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창세기 47:7-10, 로마서 8:24-28, 요한복음 16: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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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크리스마스가 되면 각종 TV 채널에서 성탄절 영화를 틀어줍니다. <나 홀로 집에>는 이제 거의 대표적인 성탄절 가족영화가 된 것 같습니다. 어쩌다가 성탄절에 홀로 집에 남겨진 아이가 집에 침입한 강도들을 기지와 용기로 통쾌하게 물리친다는 내용 아닙니까? 기독교 영화로는 <벤허>를 많이 방영했습니다. 아카데미상 11개 상 수상에 빛나는 작품, 몇 번을 보았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이번 성탄절엔 이 영화를 보면서 왜 그렇게 계속 눈물이 흐르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역시 '고전'이란 인생의 고비마다 위로와 새로운 깨달음을 주는 작품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소위 '인생 영화'가 있으신지요? 진정으로 사랑하는 영화,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 그래서 언제든 다시 보고 싶은 영화 말입니다. 저에게는 <사운드 오브 뮤직>이 그것입니다. 지금까지 30번은 넘게 본 것 같습니다. 휴머니티에 대한 따뜻한 울림이 있는 영화로 기억됩니다. 그런데 기독교 영화 중에서도 '인생 영화'가 있으신지요. <벤허>, <십계>, <쿼바디스>, <미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등 많은 기독교 영화가 있습니다. 저에게는 애니메이션 가 그것입니다. ('만화' 영화라니, 취향이 좀 독특하다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20년도 넘은 유학생 시절에 이 영화가 개봉됐을 때 개봉하는 그날 이 영화를 보러 달려갔었습니다. <십계> 이후 참으로 오랜만에 다루어지는 출애굽 이야기라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이후 저에게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학생들에게 꼭 보라고 추천해주는 영화가 되었습니다.

<이집트의 왕자>는 <십계>보다 신학적으로 진일보한 영화입니다. <십계> 이후 제기된 신학적 문제들을 충실히 성찰한 영화입니다. 사실 <십계>의 하나님은 신학적으로 논쟁이 된 하나님이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선민'만 사랑하고 선택하지 않은 이방인들은 모두 무찔러 죽이게 하는 배타적인 하나님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자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적대시하고 처벌하고 죽이는 폭군처럼 그려져 있습니다. 사실 이 하나님은 돌아가신 제 아버님이 온 가족의 눈물과 기도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교회 다니기를 거부하게 만든 분이기도 했습니다.

어릴 적 제 가족은 아버지가 <십계> 영화를 보시면 위대하신 하나님을 깨닫고 곧 교회에 나가리라 기대했었습니다. 그러나 혹 떼려다 혹 붙였다는 식으로 그 영화를 보시고 오히려 제 아버지는 기독교를 더 배척하게 되었습니다. 그 영화 때문에 교회에 나가시게 되는 것이 20년이나 지체되었습니다. 지금도 그 영화를 보고 나서 아버지가 하신 말이 제 귀에 생생합니다. '그게 창조자 하나님이야? 자기를 믿지 않는다고 그 많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여버리는 게 사랑의 하나님이야? 나는 그런 하나님 안 믿어!' 저는 그때 이 말을 이해하질 못했습니다. 나 역시 선택된 백성이 되었다는 것만 생각했기 때문에, 그 선택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제 귀에 들릴 리 만무했었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제 아버지의 절규는 그분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서양 기독교의 선교 대상이 되었던 모든 곳에서 터져 나온 의문이었습니다. 이젠 신학적으로 이 문제가 많이 해결되었습니다. 출애굽기를 이스라엘의 눈이 아니라 가나안 사람들의 눈으로, 즉 정복자의 눈이 아니라 피정복자의 눈으로 다시 읽기 시작한 것도 꽤 되었고 그 성과도 상당히 축적되어 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부족신에서 만민의 하나님으로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화 <이집트의 왕자>는 그런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에 대한 이해가 넓어진 것이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의의입니다

