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낙심하지 말아라"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출애굽기 22:21-23, 고린도후서 6:8b-10, 누가복음 18: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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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올봄에 세상을 떠난 어느 법관의 기도문을 읽어보았습니다. "한 건이라도 잘못된 재판을 행할까, 한 사람이라도 억울한 사람으로 만들까 심히 두렵나이다." 법관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과 고뇌가 어떤 것인지 알게 해 주는 구절입니다. 이 기도문의 주인공은 손지열 전 대법관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친 첫 대법관으로, 국민의 기본권 보호에는 적극적이면서도 권력자들의 비리에는 소신 판결을 내린 법관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고등법원 판사 시절에는 고문 피해자에게 1심보다 더 많은 손해배상 판결을 내리기도 했고, 현직 대통령의 아들에게 징역형을 선고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재판하는 자리에 나아갈 때 마음은 심히 두렵고 떨린다면서 "저의 마음가짐을 호수처럼 잔잔하게 하시고, 양심을 거울처럼 깨끗하게 하소서. 혹 유혹과 시험을 받을 때엔 주의 이름으로 단호히 물리칠 수 있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특히 그는 "가난한 자의 어려움과 억눌린 자의 아픔을 돌아보는 법관이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강한 자, 부유한 자에게는 도움의 손이 많으나 약한 자, 가난한 자에게는 저 외 도울 자가 없음을 기억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문에 적었습니다. 이런 재판관만 있다면 세상은 얼마나 살기 좋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서(18:1-8)에는 이와 정반대의 재판관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도 무시하는 최악의 재판관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에 맞선 한 과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짧은 비유에는 다양한 제목들이 붙여져 있습니다. 그만큼 해석이 어렵고 분분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새번역은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인데, 이와 비슷한 제목으로는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 혹은 '불의한 재판관과 귀찮은 과부의 비유'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간구하는 과부의 비유' 혹은 '기도에 지치지 않아야 할 비유' 등과 같이 기도에 초점을 둔 제목들도 있습니다. 기도에 초점을 둔 제목들은 이 비유에서 과부가 끈질기고 귀찮을 정도로 재판관을 졸라댄 것처럼, 기도도 그렇게 끈질기게, 하나님이 귀찮을 정도로 해야 한다는 식의 가르침을 이끌어 냅니다. 하지만 이 비유의 핵심이 기도의 모범을 가르치기 위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저자인 누가 자신이 이 비유의 목적을 그렇게 이해하지 않고 있습니다. 1절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다"라고 했습니다.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것이 누가가 이해한 예수님의 비유의 주제입니다. 그런데 이 말의 어법을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누군가 '장래를 생각하고 열심히 일해라'라고 말한다고 합시다. 서양어로는, '장래를 생각해라. 그리고 열심히 일하라'가 됩니다. 즉 두 개의 명령어가 함께 들어 있는 이중 명령입니다. 그런데 이중 명령의 경우 진짜로 강조하고 싶은 역점은 늘 뒤에 있습니다. '장래를 생각하고 열심히 일해라'에서 역점은 '열심히 일하라' 입니다. '장래를 생각하고'는 '열심히 일하라'라는 명령을 잘 수행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라'는 '기도하라'에가 아니라 '낙심하지 말아라'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7절의 내용 중에 "하나님께 밤낮으로 부르짖는"이라는 표현이 곧 기도를 의미하므로, 이 비유가 기도에 관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기도가 중심 주제였다면 이 비유의 맨 마지막 구절은 지금처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가 아니라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기도하는 사람을 볼 수 있겠느냐?'라고 하든가, '이와 같이 너희는 늘 기도해야 하느니라'가 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셋째는, 가장 중요하게, 내용상의 이유인데 이 짧은 비유에 무려 여섯 번이나 반복해서 등장하는 동일한 말 때문입니다. 그것은 '권리를 찾다'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읽은 개역개정 성서는 '권리를 찾다'를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다'는 식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문에는 '원수'라는 말이 아예 나오지도 않을뿐더러, 지금 본문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어느 과부의 개인적 한풀이가 아니라 - 자세한 속사정은 모르겠으나 - 그가 빼앗긴 사회적 권리의 회복이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3, 5, 7, 8절에 '권리를 찾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의 그리스어 어원은 '에크디케손'(ekdikeson)인데, 그 원뜻은 '권리를 회복하다' 혹은 '정의를 세우다' 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NRSV)에서는 이것을 "grant justice"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네 군데 외에도 3절에 나오는 "내 적대자에게서"에서 '적대자'로 번역된 '안티디코스'(antidikos - 고소하는 사람)라는 낱말과, 6절에 나오는 '불의한 재판관'에서의 '불의한' 즉 '아디키아'(adikia)라는 낱말 속에 '권리' 혹은 '정의'를 뜻하는 동일한 어간 '디크'(dik)가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무려 여섯 번이나 본문은 빼앗긴 권리의 회복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기도하라'가 아니라 어떠한 악조건과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결코 '낙심하지 말아라'를 주제로 하고 있으며, 낙심하지 않는 것의 구체적인 모범으로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불의한 재판관에게 끈질기고 성가시게 자신의 권리 회복을 주장하여 그것을 관철시킨 어느 과부의 행위를 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기도는 필요조건이나 충분조건은 아닙니다. 기도는 소중합니다. 하지만 기도만 하면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기도가 오늘 본문의 과부처럼 과감하고 진취적으로 행동하게 하는 힘이냐, 아니면 소극적으로 도피하게 만드는 피난처냐 하는 것입니다.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보통 사람들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구걸할 뿐이다"(Common people do not pray; they only beg)라고 한탄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유대인들의 지혜를 모아놓은 탈무드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나님께 기도드려서는 안 된다." 비슷한 말로, 프랑스 속담에는 "기도는 많이 드리되 자기가 하나님께 무엇을 부탁하는지 주의하라"(Pray, pray very much; but beware of telling God what you want)는 말이 있습니다. 윌리엄 번햄(William G. Benham)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경건하게 기도하되, 힘 있게 두드리라"(Pray devoutly, but hammer stoutly - William Gurney Benham).

