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타고 가던 한 힌두교도가 큰 폭포 쪽으로 그 배를 밀어내는 물살을 거스르기 위해 오랜 시간 싸웠다. 그 위대한 투사는 모든 노력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자, 노를 걸쳐 놓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 내 인생이 이 노래처럼 되게 하자.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책 <토다 라바>에 나오는 구절이다. 물살과 더불어 싸웠지만 물살을 이길 수 없음이 분명해질 때 그는 노를 걸쳐 놓고 노래를 부른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기에 그는 홀가분하게 죽음 앞에 선다. 죽음을 각오했기에 그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다. 범인이 범접하기 어려운 기상이 느껴진다. 마지막 구절은 카잔차키스의 묘비에도 적혀 있다. 그의 문학과 생을 요약한 말인 셈이다. 믿음의 보람은 이런 당당함을 얻는 것 아니겠는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이 말 한 마디 속에 모든 종교 경전의 핵심이 담겨 있다. 종교가 곧 진리는 아니다. 가장 종교적인 듯 보이는 사람이 진리와 무관할 때가 있다. 잘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려움의 사슬에 묶여 사는 이들이 많다. 예수는 우리에게 종교를 가르치지 않았다. 참 사람다운 삶의 길을 가르치고 몸소 보여주셨을 뿐이다. 많은 이들이 '구원'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 삶의 문제를 도외시한다. 구원받았다는 고백은 있으나 구원받은 삶이 나타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정의와 공의를 저버린 채 드리는 제물의 향기가 역겹다고 하셨다. 종교조차 우상숭배가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 우리 시대처럼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 오용되고 있는 시대가 또 있을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른 이들을 저주하고, 전쟁을 선포하기도 한다. 자기 확장 욕망에 분칠을 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는 이들도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이들이다. 종교개혁 502주년을 맞이하는 지금도 교회 세습이라는 음습한 욕망과 작별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교회 문제가 일간지의 사설이나 고발 프로그램에 등장한다. 어느 사이에 교회는 세상의 추문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아드 폰테스ad fontes, 이것은 종교개혁의 구호 가운데 하나이다.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뜻이다. 기독교인의 근원은 예수 정신이다. 예수 정신의 핵심은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와 무관한 타인은 없다. 모두가 아끼고 존중해야 할 이웃일 뿐이다.
노자는 진리에 깊이 접속된 사람의 삶을 '좌기예 해기분 화기광 동기진(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이라고 요약했다. 날카로움을 감추고, 얽힌 것을 풀어내고, 스스로 빛나려 하기보다 그 빛을 부드럽게 만들어 사람들에게 다가서고, 티끌과 하나 된다는 말이다. 예수의 삶이 그러하지 않은가. 자기를 비워 종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교회가 스스로 빛나려함으로 어두워지고 말았다. 기가 막힌 전락이다.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주님이 걸었던 고난의 길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길은 예루살렘 성 동쪽에 있는 스데반 문 안쪽에서 시작되어 좁고 지저분하고 번잡스러운 시장통을 통과한다. 그곳을 지나는 순례자들은 가방을 앞쪽으로 메고 가이드를 따라 종종걸음을 한다. 소매치기를 당하거나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이다. 어떤 이들은 그 길이 그렇게 시장통을 통과한다는 사실 자체를 속상해한다. 고요한 묵상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길이야말로 예수가 걸었던 길이 맞다.
예수는 인간의 현실 저 너머에 있는 진리를 가리켜 보이지 않았다. 인간의 희노애락이 발생하는 바로 그 현장에서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으셨다. 진리는 바로 그런 곳에서 체현되어야 한다. 현실을 도외시한 진리 추구는 관념일 뿐이다.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 했다. 그 교회가 중병에 걸렸다. 회복의 조짐보다 몰락의 조짐이 늘어나고 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예'가 되기 위해 십자가를 택하셨던 예수의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교회는 자기 확장 혹은 보존이라는 우상숭배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 있다.
※ 이 글은 청파김리교회 홈페이지의 칼럼란에 게재된 글임을 알려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