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난 곳은 <만주국 목단강성 영안현 동경성가 동구 3반 4조>이다.
만주! 그 곳은 사실 고대 우리 민족사에 우리의 고향으로 남아 있고 민족의 혼이 서려 있는 곳이 아닌가! 나는 요즘 젊은이들이 애창하는 곡 중에 '광야에서'라는 노래를 무척 좋아한다. [찢기는 가슴 안고 사라졌던/ 이 땅의 피울음 있다/ 부둥킨 두 팔에 솟아나는/ 하얀 옷의 핏줄기 있다/ 해뜨는 동해에서 해지는 서해까지/ 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 벌판/ 우리 어찌 가난하리요/ 우리 어찌 주저하리요/ 다시 서는 저 들판에서/ 움켜진 뜨거운 흙이여!]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나는 만주를 나의 고향으로 그리곤 한다. 그러나 내가 만주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진짜 이유는 사실 또 다른 것에 있다. 나에게 만자라는 이름을 남겨 주신 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며 동시에 내 어머니의 한평생에 그 가슴에 못이 박힌 곳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분은 너무도 일찍, 나를 겨우 2년동안만 키워 놓으시고 이 세상을 떠나가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우리 어머니는 36세의 청춘이셨다. 아버지가 남겨 놓으신 우리 네 자매는 맨 큰 언니가 10살, 그 아래로 8살, 5살 그리고 내가 2살 배기였다. 그러기에 나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내 어머니의 추억 속에서 얻은 것들이다.
우리 아버지는 일제의 착취와 압제의 시대에 일생 유랑의 삶을 사시었다. 경남 김해군 명지면이 고향이신 아버지는 그 당시에 한의학을 공부하신 의사이셨다. 내가 아버지의 직업을 한의사라 하지 않고 의사라고 하는 것은 나의 외할아버지의 주장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외할아버지는 서양의술이 들어 왔을 당시 우리 민족의 의학이 의학이요 의사였고, 서양의 것은 양이요 양의사라 하였는데, 일제의 우리민족 말살 정책으로 인해 우리 의학을 천시케하고 종국에는 우리 것이 한의학, 한의사로 밀려났다는 말씀이시었다. 아무튼 가난한 농촌 청년이셨던 아버지는 서울에 유학을 하셨고 열심히 공부하셔서 훌륭한 의사가 되시었다.
아버지는 방학 때면 꼭 고향으로 내려가서 야학을 열어 동네 청년들을 문맹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셨고 고향에 많은 나무들을 심는 등 생활개선 운동도 펼치시면서 농촌 계몽 활동에 열중하시었다고 한다. 우리 어머니 말씀이 아마도 그때 아버지가 심어 놓으신 나무들이 지금은 아름드리 거목들이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어머니가 가지고 계신 빛바랜 사진 가운데 아버지가 YMCA 수련회에 참석하시어 여러 청년들과 함께 있는 모습이 있는데, 어머니는 아버지의 그런 활동에 참여하셨던 일을 매우 자랑스럽게 우리에게 들려주시곤 하셨다. 두 분이 결혼하신 후 일본에서도 생활하시고, 원래 고향 근처인 부산에서 계속 살기도 하다가 위로 세 언니들이 있고 아직 내가 태어나기 전에 계속되는 정세의 불안에서 벗어나고자 만주로 이주하셨던 것이다.
나에게 있어 가장 확실한 아버지와의 관계는 나의 이름이다. 요즘 세상에도 그러하지만 아들 낳기를 간절히 바라던 그 시절에 네 번째로 태어난 딸은 결코 반가운 존재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나를 한 번도 안아 주신 적이 없었다고 한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어떻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내켰던지 두 팔을 벌리고 나를 부르셨는데 내가 질겁을 하고 도망 쳤다고 한다. 네 번째 딸이라 받았던 설움이 오늘의 나를 '여성신학'을 열심히 공부하게 한 동인일지 모른다고 혼자 가끔 생각할 때가 있다. 만약 지금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결코 아들과 딸을 차별하는 사고의 소유자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그런 가부장적 사고를 그냥 넘겨 가지는 않았을 것이기에 말이다. 아버지가 내게 남기신 것은 그분의 따뜻한 체온이나 혹은 자상한 돌봄이나 특별한 추억거리 같은 것이 전혀 아닌 오직 만주의 지명을 따서 지어주신 나의 이름 뿐이다.
※ 이 글은 새길교회 최만자 선생의 가족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최 선생은 일제 만행이 극심해 지던 일제 강점 말기에 이주민 대열에 합류한 이주민 가족 출신으로 만주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해당 글은 1995년 여신학자협의회 출판물에 앞서 게재된 바 있습니다. 필자의 동의를 얻어 전문을 총 6회에 걸쳐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