오늘 본문은 이 과부가 어떻게 '힘있게 두드렸는지'를 아주 상세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5절에 재판관은 "이 과부가 나를 이렇게 귀찮게 하니, 그의 권리를 찾아 주어야 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자꾸만 찾아와서 나를 못 견디게 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요지는 '자꾸만'(eis telos) 찾아와서 나를 '못 견디게 하다'(typopiazo)에 있습니다. 이 말을 성서의 그리스 원어로 보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마침내 찾아와 얼굴을 때리다' 입니다. 그리스어에서 이 말은 '권투시합을 하다'와 동의어입니다. 다른 하나는 '끊임없이/영구히 찾아와 귀찮게 하다/괴롭히다' 입니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인 과부가 감히 재판관을 찾아와 폭행을 가할 것이라는 표현은 아무래도 어색하므로, 성서 본문은 후자를 따른 것입니다. '끊임없이 찾아와 괴롭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용기와 집요함을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의 구체적인 모범으로 제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실 과부에게 이 일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상황은 절망적이고 악조건입니다. 무엇이 악조건입니까? 과부라는 신분 그 자체입니다. 철저한 가부장 사회에서 남편의 법적 보호라고는 조금도 없는, 사회적으로 최대의 약자라는 사실 그 자체가 악조건입니다. 실로 성서에서는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가 사회적 약자를 상징하는 아이콘과 같은 존재입니다. 무엇이 절망적인 상황입니까? 사회적 약자인 자신의 편을 들어주어야 할 재판관이, 성서를 보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2절) 불의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즉, 뇌물을 받아먹지 않고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절망적인 상황이 어디 있겠습니까! 글자 그대로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 같은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과부는 기어이 자신의 권리를 회복하고야 말았습니다. 조금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집요하게 자신의 권리 회복을 요구하고 그것을 되찾고야 말았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행동이 진정한 기도의 결과물임을 우리에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과부의 비유를 들으면서 이제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우리의 비유를 바꾸어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위 틈새 공략하기'로 말입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잡을 곳이라고는 전혀 없는 바위를 타고 오르는 산악인들이 있습니다. 저 역시 한때 북한산 향로봉에서 암벽등반을 경험해보았습니다. 물론 생명줄인 밧줄을 감고 있지만, 이들이 짚고 딛는 것은 바위 곳곳에 조금씩 갈라진 틈새입니다. 아무리 험준해 보이는 바위산도 반드시 틈새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틈새가 있는 이상 바위산의 정복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바로 이 틈새가 산악인들로 하여금 산의 정상에 도전하게 만드는 희망이고 방법입니다. 오늘 본문의 과부는 험준한 바위산과 같은 불의한 재판관의 틈새를 공략했습니다. 집요하고 과감하게 그를 괴롭혔고 그의 체면을 손상시켰습니다. 원래 희망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상황은 처음부터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용기가 희망을 만들어 냈습니다. "용기가 있는 곳에 희망이 있다"(In valor there is hope)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탈무드에 이런 수수께끼가 있습니다. "인간의 눈은 흰 부분과 검은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어째서 하나님은 검은 부분을 통해서만 사물을 볼 수 있게 인간을 만드셨을까?" 여러분은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탈무드 자체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인생은 어두운 곳을 통해 밝은 것을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 누가는 이런 물음으로 예수님의 비유를 끝맺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여기서 '믿음'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어떤 '믿음'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묻고 계신 걸까요? 그것은 그 과부가 가졌던 믿음입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주님은 바로 앞 구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백성의 권리를 찾아 주지 않으시고, 무른 체하고 오래 그들을 내버려 두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얼른 그들의 권리를 찾아 주실 것이다."

이 말씀을 들으며 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영화는 모세와 히브리인들의 출애굽 사건을 다룬 애니메이션입니다. 이 영화에서 모세가 바위같이 꿈쩍도 하지 않는 파라오의 완고한 마음 앞에 절망하고 있는 히브리 노예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파라오는 당신들의 먹을 것과 잠잘 집과 자유, 그리고 심지어 당신들의 목숨까지도 빼앗을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그가 결코 빼앗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믿음(faith)이다!" 그렇습니다. 이 믿음입니다. 여기서 모세가 말하는 믿음, 그것은 바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묻고 계는 것과 같은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백성의 권리를 찾아 주지 않으시고, 모른 체하고 오래 그들을 내버려 두시겠느냐?"

