7).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바빌론 사람들은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지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보려고 내려오셔야 하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창세기의 저자는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포로로 끌고 온 바빌론 제국이 쇠퇴하여 폐허가 된 지구라트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던 대제국의 허망했던 꿈을 비웃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쌓은 그 높다는 탑을 보기 위해 우리 하나님은 한참이나 내려오셔야 하셨어!'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내려오시는'(going down) 경우는 일반적으로 심판하실 때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할 줄 알았던 한 제국의 하늘을 찌르던 오만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국에 대한 이 징벌과 심판은 곧 이스라엘과 같은 다양한 약소민족들에게는 구원과 해방을 의미했습니다.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 자기들의 이름을 날리고, 하나로 뭉쳐서 땅 위에 흩어지지 않으려던 '제국의 계획'(imperial project)을 해체하신 하나님의 심판은 각 민족과 인종과 지역과 문화와 언어와 관습의 '다양성'을 긍정하시고 보존하시려는 하나님 구원의 일부입니다.
시날 평지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높은 탑을 쌓은 이유는 자기들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기 위함이었습니다(창 11:4). 그들은 '흩어짐'을 원치 않았고 대신 자기들만의 안전한 동질성 안에 머물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 창조 의도와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고 하셨습니다. 홍수 이후에는 노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중에서 번성하라"(창 9:7) 하셨습니다. 창세기에서 '흩어져 나감'(창 10:18)은 하나님의 명령이자 축복입니다. 바벨탑 사건은 바로 이것을 거스르는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됨이 아니었습니다. 바빌론 제국의 하나됨은 두려움에 기초한 하나됨이었습니다. 강제를 특징으로 하는 하나됨이었습니다. 억압적인 획일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던 것입니다(창 11:7-9). 창세기 저자는 여호와께서 이렇게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으로 그 이름을 '바벨'(babel)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창 11:9). 지금 저자는 '언어의 유희,' 즉 말장난(word-play)을 통해 바빌론 제국의 허황된 일치의 꿈을 비웃고 있는 중입니다. 히브리어로 혼란 혹은 혼잡을 뜻하는 말은 '발랄'인데 바빌론이 쌓은 탑을 '바벨'이라 부르면서 비슷한 발음을 가지고 그들이 추구한 일치가 사실은 혼란이고 무질서였음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서는 획일성(uniformity)이 아니라 다양성(diversity)을 긍정합니다. 그리고 그 다양성 속의 일치(unity in diversity)를 가르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다고 말합니다(롬 12:6-8). 또 오늘 교독문에서 읽은 것처럼,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또 이렇게 말합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라"(고전 12:4-6). 백 사람이 있으면 백 사람의 성격과 특색이 다 다르지요. 하나님의 은사도 마찬가지로 다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은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지 않습니다. 예언하는 은사, 섬기는 은사, 가르치는 은사, 위로하는 은사, 구제하는 은사 등 정말 다양합니다. 그런데 혹 이렇게 은사가 다양하기 때문에 다툼이나 충돌이 일어나지는 않을까요? 바울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사는 다양하지만 각양의 은사를 주신 분은 같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주님도 같고, 또 하나님도 같기에 다양성 안에서 하나가 되는 신비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박노해 시인의 시 <다 다르다>을 읽어보겠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되살려 지방어를 섞어 쓴 시가 매우 재미있습니다.
"초등학교 일학년 산수 시간에 선생님은 키가 작아 앞자리에 앉은 나를 꼭 찝어 물으셨다 일 더하기 일은 몇이냐? / 일 더하기 일은 하나지라! 나도 모르게 대답이 튀어나왔다 / 뭣이여? 일 더하기 일이 둘이지 하나여? 선생의 고성에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예, 제가요, 아까 학교 옴시롱 본깨요 토란 이파리에 물방울이 또르르르 굴러서요 하나의 물방울이 되던디라, 나가 봤당깨요 / 선생님요, 일 더하기 일은요 셋이지라 우리 누나가 시집가서 집에 왔는디라 딸을 나서 누님네가 셋이 되었는디요 / 아이들이 깔깔깔 웃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으로 손바닥에 불이 나게 맞았다 / 수업시간이 끝나자마자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내 손바닥을 어루만졌다 어쩌까이, 많이 아프제이, 선생님이 진짜 웃긴다이 일 더하기 일이 왜 둘뿐이라는 거제? 일곱인디, 우리 개가 새끼를 다섯 마리 낳았응께 나가 분명히 봐부렀는디 쇠죽 끓이면서 장작 한 개 두 개 넣어봐 재가 돼서 없어징께 영도 되는 거제 / 그날 이후, 나는 산수가 딱 싫어졌다 / 모든 아이들과 사람들이 한줄 숫자로 세워져 글로벌 카스트의 바코드가 이마에 새겨지는 시대에 나는 단호히 돌아서서 말하리라 / 삶은 숫자가 아니라고 행복은 다 다르다고 사람은 다 달라서 존엄하다고."
그렇습니다. 우리는 똑같기 때문에 존엄한 것이 아니라 "다 달라서" 존엄합니다. 다양성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흩어짐은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입니다. 명령입니다.
