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카이로스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민수기 6:22-27, 로마서 1:16-17, 마태복음 16: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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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제가 중학교 일학년 때던가... 난로도 없는 교실에 학생들을 전부 다 들어 앉혀 놓고는 1번부터 새해를 맞는 소감과 각오에 대해서 얘기하래요... 나는 아마 그 나이 또래의 아이가 할 수 있는 그저 그런 얘기를 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숙제 잘하고, 심부름 잘하고 그런 이야기였을 겁니다. 그런데 저만큼 한 중간쯤 앉아있던 아이의 차례가 되었어요. 그 아이는 평소에 별로 눈에 띄지도 않고 성적도 별로 좋은 편이 못 되는 애였는데 일어서서 하는 말이 그랬습니다. [이제 새해]라고 해서 한마디 하라고 그러시는데 시간이라는 것은 강물이 흘러가는 것이나 마찬가진데 왜 사람들이 [새해]라고 흘러가는 강물에 이름을 붙이는지 자기는 도저히 모르겠다는 말을 했어요. 굉장히 충격이었어요. 아! 내가 저 얘기를 할 걸! 부럽기도 하고 내가 했던 말이 후회도 되었어요. 만약 선생님이 그 말을 했다면 으레 선생님이니까 그런 말 하나보다 그랬을 겁니다. 같은 또래의 친구가 한 말이기 때문에 충격적이었고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습니다."(신영복 선생의 글 중에서)

2020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2020년은 숫자 '20'이 두 번 나오니까 쓰기도 좋고 보기에 모양도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간이라는 것이 흘러가는 강물과 같아서 거기에다 이름을 붙일 수 없다는 그 아이의 말처럼, 20세기 과학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해 뉴턴이 확립한 '절대시간'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절대성과 독립성을 가진 시간은 사라졌지요. 지금은 중력장을 시공이라고 한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말하는 2020년은 유대력으로는 5781년입니다. 게다가 유대인들의 새해인 '로슈하샤나'는 서력으로 가을에야 옵니다. 서기 2020년은 불자들에게는 불기 2581년이고, 이슬람교도들에게는 1398년이며, 한국인들에게는 단기 4353년입니다. 시간은 상대적이고, 결국 나만 여기 있습니다. 기욤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입니다.

"하루하루 지나가고 세월도 흘러가고 / 지나간 날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 우리들 사랑은 돌아오지 않는데 /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른다 //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 세월은 가고 나는 여기 남는다."

'시간'(time)이라는 것은 사실 인간이 만든 하나의 개념에 불과합니다. 서구 문명에서 말하는 시간은 연대기적인 시간 '크로노스'(chronos)입니다. 역사가 어느 시점에서 시작하여 일직선으로 한 방향으로만 나아간다는 관념입니다. 하지만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시간은 사뭇 다릅니다. 그것은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입니다. 은혜의 때, 회심의 때, 변화의 때입니다. 이 카이로스의 시간은 직선적이고 평면적인 것이 아니라 입체적이고 공간적이며 또한 동시적입니다. 시간이 과거, 현재, 미래로 삼등분 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의 공간 안에,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안에, 동시적으로 존재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의 일성(一聲)은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The time is fulfilled, and the kingdom of God has come near; repent - 마가복음 1:15)였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때'가 바로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간, 회심과 변화의 가능성이 주어진 은총의 시간입니다. 사도 바울도 주님이 말씀하신 이 '때'에 주목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압니다.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낮에 행동하듯이, 단정하게 행합시다. 호사한 연회와 술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에 빠지지 맙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로마서 13:11-14).

사람은 때를 알아야 합니다. 강물처럼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시간 안의 시간, 변화와 은총의 시간, 즉 하나님의 때를 알아야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라는 미국 청교도 신학자는 이런 유명한 말은 남겼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이 아니라, 남들이 보는 동일한 것을 다르게 보는 사람입니다"(The saints do not see things that others do not see; rather, they see what everyone else sees but in a different way). 물론 신앙의 신비 안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은 일상적인 것 속에 감춰진 특별한 것을 보게 해주는 눈입니다. 땅의 것들 속에서 하늘의 것을 보는 눈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시험하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저녁 때에는 '하늘이 붉은 것을 보니 내일은 날씨가 맑겠구나' 하고,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린 것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 한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들은 분별하지 못하느냐?"(마태복음 16:2-3). 무슨 말씀입니까? 하늘의 징조, 즉 날씨의 조짐은 그렇게 잘 읽을 줄 알면서 왜 시대의 징조, 즉 역사의 변화와 위기는 읽을 줄 모르느냐는 질타의 말씀입니다.