이 영화에서 두 번째로 눈에 뜨이는 것은 영화 <십계>가 가지고 있던 인종적 편견을 극복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십계>에서 주인공들은 모두 백인들입니다. 모세는 찰턴 헤스턴이, 파라오는 율 브리너가 연기했습니다. 배우가 없어서도 이유였겠지만 그 영화를 만들 당시엔 그런 것은 신학적으로 문제가 안 되었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유대인의 얼굴이 아니라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앵글로색슨족처럼 그려지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애니메이션 영화인 <이집트의 왕자>에서 모든 주인공은 인류학적으로 실제의 인종과 피부색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얼굴은 까무잡잡합니다. 모세의 아내 십보라도 그렇습니다. 사실 십보라는 미디안 족속입니다. 미디안 족속이라 하면 지금의 아프리카 에디오피아 지역의 한 부족이라는 말입니다. <이집트의 왕자>에서는 이렇게 모든 등장인물이 북아프리카와 중동지역에 걸친 원래의 인종과 가깝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작은 차이 같지만 신학적으로는 중요한 진전입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예수님은 남자였기 때문에 여자는 목사가 될 수 없고, 예수님은 흑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흑인에 대한 백인의 지배와 우위는 정당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매우 많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이 영화에서 돋보이는 것은 모세를 절대적인 영웅으로 묘사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습니다. 기존의 영화에서 모세는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하고 일방적으로 이끌어간 독재자와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집트의 왕자>에서는 모세의 누이 미리암과 아내 십보라의 역할이 크게 강조되어 있습니다. 파라오의 왕궁에서 왕자로 자란 모세가 자신이 본래 히브리인임을 깨닫고 정신적으로 방황하게 되는 계기도 장차 아내가 될 십보라를 좇아 히브리 노예들의 마을에 들어가게 되었다가 거기서 만난 그의 누이 미리암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미리암은 이집트의 왕자 앞에서도 당당했습니다. 모세의 숨겨진 탄생의 비밀을 알려주고 그가 원래 있어야 할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라 청합니다. 모세의 아내 십보라는 출애굽 여정의 동반자로 나타납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뵙고 그의 사명에 대해 고민할 때 십보라는 남편의 임무를 이해하고 과감히 그와 함께 이집트로 나섭니다. 집에 남아 남편 오기만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한 낙타를 타고 이집트를 향해 사막으로 사라지는 두 부부의 모습은 참으로 보기 좋았습니다. 모세가 파라오를 처음 만나고 나서 강제노역이 오히려 두 배로 늘어나 화가 난 히브리 동족에 의해 진흙탕에 빠졌을 때에도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누이 미리암이었습니다. 홍해를 건넌 이후 미리암은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데, 이 노래를 잘 들어보면 그가 얼마나 뛰어난 믿음의 소유자였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살던 사회는 결코 남녀가 평등한 사회가 아니었지만, 이 영화는 그동안 가려져 있던 여성의 적극적인 역할과 지도력을 발굴해 부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영화 <이집트의 왕자>에서 눈에 띄는 것은 모세와 파라오 간의 우애와 인간적 고뇌가 잘 그려져 있다는 점입니다. 둘은 함께 궁궐에서 자랐습니다. 둘도 없는 형제로서 영원한 형제애를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결코 함께할 수 없는 역사의 갈림길에서 둘은 갈라서야 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맞서야 했습니다. 하지만 둘은 마지막까지 고뇌합니다. 인간이기에 자신의 역할과 우정 사이에서 아파합니다. 모세는 끝까지 파라오를 설득하고 이해시키려 노력합니다. 모세는 무조건 착하고, 파라오는 무조건 나쁘다는 이원론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10가지 재앙도 하나님의 일방적이거나 공격적인 징벌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재앙들은 파라오 왕실이 스스로 불러온 것임을 잘 그리고 있습니다. 그중 마지막 10번째 재앙, 즉 이집트의 장자들을 죽이는 재앙에 대한 해석이 뛰어납니다. 파라오의 선왕은 히브리인들이 번성하고 강해지자 그들 위에 감독들을 세우고 강제노역을 부과하였고, 히브리인들의 가정에 남자 아기가 태어나거든 다 죽이라 하였습니다. 영화 속에서 선왕은 '그들은 단지 노예일 뿐이니 왕권을 위해 아기들을 죽이는 희생쯤은 불가피하다'라고 말합니다. 10가지 재앙 중의 마지막 재앙인 이집트의 장자가 모두 죽는 재앙도 히브리 아이들을 학살한 역사적 죄악에 그 뿌리가 있음을 잘 드러낸 것입니다. 자기가 지은 죄가 악이 되어 역사 안에서 되돌아옴을 잘 보여줍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을 인간의 의지나 역할과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밀어붙이는 신으로 묘사하던 것에서 벗어났습니다. 모세는 홍해를 가를 때에도 <십계>의 모세처럼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지팡이만 내리치는 수동적인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호렙산에서 하나님이 반드시 그와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약속에 대한 믿음의 표시로 홍해 바다를 내리칩니다. 주저하지는 않았지만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내면의 깊은 고백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인지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다 사이에 난 길로 히브리인들을 추격하던 이집트 군사들이 모두 홍해 바다에 수장된 후, 그 바다를 사이에 두고 한쪽에서는 파라오가, 다른 한쪽에서는 모세가 서로를 절규하며 우는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지만, 자신의 길을 떠나야 하는 인간의 숙명과 같은 삶을 잘 말해주었습니다.

