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음(Forgetting)은 슬픔과 충격이지만 축복이기도 한 것
초겨울은 유한성을 느끼고 자각하는 인간 우리들에게 "이제는 모든 것을 잊고 , 잊는 법을 배우라!"고 재촉한다. 요즘은 한 가정에 중증이거나 경증 이거나 자주 잊고 망각하는 치매환자 혹은 초기 치매상태의 부모나 배우자를 갖지 않는 가정이 별로 없을 만큼 많아져서 기억상실 곧 잊음(Forgetting)이 주는 아픔, 고통, 충격, 슬픔을 겪지 않는 가정이 별로없을 지경이다. 60-70살 까지만해도 그렇게 총명하고 능력있고 사리분별이 또렷하던 아빠나 엄마가 마치 딴 사람처럼 기억상실로 무너져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식구들은 비참함을 절감한다.
인간이 기억하던 일들을 잊는 다는 현상은 의학적으로 단순하게 말하면 뇌기능의 자연쇠퇴, 손상, 심신적 충격으로 인해서 발생한다고 본다. 늙어가면 두개골도 작아지고 쪼그라들면서 뇌용량도 줄어들고 따라서 꼭 필요불가결한 기억해야할 사항이 아니면 기억저장을 뇌 스스로 걸러서 기억하려들지 않는다. 그런 경우는 늙어가면서 망각증상이 점점 심해지거나 평범한 일들도 기억하지 못하는 현상은 어찌보면 자연스런 자연의 이치요 순리다.
잊는다는 인간의 정신 심리적 현실을 다른 측면에서 보면 감사해야 할 현상이기도 하다. 왜그러한가? 가령 예들면, 지난날 한 때 큰 죄를 범한 일로 양심이 고통스럽던 일, 분노 때문에 몸이 떨릴만큼 증오심의 해일 앞에 감정이 휘몰아치던 일, 교회나 직장 안에서 다른사람이 준 언어의 폭력 때문에 쓰리던 감정, 등등이 잊혀지지 않고 계속 생생하게 기억된다면 우리가 정상적 일상생활인들 영위할 수 있을 건인가? 그러므로 잊는다는 정신 심리적 현상은 아픔과 감사라고 하는 양면의 얼굴을 갖는다.
잊혀짐(Being forgotten)은 존재 완전상실이요 존재하는 것의 완전 무화(無化)
그러나, 잊혀진다는(Being forgotten) 것은 사람이 혹은 사람이상의 타자가 나를 더 이상 기억해주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잊음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인간의 상당부분 중요한 일들은 자기가 잊혀지고 말 유한한 존재라는 현실에 저항하는 실존적 몸부림이다. 마을에 공적비를 세우고, 기념관을 세우고, 저술직품을 남기고 , 심지어 엄청큰 성당 건물을 짓는 성직자들도, 겉으론 하나님의 영광 위해서 이지만, 자신들의 업적으로서 후세인들에게 잊혀지지 않으려는 무의식적 몸부림일 수 있다.
좀 더 세밀하게 숙고해보면, 소박한 서민들 특히 먹고살기 위해서 생존투쟁을 하는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을려는 욕구는 사치스럽고 한가로운 이야기 이다. 살기가 너무 힘들면 그 고통을 견디기 어려워 가족동반 자살을 선택 하는 경우도 본다. 그러므로 타자에게 잊혀지는 두려움을 강하게 느끼는 부류는 유명한 사람들, 부자와 권력자들, 명예를 중시하는 유명한 연예인들이나 종교지도자들과 지식인들에게 더 강하게 욕구되는 현상이다.
그런데 문제는 현대인들이 점점 더 무신론적이고 현세적 인간이 되어갈수록, 죽음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듯이 남에게 잊혀진다는 사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어간다는 문명사적 특징이 나타나고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어차피 "한번 살고 가면 그만인데 뭘 염려하거나 관심할 필요 있는가?"라는 담대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한발 더 나아가서 한번 살고 간 나의 발자취나 나에 관한 기억이 완전히 도리어 사람들에게서 깨끗이 잊혀지고 지워지기를 바라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는 현실이다.
왜 '생명책'(Book of life)을 말하고 하나님의 기억을 갈망하는가?
성경은 잊음과 잊혀짐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대표적 생각이 시편 90편 앞부분에 잘 나타나 있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눈앞에서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나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시90:3-6).
이스라엘 신앙인들은 인간이 잊혀지고 말 존재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드렸다. 사람들이나 공동체나 역사나 국가가 자기 이름을 잊지 않고 오래 오래 기억해주는 일에 관심두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 혹은 그것들도 잠간 존재하다가 사라져 버릴 한갓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깊이 깨닫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신앙인들은 영존하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민족이나 의인을 잊어버리고 기억해주시지 않는 일에 대하여 두려워했다. 한 여름날의 풀꽃 같은 연약한 피조물인 인간도 하나님이 기억해 주신다면 결코 무화(無化) 되지 않는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여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49:14-15). 누가복음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려가듯이 천대받고 멸시받는 민초들을 항하여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 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참새보다 귀하니라"(눅12:5-7)고 예수께서 말씀했다고 전한다.
근본이 바로서면 살길이 생긴다(本立而道生)
참으로 성경은 이상하고 신비스런 경전이다. 한편으론 인간과 인생을 들풀과 같고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약4:14) 같은 존재라고 인간의 유한성과 그 덧없음을 고백하면서도, 영존하시는 하나님이 그 덧없는 들풀 같은 존재를 기억하신다는 신앙과,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한 인간은 어떤 새로운 형태일지라도 새 생명을 선물로서 지속 받는다는 신앙을 주장한다. 그리고 '역사적 공동체 생명현실' 과정과 그 안에서 살아있다고 믿는다.
특히 진실 되고 의롭게 살려고 최선을 다해 살다가 억울하게 죽임당한 영혼들을 모른체 하신다거나, 쭉정이와 알곡을 엄정하게 구별하지 않으시고 함께 불태워버리시는 정의롭지 못한 하나님은 아니시다는 신앙을 굳게 갖고 살았다(시69:28,빌4:3,계20:12). 기독교신앙은 오직 한가지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긍휼하심과 공의로우심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위에 서 있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위기는 그 근본적 믿음을 부인하고 우롱하듯이 행동하는 교역자, 신학자, 신도들이 아주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근본이 살아나야 살길이 생긴다"(本立而道生).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삶은 교리적으로 기독교신관을 부정하는 관념적 일이 아니고, 현실생활 속에서 무신론적이고 지극히 세속적 자기 야욕을 채워가면서 현실적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정의로우심을 우롱하는 생활인 것이다. 광화문 광장에서 지극히 세속적 정치비판을 하면서 대낮에 대놓고 '헌금'을 강요하는 파렴치한 '양두구육(羊頭狗肉)의 탈선행위(脫線行爲)' 속에서 그 사례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