한 역사학자(Frederic W. Robertson)는 1789년 프랑스 혁명 전야의 사회상을 이렇게 서술하였습니다. "옛날 유대 사람들이 천기의 기상은 잘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바로 분별하지 못했던 것처럼, 파리의 숙녀들은 머리 모양을 꾸미고 비단옷을 입는 데만 정신이 팔려 날마다 향락으로 지새다가 마침내는 그들의 허영과 사치가 거국적인 희생을 치러야 하는 기요틴을 초래하게 될 것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기요틴(guillotine)이 무엇입니까? 단두대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프랑스 혁명으로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 등, 숱한 왕족과 귀족과 관원들이 그 단두대 위에서 처형됐습니다. 만약 그들이 혁명 전야 심상치 않은 민심의 동향과 시대의 징조를 분별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 비참한 최후는 맞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18세기 파리의 귀족들이 거리를 방황하는 굶주린 노동자들의 얼굴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증오의 눈빛을 조금이라도 읽어낼 수 있었다면, 그렇게 비참하게 근대혁명의 희생물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직전, 러시아 교회는 '바늘 끝에 천사 몇 분이 올라가 앉을 수 있는지'를 놓고 격렬한 신학적 논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1997년 한국이 IMF라는 경제적 파탄에 빠지기 직전, 한국 교회는 어떻게 교인 수를 늘릴 것인지에만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라'는 예수님의 경고가 있은 지 2천 년이 지났지만 변한 것은 별로 없습니다.

크리스천은 누구입니까? 크리스천은 강물처럼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시간 안의 시간, 회심과 변화의 시간, 하나님의 은총의 시간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크리스천은 하늘의 징조, 즉 날씨가 아니라 시대의 징조, 즉 역사의 흐름과 방향을 분별해 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이 시대를 어떻게 끌고 가시는지 큰 그림을 볼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크리스천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들의 육안에 안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크리스천도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것과 같은 것을 봅니다. 하지만 그것을 '다르게' 볼 줄 압니다.

사람들이 '모든 것이 평화다'라고 말할 때 크리스천은 그 속에 숨어있는 전쟁의 그림자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모든 것이 번영이다'라고 말할 때 그 번영을 떠받치고 있는 불의와 탐욕과 불평등의 구조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이것이 성공이다'라고 정의할 때 한 사람의 성공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수많은 낙오자의 눈물과 좌절을 함께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창고에 재물을 가득 쌓아놓고 이제는 안심이라고 생각할 때 언제 닥칠지 모르는 인생의 종말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크리스천은 '위기'를 볼 줄 아는 사람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위기라는 영어 "crisis"의 어원이 바로 카이로스입니다. 그런데 '위기'(危機)라는 말이 '위험'(危險)과 '기회'(機會)의 합성어인 것처럼, 그 안에는 위험과 기회가 동시에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라고 말합니다(에베소서 5:16). 여기서 '때'가 카이로스입니다. "때가 악하다"는 말은 '지금이 위기의 때'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이 '위기'는 단지 파멸로 향하는 위기가 아니라 그 파멸에서 생명의 하나님께 돌아서는 은총과 회심의 기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때가 악하니라"라고 말한 직후에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에베소서 5:17-21).

크리스천은 이렇게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아야 합니다. 위기의 시간을 살아야 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로마서 12:2)하며 살아야 합니다. 시간 속에서 영원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 속으로 '침노해'(forcefully advancing) 들어오는 하나님의 주권 안에 살아야 합니다. 윌리엄 블레이크가 말처럼, "한 알의 모래에서 세상을 보고 / 한 송이 들꽃에서 하늘을 보려면 / 네 손바닥에 무한을 쥐고 / 한순간에 영원을 담아"야 합니다(윌리엄 블레이크, <한 알의 모래>).

새해가 밝았습니다. 2020년 경자년 한 해는 어떤 결심을 하셨습니까? 제가 제일 좋아하는 가르침 혹은 격언(格言)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라는 말입니다. 매우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폴 부르제가 한 말인데, "그저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는 삶, 대세에 순응하는 삶, 익숙한 것에 길들어져 있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 돌아오는 결과는 성공이 아니라 추락"이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인간의 인생은 그가 생각한 대로 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정신의 중요성을 일깨워줍니다. 인간은 정신적인 존재입니다.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식물인 갈대와 같이 자연에 있어서는 약한 존재이지만,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무엇보다도 뛰어난 존재이다"라고 <팡세>에서 그는 말했습니다. 로댕의 작품 <생각하는 사람>을 떠올려보십시오. 인간은 그렇게 생각하는 존재, 뜻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함석헌 선생님 말처럼,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삽니다."

