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와 가치추구보다 앞서는 살아있음 그 자체로서 신비
가을걷이도 끝나고 들판과 산야는 한결 여유롭고 조용하다. 산사(山寺)는 더 그럴 것인데 도심에 사는 분주한 사람들만 계절의 변화축복에 둔감하다. 컬럼 기고자가 좀 더 젊었을 땐 노자 도덕경에서 상선약수(上善若水),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화광동진(和光同塵)같은 말들을 좋아했는데 요즘은 복귀어박(復歸於樸)이 좋다. 그 의미는 본래 생명의 본모습인 소박한 상태, 질박한 상태로 되돌아 간다는 뜻이다. 꽃피고 열매맺고 난 후엔 그것들을 다 떨구고 과수원 나무들은 나목(裸木)으로 서 있다.
확실히 기독교는 의미 있거나 가치 있는 것, 이전 것보다 더 새롭고 발전한 것을 추구해가는 역사 지향적 종교로서 특징이 강하다. 자연 그 자체의 반복적 순환보다는 목적 지향적 삶을 강조한다. 궁극적으론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한다. 그러한 기독교 특징은 귀중한 특징이지만 잘못하면 평범한 것, 반복되는 일상적인 것, 쓸모가 없다고 판단되는 사소한 것들에 대하여 그런 것들의 존재권리를 박탈, 억압, 무시, 폄훼하는 경향성이 강하다. 그 결과 내일이 아닌 오늘, 결과가 아닌 과정, 의미나 가치를 묻기 전에 있음 그 자체의 신비에 대하여 눈먼 신도들이 되기 쉽다.
뇌성마비의 자녀를 양육하는 40대 엄마의 휠체어를 북한산 둘레길 평지에서 종종 만난다. 등산객들과 연인들이 쌍쌍으로 주말의 산보를 즐기다가 함께 모여드는 쉼터, 몇 개 설치된 벤치에서 자주 본다. 뇌성마비 아이는 중학생 정도 나이로 보인다. 뇌성마비 환자의 일반적 특징대로 얼굴과 손발은 일그러지고 침을 흘리고 뭔가 엄마에게 혹은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말 한마디를 건네려고 온몸 근육을 뒤틀리면서 고투한다. 벤치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은 일부러 시선을 피하면서 속으로 생각한다. 불쌍하기는 하지만 저 엄마와 가족들의 엄청난 희생을 생각하면, 사회적으로나 본인 그 자체도 별로 행복하지 못한 그 생명이 차라리 일찍 끝나는 것이 더 좋겠다고 맘속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입장을 달리하여 그 엄마나 가족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서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엄마와 가족들의 시간을 빼앗아 가고, 가정 경제를 어렵게 하고, 평생 짐이 될줄 알면서도 "제발 죽지 말고 오래 오래 우리 가족으로서 살아만 다오!. 경제적 사회적 실용 인간으로서 가치나 의미가 있건 없건 그런건 문제 되지 않는다. 네 있음이 신비요 있어줌이 우리에게 감사와 행복이다!".
뇌성마비 아이를 모든 자기 일생을 내걸고 돌보고 사랑하는 것은 부모이기 때문일까? 세상을 눈뜨고 보면 혈육적 아무 관련 없지만 사소한 것, 쓸모가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과 생명체들과 그저 존재하는 것들에게 '거룩한 낭비'를 하고 가는 사람들이 많다. 굳이 개화기와 6.25 전쟁을 계기로 소록도 한센병 환자나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평생을 한국에 와서 봉사한 벽안의 수녀들과 의료선교사들을 예로 들 필요가 없다. 오늘 우리시대 버려진 유기견들을 지나치지 못하고 거두어 기르고 폐지를 주워 판 돈으로 수십 마리 버려진 강아지들을 기르는 80세 할머니도 있다.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 비유를 다시 생각해야(마 6:25-34)
많이 듣고 자주 설교본문으로 선택되곤 했던 '공중에 나는 새와 들이 백합화 비유'(마6:25-34)를 다시 진지하게 되새김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한다. 그동안 피상적 본문이해의 원인을 3가지로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는 심거나 거두는 수고도 없고 저장비축 염려걱정 없어도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유유자적하게 의식주문제를 염려하지 말라는 '세상사 초연태도' 가르침이라는 오해(마6:26-31). 둘째, 예수님은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내일 일도 여전히 염려하는 주체가 '내일'이 아니고 '나, 혹은 우리'라고 생각하는 '인간주체성의 오만함'을 지속하는 잘못된 태도(34절). 셋째,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여전히 기독교가 가치 있고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의미와 가치 사고체계'에 다시 갇혀버리는 위험(마6:33).
창조세계와 자연현실을 정직하고 진지하게 들여다보면 위의 3가지 오해는 잘못된 것이다. 첫째,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가 가혹한 자연환경과 인간의 자연파괴에 대응하면서 자신의 생명적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 얼마나 애쓰고 노력하고 인내하는지 우리가 생각했던가? 다만 불필요한 '염려'를 앞서서 하지 않을 뿐이고 그들도 인간들의 생존투쟁보다 더 가혹한 시련을 이기면서 살아간다. 둘째, 인간은 시간의 주인이 아니다. 내일의 주인도 아니다. 하루하루 주어지는 시간을, 더 엄격하게 말하면 순간순간 선물로서 주어지는 시간을 받아서 향유할 수 있을 뿐이다. 셋째,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말한 것이지 기독교라는 종교, 문화, 교회, 신학이 규정한 '기독교적 이념의 나라와 편 가르는 정의'가 결코 아니다.
한국기독교는 언제부터인가 거창한 것, 특별하고 비범한 것, 큰 것등 '거대담론'에 빠져버려서 일상과 사소한 것 속에 임하는 하나님의 은총과 신비와 사랑과 긍휼을 잃어 버렸다. 한 톨의 먹이를 주워 먹는 비둘기 날개의 그 아름답고 신비한 문양과 빛나는 윤기 나는 색상을 보거나, 요즘 부쩍 늘어난 반려견 작은 강아지들의 용모와 털 무늬와 눈동자와 예민한 후각기능을 보면 기적이 따로 없다.
눈뜨고 보면 우리주위가 온통 기적이다. '갈릴리 복음'을 우리들에게 들려주신 예수님은 우주를 품에 껴안는 '하나님의 큰 정치'를 이끄신 '거대담론'의 주창자이시지만, 동시에 지극히 일상적인 것, 평범한 것, 사소한 것, 버려진 것 속에 임하는 하나님의 은총과 임재를 보라고 가르치신 '극소담론'의 주창자이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네 속에, 그리고 너희 가운데, 너희 사이에 있다"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구체적 지구행성의 '생명현실' 안에서 하나님, 하늘, 땅, 그리고 사람과 만물이 만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