다섯째로 이 영화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모세가 호렙산에서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거기서 들은 하나님의 음성이 그가 이집트에 있을 때 들었던 동족 히브리 노예들의 신음 소리와 겹쳐있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하나님의 음성은 하늘에서 어느 날 갑자기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삶에서 가장 깊은 곳의 기억과 아픔과 고뇌를 통해 공명합니다. 하나님은 천상의 언어가 아니라 우리가 아는 언어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몸을 통해, 우리의 기억을 통해, 우리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불타는 떨기나무는 사실 우리 각자의 가슴 안에 타고 있습니다. 영화 <십계>와 달리 <이집트의 왕자>에 나오는 떨기나무는 볼품없이 작았지만 오히려 먼 옛날 호렙산 꼭대기에서 한 번 불붙었던 떨기나무가 아니라 지금 여기 내 삶의 한가운데에서 내 삶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저는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믿음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해줍니다. 믿는 자에게 기적이 임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There can be miracle when you believe"라는 영화 속 노랫말처럼 말입니다.) 마음이 완악해진 파라오의 저항이 심해지고 히브리인들이 동요할 때 모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파라오는 당신들의 먹을 것, 살 집, 자유, 그리고 심지어 목숨까지도 빼앗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그가 빼앗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정말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7-8절을 보면, 예수께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백성들의 권리를 찾아주지 않으시고 모른 체하고 오래 그들을 내버려두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얼른 그들의 권리를 찾아주실 것이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모세가 말한 믿음과 동일한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히브리인들이 4백 년을 종살이하면서 밤낮으로 부르짖던 소리를 하나님은 들으셨습니다. 그 소리를 모세가 듣고 소명의 자리로 나왔습니다. 파라오는 목숨과 음식과 집과 자유를 빼앗을 수는 있지만 백성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외면치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은 빼앗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믿음을, 그 믿음이 만들어낸 기적을 이 영화는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실로 영화를 보며 깨달았습니다. 뒤쫓아 오는 이집트 군병 앞에 불기둥이 막아서는 것을 보면서,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면서 '길이 없는 곳에 길을 열어주는 것이 믿음'임을 알았습니다. '끊겼다 싶을 때 이어주는 게 믿음'임을 깨달았습니다. '닫혔다 싶을 때 열어주는 것이 믿음'이고 '끝이다 싶을 때 시작을 알리는 것이 믿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을 온몸으로 체득하기까지 모세라는 한 인간은 이집트의 왕자 자리에서 쫓겨나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광야에서 '푹 썩어' 지내야 함을 보았습니다. 믿음이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한 과정 한 과정에서 우리가 아픔을 통해 몸소 느끼고 깨닫고 자라나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군데군데 제 눈시울이 붉어졌던 것은 바로 그런 모세의 인생이 겪은 역경과 고난과 좌절과 방황들이었습니다. 만약 그 과정들이 생략되었다면 그는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어도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도 알아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과정이 있었기에 그는 비로소 자신의 깊은 좌절의 경험 속에서 하나님의 맑은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한 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곧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합니다. 여느 해보다 2019년은 많이 힘들었던 한 해인 것 같습니다. 다가오는 2020년도 그렇게 힘들까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럴 때 무슨 말씀을 전할까, 어떤 희망의 메시지를 전할까 고심하다 영화 <이집트의 왕자>가 생각이 났습니다. 이 영화를 말씀드린 이유는, 우리의 지난 한 해 동안의 삶이 생산적이었든 비생산적이었든, 의미 있었든 고만고만했든, 좌절했든 성공이든, 그리고 어떤 변화와 아픔과 기쁨이 있었든지 간에, 우리의 믿음과 희망은 바로 '그 속에서'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자라났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과 소망은 어디 멀리에, 하늘 높은 곳에 있지 않습니다. 나의 소망과 믿음의 근원인 하나님은 내가 힘들게 살아온 그 삶 안에서 나를 지키시고, 내 아픔에 귀 기울이시고, 그리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며 소망과 소명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내가 써내려온 지난 365일의 일기장에 날마다 함께하신 그분의 현존과 동행을 깨달을 때 우리도 비로소 모세가 보았던 그 희망을, 그 소망을, 두려움을 떨쳐버린 그 높은 기상을, 그리고 그 밝은 눈썹과 빛나는 얼굴을 또한 가지게 될 것입니다.

알렉산드로 푸슈킨의 시입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 머잖아 기쁨의 날이 오리니. // 마음은 언제나 미래를 꿈꾸고 / 현재는 우울하고 슬픈 것! / 모든 것들은 한순간에 지나가고 / 지나간 것들은 또다시 그리워지나니."

