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젊은 시절 목회하면서 가장 마음 아팠던 일 중 하나는 어린 소녀의 죽음이었습니다. 12살 소녀 미셀의 죽음은 목회 초년병이었던 내게는 당황 그 자체였습니다. 첫 장례였으니 말입니다. 그것도 영어와 한국어 이중 언어로 집례 하는 장례식이었으니 얼마나 당황스러웠겠습니까? 이젠 30년이 훌쩍 넘은 옛 이야기가 되었지만 기막히게도 작년 교회에서 은퇴하기 얼마 전에도 88일된 영아를 장례 치른 일이 있었습니다.
돌이켜 보니 내 목회생활의 시작이 12살배기 어린 소녀의 장례로 시작하였고, 내 목회 생활의 끝도 88일된 영아의 장례로 마쳤으니, 참으로 기이하고 신비하기까지 합니다. 엊그제 시편 89장을 읽다가 다음 구절에 멈췄습니다. "그의 젊은 날들을 짧게 하시고 그를 수치로 덮으셨나이다."(시 89:45)
이 구절에 대한 주석학적 설명은 잠시 뒤로하고서라도 "젊은 날들을 짧게 하시고"라는 문구가 어린 아이의 죽음을 떠올리기에 충분했습니다. 너무 이른 죽음, 때 아닌 죽음, 불시(不時)의 죽음 말입니다(untimely death). 가물거리는 기억 속에서 30여 년 전 교우들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 떠오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통과 상실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고통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가슴에다 자신의 진실을 확증하신다고 믿고 싶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하시려고 하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과 가족과 교회에 대해 하나님께서 하시고 있는 일이 무엇이든지간에 하나님께서 지금 손 놓고 계시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의 아드님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생에 참여하셨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우리의 하나님의 도성(都城)에 이르는 여정 가운데 반드시 만나고 겪어야만 하는 모든 일들을 그분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께서도 만나시고 겪으시며 지나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내버려둔 채로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 이 글은 류호준 백석대 은퇴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본보는 앞서 필자의 동의를 얻어 신앙성찰에 도움이 되는 유의미한 글을 게재키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