그런데 생각 혹은 정신은 순우리말로 '얼'입니다. 얼이란 정신에서 중심이 되는 부분입니다. 그것이 없는 사람을 우리는 '얼빠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군대에서는 그런 사람을 '얼차려'를 시킵니다. 그렇게 중요한 얼이 들어오고 나가는 곳이 바로 '얼굴'입니다. 얼굴이라는 말의 뜻을 아시는지요. 얼이 들어오고 나가는 굴이 있는 곳입니다. 얼굴은 단순한 머리(head) 부분이 아닙니다. 얼, 즉 정신과 생각이 들어오고 나가는 눈, 코, 귀, 입과 같은 굴이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얼굴(face)은 한 사람의 인격이고 그 사람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얼이 없으면 인간은 '좀비'가 됩니다. 즉 살아있는 시체가 됩니다. 아무리 부유한 개인도, 평화로운 가정도, 역사가 오래된 조직도 얼이 없으면, 얼이 빠지나 죽은 존재와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위기, 위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위기는 상황이 변해서 오는 게 아닙니다. 상황은 언제나 변합니다. 위기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고, 사는 대로 생각할 때 옵니다." 생각하지 않을 때 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왜 여기 존재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을 때 찾아옵니다. 그렇게 생각한 대로 실천하지 않을 때 옵니다. 크리스천의 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크리스천의 위기는 '말씀대로 살지 않고, 사는 대로 말씀을 해석할 때' 옵니다. 시대의 풍조에 파묻혀 자신의 정체성, 고유성, 존재의 이유를 잃을 때 찾아옵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할 때 찾아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이 빠질 때 옵니다.

약 20년 전에,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병원은 새로운 21세기의 시작을 앞두고 "Hospital Identity"를 싹 바꾼 적이 있습니다. 광혜원부터 기독교 정신을 오래 강조했으니 이젠 그걸 좀 빼고 다른 병원들보다 뛰어난 '수월성'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최고의 기획사에게 병원의 모토부터 이미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바꿔달라 위탁했습니다. 6개월 후 이 기획사가 제안한 병원의 새 모토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류를 질병으로부터 구한다." 병원 측은 기독교를 좀 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획사가 보기에 그 병원이 가지고 있는 고유성, 정체성, 비교우위는 기독교 정신이었습니다. 기독교의 보편적인 사랑의 정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병원만이 가지고 있는 이 고유한 정체성, 역사, 아름다움, 정신을 차별화하는 전략을 권고했던 것입니다. 이후 이 전략을 매우 성공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로마서 1:16)라고 선언했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따르는 크리스천임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까? 나를 위해 고난을 당하시고, 자기의 손과 발에 못을 치는 자들을 용서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이 여러분의 참된 소망이고 삶의 좌표이며 인생의 자랑입니까? 바울은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디모데후서 1:8)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주님을 증언함과 주님을 위해 힘쓰다 고난당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들입니까? 지금 크리스천이 크리스천답지 않아서 이 사회가 위기입니다. 크리스천이 크리스천임을 부끄러워해서 교회가 위기입니다. 크리스천이 말씀대로 살지 않고 사는 대로 말씀을 멋대로 해석하여 신앙이 위기입니다.

이제 우리가 변화해야 합니다. 내가 바뀌어야 합니다. 내 생각의 틀과 내 삶의 기본방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사물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변하는 것입니다."(Things do not change; we change - Henry David Thoreau). "당신의 생각을 바꾸십시오, 그리하면 당신의 세계가 바뀔 것입니다"(Change your thoughts and you change your world - Norman Vincent Peale). "미래에 관해 여러분이 할 일은 예견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As for the future, your task is not to foresee, but to enable it - Saint-Exupery)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2020년 한 해에는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사시기 바랍니다. 흘러가는 강물과 같은 시간에 떠밀려 가지 마시고, 시대의 풍조에 휩쓸려가지 마시고,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카이로스의 시간 안에서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부르시는 그 결단과 은총의 시간 안에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다짐하는 여러분에게,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고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당신의 얼굴을 여러분에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그 얼굴을 여러분에게 드사 평화 주시기를 원합니다(민수기 6:24-2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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