믿음이 무엇입니까? 성서는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히브리서 11:1)이라고 했습니다. '실상'(實狀)이 무엇입니까? '실제의 상황'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의지이지만 믿음은 그 이상입니다. 믿음은 능동적인 희망입니다. 실제 눈앞에서 이루어지는 상황입니다. 믿음은 단지 우리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어떤 것이라기보다 우리가 지금 '행하는' 어떤 것입니다.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희망입니다.

이상국의 시 <희망에 대하여>입니다. "그렇게 많이 캐냈는데도 / 우리나라 땅 속에 아직 무진장 묻혀 있는 / 석탄처럼 / 우리가 아무리 어려워도 / 희망을 다 써버린 때는 없었다 // 그 불이 / 아주 오랫동안 세상의 밤을 밝히고 / 나라의 등을 따뜻하게 해 주었는데 / 이제 사는 게 좀 번지르르해졌다고 / 아무도 불 캐던 사람들의 어둠을 생각하지 않는다 // 그게 섭섭해서 / 우리는 폐석더미에 모여 앉아 / 머리를 깎았다 / 한 번 깎인 머리털 그렇듯 / 더 숱 많고 억세게 자라라고 / 실은 서로의 희망을 깎아 주었다 // 우리가 아무리 퍼 써도 / 희망이 모자란 세상은 없다."

이 시의 부제는 "사북에 가서"입니다. 사북은 탄광촌입니다. 시인은 사북의 탄광촌에서 희망이라는 불꽃이 얼마나 깊이 사람 마음속에 저장되어 있는지 발견합니다. 여기서 사람은 이 땅의 가장 깊은 곳에서 석탄을 캐는 광부들입니다. 가장 어둡고 위험한 곳에서 희망을 캐내는 광부들입니다. 그들 속에서 시인은 희망이라는 게 어릴 적 빡빡 깎은 머리털처럼 아무리 깎아 없애도 다시 처음부터 자라는 그런 것임을 배웁니다. 그래서 세상이 아무리 지옥처럼 어렵고 고통스럽더라도 희망이라는 것 하나 반듯하게 갖고 있으면 어둠의 빛이 그 희망의 불빛을 더 잘 보이게 만드는 불빛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우리가 아무리 퍼 써도 희망이 모자란 세상은 없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일이 잘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힘들 때도 많습니다.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포기하지 말아야 할 때가 딱 한 번 있습니다. 그때는 바로 '가장 힘들 때'입니다. 왜냐하면, 가장 절망적일 때, 가장 힘들 때, 바로 그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저 유명한 이사야 42장을 교독문으로 읽었습니다. 대림절 기간에 우리에게 오시는 메시아가 어떤 분인지 알려주는 소중한 구절입니다. 성서학자들은 흔히 이 장을 '하나님의 종의 노래'라고 부릅니다. "나의 종을 보아라.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사람이다. 내가 택한 사람,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가 뭇 민족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다." 갈대가 상했다, 즉 갈대가 부러졌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효용 가치를 완전히 상실했다는 말입니다. 등불이 꺼져 간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애잔하게 소멸해 가는 최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오시는 메시아는 상한 갈대와 같은 폐물에게도 소망을 두신다는 말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시는 메시아는 마지막 순간에서도 우리에게 희망을 거두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 희망의 근거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낙심하지 말아야 할 최종적인 이유입니다. 이런 메시아를 기다리는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인 것입니다(고린도후서 6:10).

이사야는 우리에게 오시는 이 하나님의 종이 "쇠하지 않으며, 낙담하지 않으며, 끝내 세상에 공의를 세울 것"이라고 말합니다. 쇠하지 않는다는 말은 '실패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낙담하지 않는다는 말은 용기를 잃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실패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으시는 우리의 구원자가 반드시 끝내 세상에 공의를 세울 것이라고 이사야는 예언합니다. 반드시 잃어버린 권리를 회복시켜 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백성의 권리를 찾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모른 체하고 오래... 내버려 두시[지 않고]... 얼른 그들의 권리를 찾아 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여러분은 이 약속을 믿으십니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이]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퍽 벅(Pearl S. Buck)은 "희망 없이 빵을 먹는 것은 천천히 굶어 죽는 것이다"(To eat bread without hope still slowly to starve to death)라고 말했습니다. 한 해가 지나갑니다.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희망을 가지고 한 해를 마무리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희망은 지금 우리에게 오시는 그분에게 맞춰져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 희망 없이 산다는 것은 천천히 죽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희망을 오늘 우리를 찾아오시는 그분에게 두십시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는 그분에게 두십시오. 쇠하지 않으며, 낙담하지 않으며, 끝끝내 세상에 공의를 세우실 그분에게 두십시오. 하나님께서 밤낮으로 부르짖는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시고 어서 여러분의 권리를 되찾아주시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아멘. (2019.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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