2019년 기해년 한 해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얼마나 수고와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삶이 그런 것 같습니다. 현재는 우울하고 슬픈 것인가 봅니다. 올 한 해 저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마음으로 버틴 것 같습니다. 마지막에 서니 정말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지나갔습니다. 지나간 것들이 또다시 그리워질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딘 올 한 해의 삶을 결코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그 과정이 나를 견고하고 단단하게 해주고 이전에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닫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험난한 세월을 사는 것이 인생인가 봅니다. 야곱도 파라오 앞에 섰을 때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보며 자신은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꿈을 많이 꾸던 아들 요셉이 형들의 질시를 받아 애굽에 팔려갔으나 온갖 역경과 시련을 뚫고 총리가 되었습니다. 지혜롭게 기근에 잘 대비하여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심한 기근이 든 가나안 땅에 살던 아버지 야곱과 형제들을 애굽의 고센 땅에 살게 해달라고 파라오에게 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와 파라오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파라오 앞에서 그를 축복하니 파라오가 야곱의 나이가 얼마인지 물었습니다. 야곱이 이렇게 답합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형 에서와 다투고, 장자권을 얻기 위해 아버지를 속이고, 분노한 형에게서 떠나 온갖 고생을 하고, 얍복 강가에서 주의 천사를 만나 환도뼈가 부러지기까지 복을 달라 청하고, 결국 이스라엘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까지 얻은 그이지만, 그는 그의 생이 험악한 세월이었다고 회고합니다. 인간의 생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성서의 유명한 구절입니다.

현재는 우울하고 슬픈 것이지만, 마음은 언제나 미래를 꿈꿉니다.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머잖아 기쁨의 날이 오리라는 희망 속에 우리는 현재를 버팁니다. 사도 바울도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만이 아니라 온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권면합니다. 그런데 희망이 보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이상 로마서 8:18-28 중에서).

"10대 자녀가 반항을 하면 그건 아이가 거리에서 방황하지 않고 집에 잘 있다는 것이고, 지불해야 할 세금이 있다면 그건 나에게 재산과 직장이 있다는 것이고, 파티를 하고 나서 치워야 할 것이 너무 많다면 그건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고, 옷이 몸에 좀 낀다면 그건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것이고, 세탁하고 다림질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면 그건 나에게 입을 옷이 많다는 것이고,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하다면 그건 내가 열심히 일했다는 것이고, 이른 새벽 시끄러운 자명종 소리에 깼다면 그건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고, 그리고 이메일이 너무 많이 쏟아진다면 그건 나를 생각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다." 글렌 반 에케렌의 글 <너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입니다.

올 한 해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 지난 한 해 우리의 삶이 생산적이었든 비생산적이었든, 의미 있었든 고만고만했든, 좌절했든 성공이든, 그리고 어떤 변화와 아픔과 기쁨이 있었든지 간에, 우리의 믿음과 희망은 바로 '그 속에서'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발견되고 자라납니다. 하나님은 내가 살아온 그 삶 안에서 나를 이끄시고, 지키시고, 내 울음소리를 들으시고, 그리고 언제나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우리를 거룩한 삶으로 부르시며 우리와 동행하셨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모든 두려움을 이기게 만드는 희망이며 소망입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교독문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기 때문입니다(이상 시편 46편). 예수께서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한 16:33).

"만약에 내가 한 사람의 가슴앓이를 / 멈추게 할 수 있다면 / 나 헛되이 사는 것은 아니리. // 만약에 내가 누군가의 아픔을 / 쓰다듬어 줄 수 있다면 / 혹은 고통 하나를 가라앉힐 수 있다면 / 혹은 기진맥진 지친 울새 한 마리를 / 제 둥지로 돌아가게 할 수 있다면 // 나 지금 헛되이 사는 것은 아니리." 에밀리 디킨슨 <만약에 내가>입니다.

그렇습니다. 올 한 해 내가 단 한 사람에게 위로를 줄 수 있었다면, 단 한 생명을 보듬을 수 있었다면 우리는 결코 헛되이 산 것이 아닙니다. 뢀프 왈도 에머슨의 말처럼 "내가 한 때 이곳에서 살았으므로 해서 /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 행복해지는 것 // 그것이 바로 당신의 진정한 / 인생의 성공"입니다. 그런 삶을 살았다면 올해 우리 모두 성공한 삶을 산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화가 난 마음으로 과거를 돌아보지 마십시오. 두려움을 가지고 미래를 내다보지도 마십시오. 다만, 깨어 있는 눈으로 주위를 보십시오."(제임스 터버)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그러하셨던 것처럼, 여러분의 발길을 지키시고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시며 언제나 선한 길로 인도해주실 것을 기도합니다. (2019.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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