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라브린스(Labyrinth)를 걷다"

박경양 목사·평화의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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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pixabay)
▲라브린스(Labyrinth)의 모습.

라브린스(Labyrinth)는 들어가면 나오는 길을 쉽게 찾을 수 없는 미궁(迷宮) 또는 어디가 어디인지 방향을 알 수 없는 미로(迷路)를 뜻합니다. 둥글게 만들어진 꼬불꼬불한 길이 때로는 중심부로 이끌다가 이내 때로는 주변부로 이끌기를 계속하는 미로와 같은 라브린스는 조용히 명상을 하거나 기도하며 천천히 걸어서 중앙에까지 다다랐다가 다시 돌아서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라브린스 걷기는 들어가기, 중심에 머물기, 나오기로 이루어집니다. 중심에 들어가기 위해 걷는 시간은 순례자가 자신을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고 또 마을을 잠잠히 가라앉히는 시간입니다. 라브린스의 중심은 쉼과 반성의 장소로 거기 머무는 시간은 성찰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시간입니다 중심에서 밖으로 나오기 위해 걷는 시간은 되새김의 시간이자, 새로워져 돌아오며 행동하기 위해 나아가는 시간입니다.]

<라브린스>는 종교적 의미에서 신성한 문양이기도 합니다. 고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그리스, 켈틱, 마야 문명의 여러 신전에는 지금도 종교적 수행에 활용됐던 라브린스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기독교에서도 초기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신자들의 영적 수행을 위해 라브린스를 사용한 흔적들이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4세기에 알제리에서는 교회장식에 라브린스를 사용한 흔적이 있으며, 6세기 초 이탈리아에서는 교회입구 돌 벽에 라브린스를 새겨놓고 신자들이 천천히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하느님 현존 앞에서 마음을 연 후 예배에 참석하게 하곤 했습니다. 특히 중세교회는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갈 수 없는 사람들이 교회 바닥 등에 새겨진 라브린스 걷게 하므로 영적성지순례로서 삼게 했습니다. 라브린스 중 프랑스 사르트르대성당 바닥에 새겨진 라브린스가 유명하고, 가장 오래된 라브린스 디자인은 일곱 겹을 이루고 있는 크레타의 라브린스입니다.

계절이 겨울임을 잊은 것인지 유난히 햇볕이 따뜻한 오후에 성공회 성프란시스수도회 성 요한 피정의 집 뜰에서 라브린스를 걸었습니다. 라브린스를 걷기 전에 내가 도달해야 할 중심을 살펴보았습니다. 크게 두어 걸음을 걸으면 닿을 듯한 거리에 중심이 있습니다. 중심에 이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아 보입니다. 두 손을 모은 채 깊이 한 숨을 들이마시고 아주 천천히 라브린스 걷기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들어가 보니 사정이 달랐습니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딴판이었습니다.

우선 내가 서있는 곳이 어디쯤인지 분간할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더 가야 중심에 이를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말 그대로 미궁입니다. 중심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길은 중심과는 정 반대의 방향으로 나를 이끕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보면 중심에 이를 수 있을지가 불안해 집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길은 다시 나를 중심으로 이끕니다. 그렇게 하기를 몇 번을 계속하면서 한 시간 여를 걷고서야 나는 중심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라브린스의 중심에는 거칠게 다듬어진 네모난 돌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순례자들이 앉아서 쉬라는 의미인 듯합니다. 잠시 앉아서 호흡을 가라앉히며 묵상에 잠겼습니다.

올해 우리나라 나이로 65세, 병약했던 유년기, 예수를 만난 소년기, 고단했던 청년기, 그리고 고독하고 가난했지만 자부심에 기대어 살았던 35년간의 목회, 내 인생이 라브린스를 너무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신앙의 길도 그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라브린스를 끝까지 걷지 않고서는 중심에 이를 수 없듯이, 인내하며 그 길을 걸은 후에야 삶에서 승리할 수 있고, 그분과 더불어 빛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숙연해 집니다. 잠시 침묵하며 지금까지 그랬듯이 내가 걸어가야 할 인생길과 신앙의 길에 더불어 함께 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다시 라브린스를 밖으로 나오기 위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나오는 길은 들어가는 길보다 쉽고 발걸음은 경쾌했습니다.

※ 이 글은 박경양 목사(평화의교회 담임)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본보는 앞서 필자의 동의를 얻어 신앙성찰에 도움이 되는 유의미한 글을 게재키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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