'풀꽃시인'이라 불리는 나태주 시인보다 먼저 풀꽃의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노래한 원조시인은 다름 아닌 우리 예수님입니다. 어느 날 무리를 가르치시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6). 공중의 새를 '보라' 하셨습니다. 우리 눈에 공중의 새가 안 보입니까? 공중의 새는 흔한 것입니다. 너무 흔해서 눈여겨보지 않던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일부러 '보라'고 하십니다. 자세히 보라는 말씀입니다. 눈여겨보라는 말씀입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 말씀입니다. 새장 속의 새를 보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일상 속 어디에나 있는 모습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렇게 우리 삶 속에 가득 차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받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쁜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고 하신 주님은 이어서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고 하셨습니다.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으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고 하셨습니다(마 6:26-30). 여기에 '백합화'로 번역된 말은 들에 가면 지천으로 아무 데나 피어 있는 들꽃 전체를 말합니다. 들판의 다양한 모든 꽃들을 말합니다. 주님은 그 들꽃들이 어떻게 피었는가 '생각하여 보라'고 하셨습니다. 생각하여 보라는 말은 오래 보라는 말입니다. 들꽃들 역시 흔한 것들입니다. 흔해서 눈여겨보지 않던 것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그 들판의 '잡초'들 속에 꽉 차 있습니다. 그것은 오래 보아야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에 이미 가득 찬 은혜는 '받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습니]다." 오래 보면 하찮아 보이는 들꽃들이 솔로몬이 입었던 그 화려한 형형색색의 황금옷보다 더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렇게 풀꽃의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노래한 예수님이야말로 '원조 풀꽃시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 나태주 시인은 이 시의 맨 끝 구절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너도 그렇다." 사실 풀꽃은 없는 꽃입니다. 들에 피는 꽃들이 다 풀꽃이기 때문입니다. 하찮고, 가꾸지 않고, 버려진 들꽃도 자세히 보면 예쁜데, 정작 시인이 말하고 싶었던 말은 "너도 그렇다"였습니다. '당신은 더 예쁘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말했습니다. "풀꽃과 달리 당신은 세수도 하고, 화장도 하고, 가꾸지 않습니까." 그래서 "너도 그렇다"고 말합니다. '당신도 그렇게 예쁘고 사랑스럽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구절에서 왠지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다양한 우리 각자를 긍정하시고 인정하시고 품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이 마음은 시인의 다른 시, <내가 너를>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너를 / 얼마나 좋아하는지 / 너는 몰라도 된다 // 너를 좋아하는 마음은 / 오로지 나의 것이요 / 나의 그리움은 / 나 혼자만의 것으로도 / 차고 넘치니까 // 나는 이제 / 너 없이도 너를 좋아할 수 있다."
사랑이 깊어지면, 사랑이 넘치면 상대가 몰라줘도 상처받지 않고, 심지어 상대가 없어져도 사랑할 수 있는가 봅니다. 사랑의 극치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나에 대한 사랑이 이와 같지 않을까요. 내가 몰라줘도, 심지어 내가 없어져도 나를 좋아하시는 마음, 나를 그리워하시는 마음, 나를 사랑하시는 마음이 하나님 안에 차고 넘칩니다. 나를 자세히 보아주시는 사랑, 나를 오래 보아주시는 사랑, 그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은 아닐까요. 그런 사랑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랑인지 시인은 다시 다른 시, <사랑에 답함>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예쁘지 않은 것을 예쁘게 보아주는 것이 사랑이다 / 좋지 않은 것을 좋게 생각해주는 것이 사랑이다 / 싫은 것도 잘 참아주면서 처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 나중까지 아주 나중까지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오늘 아침 거울 앞에 선 저의 모습은 예쁘지 않았습니다. 오늘 아침 다시 눈을 떴을 때 저의 마음은 어제의 상처와 아픔으로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나를 잘 참아주시는 게 하나님의 사랑인가 봅니다. 의롭지 못한 나를 의롭다 하신 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형편없는 나를 귀하게 여겨 주시는 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처음만 잠시 그러하신 것이 아니라 끝까지, 변함없이 그렇게 나를 의롭다 하시고 귀히 여겨 주시는 게 하나님의 사랑임을, 이 가을 나태주 시인의 시를 읽다가 깨달았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나를 멀리서 스쳐보는 분이 아니십니다. 가까이서, '내 숨결보다 나에게 더 가까이서,' 그리고 오래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눈에는 내가, 그리고 이 땅의 모든 다양한 존재하는 것들이, 즉 풀꽃과 같은 이름 없는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예쁘고 사랑스럽습니다. 자세히 보시기 때문입니다. 오래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살아갈 용기를 얻습니다. 그 용기를 시인은 <풀꽃 3>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시는 언제나 짧고 굵직합니다. "기죽지 말고 살아봐 / 꽃 피워봐 / 참 좋아."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큰 건물들을 보고 계십니까?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함에 도취되어 있으십니까? 천년만년 움쩍도 하지 않을 견고한 건물들이 진정 우리의 희망이고 기쁨입니까? 그 견고한 성채 뒤꼍에서 눈물 흘리고 한숨짓는 사람들이 이야기가 들립니까? 보입니까? 주님은 오늘 아침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사랑을 보아야 합니다. 자세히 보아야 합니다. 오래 보아야 합니다. 백이면 백 모두 다른 하나하나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긍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신 것처럼 우리도 내 주위의 모든 존재를 있는 하나하나 긍정하고 사랑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디킨슨은 말했습니다. "만약에 내가 한 사람의 가슴앓이를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은 아니리 / 만약에 내가 누군가의 아픔을 쓰다듬어 줄 수 있다면 혹은 고통 하나를 가라앉힐 수 있다면 혹은 기진맥진 지친 울새 한 마리를 제 둥지로 돌아가게 할 수 있다면 / 나 지금 헛되이 사는 것은 아니리"(에밀리 디킨슨, <만약에 내가>). "내가 한 때 이 곳에서 살았으므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 그것이 바로 당신의 진정한 인생의 성공"입니다(뢀프 왈도 에머슨, <인생의 성공>).
자세히 보아야 예쁩니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습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너도 그렇습니다. 11월입니다.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 버리기엔 차마 아까운 시간입니다... 낮이 조금 더 짧아졌습니다 / 더욱 그대를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2019.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